원 고려국[有元 高麗國]
1 추충병의익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상락부원군(推忠秉義翊贊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 上洛府院君) 김공(金公) 묘지명 및 서문
공의 이름은 영돈(永暾)
2이고, 자는 휘곡(暉谷)이며, 그 선대는 신라왕(新羅王) 김부(金傅 : 敬順王)로부터 나왔다. ▨▨▨▨▨▨▨▨왕(王)이 중세에 혼인하였기 때문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로 옮겨 거주하게 되었는데, 그 부(府)는 지금의 복주목(福州牧)이다. 13대손인 판도첨의사사(判都僉議司事) ▨▨▨▨ 방경(方慶)이 상국(上國 : 元)이 일본을 정벌할 때에 ▨▨▨ 관군을 도와 수전(水戰)에 공이 있었으므로, 천자가 중봉대부 관고려군도원수 추충정난정원공신(中奉大夫 管高麗軍都元帥 推忠靖難定遠功臣)을 제수하였다. ▨▨▨▨▨ 막내인 순(恂)은 벼슬이 판삼사 보문각대제학 상락군(判三司 寶文閣大提學 上洛君)에 이르렀는데, 바로 공의 아버지가 된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개와 절도가 있었고, 그 학문은 ▨▨▨▨▨▨▨ 하였다. 대덕(大德)
3 을사년(충렬왕 31, 1305)에 과거에 급제하여
4 복원궁(福源宮)▨▨▨▨을 거쳐 가순부승(嘉順府丞)이 되었다. 연우(延祐)
5 병진년(충숙왕 3, 1316)에는 충숙왕(忠肅王)을 수행하여 원의 서울에 들어가서 가례(嘉禮)를 청하여 공주(公主 : 濮國長公主)를 맞이하게 되었다. 공은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책봉되고 토지와 노비와 녹권(錄券)을 하사받았다. 다시 액정내알자감(掖庭內謁者監)으로 옮기고, 지합주사(知陜州事)
6로 나갔는데 ▨▨ 위엄이 있고 은혜로우니 고을이 편안해 하였으며,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그 덕을 노래하고 있다. 임기가 차자 언부산랑(讞府散郞)에 제수되었다가 민부(民部)로 옮기고, 얼마 뒤 다시 언부직랑(讞府直郞)이 되었다. 감찰(監察)▨▨로 옮기고, ▨▨전라(全羅)▨가 되어 군현을 다니며 살피다가 문득 노하여 꾸짖으며, “백성들이 곤궁하게 되면 은혜로이 보살펴 주어 염치가 있고 삼가게 하여 왕화(王化)를 얻게 하여야 하니, 수령은 ▨직책으로 ▨ 다시 소생시켜야 한다.”고 말하였다. ▨▨ 전교부령(典校副令)이 되었다가 전법총랑(典法摠郞)으로 옮겼다.
후지원(後至元)
7 무인년(충숙왕 복위7, 1338)에 소부판사(小府判事)가 되고, 기묘년(충숙왕 복위8, 1339)에는 종부부령(宗簿副令)으로 바뀌었으며, 사신으로 원의 서울에 들어가 도(都)▨▨에 머무르다가 뒤에 (충혜왕이) 원의 조정에 들어올 때 수행하였다. 경진년(충혜왕 1, 1340)에 임금이 즉위하자 ▨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가 되고, 이 해 가을 ▨▨에 마침내 ▨▨▨사(使)로 옮겼다. 과거시험을 주관하는 관리가 되어 이공수(李公遂) 등 12명을 뽑았는데
8, 그 금▨(禁▨)가 엄숙하니 사림(士林)들이 칭찬하여 ▨▨라고 하였다.
지정(至正)
9 신사년(충혜왕 복위2, 1341)에 추성병의익찬공신 상락부원군(推誠秉義翊贊功臣 上洛府院君)으로 ▨직(職)▨연(讌)▨▨▨▨, 공은 (지방으로) 나가 ▨합(合)▨ 남쪽의 백성에게 쌓여 있는 폐단을 모두 다 없애는 데 뜻을 두니, 마치 엉킨 실을 푸는 것과 같았다. ▨▨▨▨▨▨▨▨ 음식과 잔치와 사냥을 모두 물리치고 ▨▨하지 않았다. 근래에 ▨부터 이듬해에 이르기까지 ▨해(解)▨▨진(鎭)하여 임금이 내주(內酒)를 ▨▨(〔하사하고〕) 부지런하게 설득하였으므로 1년을 다시 머물렀다.
병술년(충목왕 2, 1346)에 첨의찬성사 우문관대제학 전춘추관사(僉議贊成事 右文館大提學 典春秋館事)가 되고, ▨월에 원의 서울로 갔다. 천자가 불러 ▨ 불(不)▨▨무(無)하니, 황제가 그 충직함을 가상하게 여겨 ▨백(百)▨를 맡아 ▨▨지(旨)를 정리하였다. 공이 고려로 돌아와 ▨▨▨▨ 임금에게 아뢰니, ▨▨▨정리도감(整理都監)에 억울하거나 잘못된 일을 호소하는 사람이 하루에도 무려 천여 명이나 되었다.
▨▨▨ 공은 좌정승(左政丞)이 되었다. 이에 관원을 가려서 그들과 더불어 끝까지 파고들어 사람들의 원통함을 씻어주고 시비를 가렸으며, 속이거나 잘못된 일을 바로 잡으니, 권세를 가진 자들의 원망과 비방이 모두 공의 몸으로 쏠리게 되었다.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어주(御酒)와 어의(御衣)를 내리니 원로[耆老]들이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탄식하였다. 이미 여러 사람의 노여움으로 ▨ 어렵게 되자 공은 ▨ 배척당하게 되어, 7월에 벽상삼한 삼중대광 상락부원군(壁上三韓 三重大匡 上洛府院君)이 되고 공신의 호칭은 전과 같았으나, 마침내 종적을 감추고 두문불출하면서 다시는 정리(整理 : 整理都監)에 참여하지 않았다.
10 그 ▨ 억울함을 풀지 못한 자들도 ▨ 임금이 공을 기용함으로써 우리의 가슴을 씻어 주었다.
공은 일찍이 덕수현(德水縣)
11 동쪽의 강과 산이 아름다운 곳에 별장[野莊]을 지었는데, 매 번 문득 가면 열흘이나 한 달을 머무르니 마치 장차 세상을 버린 것 같았다. 청탁을 ▨(〔가려내고〕) 강한 것을 누르고 약한 것을 도우니 많은 사람들이 잊지 않았다. 무자년(충목왕 4, 1348) 7월 무신일에 병이 들어 돌아가시니, 춘추가 64세이다. 빈소를 성 안의 공의 집으로 옮겼는데 조정의 사대부들이 모두 슬퍼하고 서로 조문하였다.
어머니는 양천
12 허씨(陽川 許氏)로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공(珙)의 딸이다.
공은 생김새가 단정하고 청렴하였으며 과단성이 있었다. 친족과 외족은 지위가 높고 현달하였지만 스스로 거만하지 않고, 옷을 입어도 화려하지 않았다. 음식은 진미를 찾지 않았고, 재물에 이르러서는 구하지도 아니하고 늘리지도 아니하였다. 친족을 대할 때에도 매우 화목하게 하여서, 비록 식사하고 잠자는 사이에라도 구태여 손님이 왔다고 알리면 반드시 앞에 나가 (이름을) 부르면서 반가워하였다. ▨▨부지(不至)▨. 만일 사대부의 행실이 나쁘거나 그 잘못을 덮고자 하면 반드시 마주 대하여 침을 뱉고 욕을 하였으므로, 당시의 이름난 벼슬아치들이 깊이 미워하였다.
부인 신씨(申氏)는 판도사랑(版圖仕郞) 여강(汝岡)의 딸로 이천군(利川郡)에 봉해졌으며, 2녀 1남을 낳았다. 장녀는 통례문판관(通禮門判官) 오원경(吳元敬)에게 시집갔으나 공보다 먼저 죽었고, 둘째 딸은 삼사판관(三司判官) 윤식(尹湜)에게 시집갔다. 아들 신(縝)은 장복직장(掌服直長)인데 우대언(右代言) 유보발(柳甫發)의 딸과 결혼하였다. 공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만년에 아들 하나를 얻었는데 장차 ▨업(〔家業〕)을 일으킬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8월 병술일에 덕수현 앙동산(德水縣 仰洞山)에 장례지내고, 시호를 추증하여 문숙(文肅)이라고 하였다. 내가 이미 공을 만나 보살핌을 받았으므로, 그 행적을 자세하게 적었다.
명(銘)하여 이른다.
풍채는 크고 당당하며, 성품은 곧고 ▨하였으며,
조정에 ▨ 들어가니 만민이 우러러보았다.
나라의 원로로 부름을 받고 천자에게 아뢰어 정치를 펴니,
마침내 ▨지(▨旨)가 내려 바로 잡아 다스리게 하였도다.
권세 있는 자가 질시하였으나 어그러진 것을 끝까지 파고들었는데
하늘이 수명을 주지 않으니 태산(泰山)이 뒤집어지도다.
생전의 덕행을 아로새겼으니 함께 끝없이 빛날 것이며
선을 쌓은 보답으로 자손도 창성하리로다.
지정(至正) 8년(충목왕 4, 1348) 8월 일
칙수 장사랑 광정대부 검교첨의참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勅授 將仕郞 匡靖大夫 檢校僉議叅理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안산군(安山君) 안진(安震)이 짓다.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