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정대부 첨의참리 상호군 나공묘지명(匡靖大夫 僉議參理 上護軍 羅公墓誌銘)
지정(至正) 4년(1344, 충목 즉위) 8월 기축일 광정대부 첨의참리(匡靖大夫 僉議參理)인 나공(羅公)이 별세하였다. 왕이 관리들에게 조문하게 하고 양절(良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해 11월 경인일 송림현(松林縣) 약사원(藥師院) 북쪽 둔덕에 장사지냈다.
공의 이름은 익희(益禧)이고,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대광(大匡)인 총례(聰禮)의 11대 손이다. 증조는 태중대부 예부상서 지도성사(太中大夫 禮部尙書 知都省事)에 추증된 효전(孝全)이다. 조부 득황(得璜)은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상서좌복야 판호부사(金紫光祿大夫 守司空 尙書左僕射 判戶部事)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회원대장군 관군상만호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군부판서 상장군 세자원빈(懷遠大將軍 管軍上萬戶 奉翊大夫 知密直司事 軍簿判書 上將軍 世子元賓)인 유(裕)는 공의 아버지이다. 은청광록대부 동지추밀원사 병부상서 상장군(銀靑光祿大夫 同知樞密院事 兵部尙書 上將軍)을 지낸 조문주(趙文柱)의 딸인 ▨▨군부인(郡夫人)은 공의 어머니이다.
(공은) 한림직학사 조열대부 삼중대광 판도첨의사사(翰林直學士 朝列大夫 三重大匡 判都僉議司事)를 지낸 묵헌선생 민지(黙軒先生 閔漬)의 딸에게 장가들어 자녀 2명을 낳았다. 딸은 봉익대부 동지밀직사사 상호군(奉翊大夫 同知密直司事 上護軍) 최문도(崔文度)에게 출가하였다. 아들 영걸(英傑)은 지금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奉翊大夫 密直副使 上護軍)이다.
공은 본래 장수 가문의 아들로 어릴때부터 무예를 익혀, 독서를 할 틈이 없었다. 그러나 천성이 곧고 절의를 사모하여 남들과 다투는 일을 부끄러워하였다. 어머니가 가산을 나누면서 별도로 노비 40명을 공에게 주었다. 공이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외아들로서 다섯 딸 가운데 거하여 어찌 차마 구차스럽게 많이 얻어 자식 많이 두신 부모님의 어지심
1에 누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부인이 옳게 여겨 허락하였다.
나이 17세에 원나라 조정에서 내린 명령으로 금부(金符)를 차고 상천호(上千戶)가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 작위를 이어 관군상만호(管軍上萬戶)가 되었다. 관계(官階)는 호덕장군(虎德將軍)으로 삼주호부(三珠虎符)
2를 찼다. 충렬왕 말년에 신호위호군(神虎衛護軍)에 임명되고, 금자 겸 첨의중사(金紫 兼 僉議中事)를 하사받았다. 덕릉(德陵 : 충선왕)이 구폐를 혁신하면서 조정의 신하들을 모두 파직시켜 쫓아내면서도 낭관의 지위에 있는 공만은 머물러 있도록 하였다. 당시 왕의 명령이 한 번 내리면 관리들이 받들어 거행하기를 혹시라도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공은 법을 지키고 잘못을 따지는 일(封駁)
3이 많았다. 권세가(權貴)들이 곁눈질하고 혹 위태로운 말로 흔들었으나, 공은 동요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벼슬에 밀려난지 10년만에 검교상호군(檢校上護軍), 다시 7년만에 감문위 상호군(監門衛 上護軍), 다시 천우위 겸 중문사(千牛衛 兼 中門使), 또 좌상시(左常侍)로 옮겼다. 세 번 관직을 옮겨 광정대부 상의평리(匡靖大夫 商議評理)가 되었고, 금성군(錦城君)에 봉해졌다.
나이 57세에 대 물리는 벼슬[世爵]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한가하게 집에 있은지 또한 17년이 되었다. 항상 민생의 고락과 인재를 쓰고 버리는 일을 생각하면서, 뒷짐을 지고 찡그린 얼굴로 혼자서 정원을 다녔는데, 남모르는 근심이 있는 듯하였다. 일찍이 계림부윤(雞林府尹)을 한 번 지냈고, 합포진장(合浦鎭將)을 세 번 하였는데,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사랑하고 은혜로워 남쪽 지방 사람들은 지금까지 공의 공덕을 칭찬하고 있다.
지금 임금[충목왕]이 이어 통치를 하자, 다시 기용하여 첨의참리(僉議參理)에 임명되었다. 세상에서 말하는 5재상이다. 얼굴이 매우 야위고 귀가 자못 어두웠으나, 일에 임하면 강개하여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루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제현(李齊賢)에게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어려서 정사를 재상에게 맡겼는데, 저 자격 없는 자(彼負且乘者)
4들이 지난날 잘못[覆轍]을 경계하지 못하니, 나는 책임을 지고 물러나서 함께 여러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바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데, 공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제현은 말하기를 “내가 전에 두세 가지 계책으로 권력을 잡은 자들을 깨우쳤으나 실행이 되지 않아 항상 부끄러워하면서도 용기 있게 물러나지 못하였으니, 감히 공의 말에 좇지 않으리요” 하였다. 10여 일 후 공이 병으로 물러나겠다고 한다는 말을 듣고, 혼자서 이전의 계획을 수행하려고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 어찌 끝내 일어나지 못할 줄을 알았는가? 급히 가서 조문하고 물러 나왔는데, 아들과 사위들이 잇달아 나의 집에 와서 변변치 못한 글을 청하면서 장차 돌에 새겨 무덤에 넣으려 한다고 했다. 의리상 사양할 수가 없어서 부탁을 받아들여 묘지명을 짓고, 다음날 상서하여 관직을 사직하였다. 죽고 사는 데에서 공의 말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명문에 말하기를,
관리가 되어서는 은혜롭고 인자하였으며, 장수가 되어서는 염치를 지켰도다
오직 의리를 구할 뿐 권세를 겁내지 않았도다.
타고난 자질 능하여서 배우지 않고도 잘 이루었으니
활촉 끼고 깃 달았다면 그 행적 여기에만 그쳤으리
보잘 것 없는 내가 늦게 욕되게 지기 되었으니
감히 언약 저버리고 공이 죽었다고 말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