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고려국 성근익찬경절공신 중대광 성산군 증시문열공 이공묘지명(有元高麗國 誠勤翊贊勁節功臣 重大匡 星山君 贈諡文烈公 李公墓誌銘)
무덤에 지석(誌石)이 있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세대가 멀어지면 혹 무덤이 무너질 수 있지만 그 지석을 보면 그것이 누구를 위하여 간직해 둔 것인 줄을 알게 되어, 진실로 차마 폐할 수 없는 것이다. 사군자(士君子)가 그 어버이를 장사할 적에 뒤로 미룰 수 없는 것이다.
성산군(星山君) 이공(李公)이 죽은 지 1년이 넘어서 내가 비로소 공을 위하여 묘지명을 찬술하는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조적(曺頔)의 변란
1때 영릉(永陵 : 충혜왕)이 불려가 천자를 알현하였다. 승상 백안(伯顔)이 묵은 감정(宿感)을 품고 영릉을 두 번이나 조적의 무리와 마주 대하여 서로 변명하게까지 하자, 공이 화를 내어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승상 앞에서 호소하면 그 뜻을 돌릴 수 있지만, 창을 벌여 세우고 문을 지키니 대궐에 나아가 호소하지 못하겠다. 다행히 백안이 성남으로 사냥을 나가면, 내가 마땅히 길가에서 상서하고 머리를 말발굽 아래 깨뜨려 죽으면서 우리 임금의 일을 밝히겠다. 그대는 붓을 잡아 나의 글을 써 주시오” 라고 하였다. 밤에 일어나 목욕을 하고 닭이 울면 나가려 하였는데, 백안이 마침 이날 패하였다. 내가 공의 의기에 감격하여 말하기를, “죽고 사는 일은 기약할 수는 없지만, 공은 저보다 20년 위의 어른이니, 혹시 큰 일이 일어나면 감히 비루한 문장을 아끼지 않고 무덤에 명을 짓겠습니다” 하니, 공이 웃으면서 허락하였다.
충혜왕이 본국으로 돌아온 다음해 겨울 왕이 북궁(北宮)으로부터 걸어서 송강(松岡)에 가서 참새를 잡았다. 공이 지름길로 나아가서 무릎 꿇고 말하기를 “전하께서 어찌 명이(明夷)의 때
2를 잊으셨습니까? 지금 악소배(惡少輩)들이 위엄을 빌어 부녀자를 겁탈하며 재물을 빼앗아 백성들이 삶을 즐기지 못하여 아침저녁으로 화가 이르러 지난날보다 더할까 두렵습니다. 이러한 데도 걱정하지 않고 도리어 사소한 오락을 즐길 수 있습니까?” 하였다. 영릉이 처음에는 매우 노하였다가 이윽고 사례하여 보냈다. 나갔다가 왕을 따르던 무리들이 악소들에게 구타당하였는데, 그들의 일을 임금에게 말하였기 때문이었다.
공은 곧 고향으로 돌아가서 세상사에 관계하지 않았다. 아! 경서에 이르기를, “제후에게 간쟁하는 신하 5인이 있으면 비록 무도하여도 나라를 잃지는 않는다” 하였는데, 공이 떠난 뒤에도 계속하여 말을 할 수 있는 강직한 선비가 4~5명만 있었더라면 악양(岳陽)의 치욕
3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이 죽자 그의 손자 인복(仁復)이 복제(服制)를 마치고, 서울에 와서 행장을 나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저에게 이전의 약속대로 묘지명을 지어라 하셨는데, 장사할 날짜는 가깝고 길은 멀어서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감히 고합니다” 하였다. 이에 사양을 할 수 없어 삼가 그 행장을 받아서 적는다.
공의 성은 이씨이고 이름은 조년(兆年), 자(字)는 원로(元老)이다. 경산부 용산리(京山府 龍山里) 사람이다. 증조 돈문(敦文), 할아버지 득희(得禧), 아버지 장경(長庚)은 모두 (경산)의 향리였다. 아버지는 뒤에 모관(某官)으로 추증되었고, 어머니 모씨는 모군(某郡)부인으로 추증되었다.
공은 17세 때 향시(鄕試)로 병과에 급제하여, 안남부서기(安南府書記)에 임용되었다가, 진주목 사록(晉州牧 司錄), 통문서 녹사(通文署 錄事), 강릉부 전첨(江陵府 典籤)이 되었다가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와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로 옮겼다. 나가서 합주(陜州 : 지금의 경남 합천) 수령이 되었다 중앙에 들어와 비서랑(秘書郞)이 되었다. 전 비서승(秘書丞)으로 기용되어 봉선대부 사헌장령(奉善大夫 司憲掌令)이 되었는데, 이로부터 관계(官階)는 중대광(重大匡)에 이르고 관직은 정당문학 상호군(政堂文學 上護軍)에 이르렀으며, 관직(館職)은 진현대제학(進賢大提學)에 이르렀다. 성근익찬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의 호를 하사받았으며, 성산군(星山郡)은 작호이며 문열공(文烈公)은 시호다.
공의 사람됨은 키는 작지만 날래고 굳셌으며, 뜻이 확실하고 과감히 말하였으므로 가는 곳마다 공적이 많았다. 공에게 더욱 칭찬할 만한 큰 절개가 다섯 가지가 있다.
대덕(大德 : 1287~1307) 말년에 공이 충렬왕을 따라 천자를 뵈려 원나라 수도에 갔을 때 충선왕이 와서 문안을 하였다. 여러 관료들은 평소 왕(王)과 송(宋)
4의 무리였기 때문에 모두 의심을 품고 위축되어 달아나 숨었다. 그러나 공은 다른 마음이 없이 나아가고 물러남을 오직 성실하게 하였다. 예에 따라 먼 곳으로 귀양갔다가 돌아와서 고향에서 13년을 지냈지만 일찍이 한 번도 자기의 죄가 아님을 호소하지 아니한 것이 그 하나이다.
여러 불령한 무리들이 충숙왕을 원에 참소하여 5년간 (원에) 억류되자
5 공은 16명의 선비와 함께 한 장의 종이에 서명하여 대궐에 나아가 청하려고 하였고, 공이 결국 혼자 4천리를 달려가 그 글을 바친 것이 둘이다.
처음 영릉이 조칙을 받들고 (원에 가서) 숙위할 때 나이가 젊어 자못 삼가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자, 공이 깨우치게 할 것을 생각하였다.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핑계로 나아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대신 귀척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천자를 섬기시니, 마땅히 날마다 더욱 삼가야 하는데, 어찌하여 예의를 버리고 정욕을 마음대로 하여 잘못을 불러들이는 것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전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유모의 집에서 성장하셔서 함께 노는 사람 가운데에 무뢰자가 많았고, 그 뒤에 박중인(朴仲仁) 이인길(李仁吉) 등이 좌우에 있어, 전하께서 누구에게 바른 말을 듣고 바른 일을 보았겠습니까? 무릇 유자(儒者)는 비록 소박하고 꾸밈이 없으나, 모두 경서(經書)를 익히고 염치를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그들을 지목하여 사개리(沙箇里)라 하시니 이 무슨 말입니까? 전하께서 아첨하는 무리를 멀리하시고 부드럽고 기품 있는 선비와 친하시어, 행실을 고치고 스스로 삼가하면 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천자의 위엄이 가까이 있어 엄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영릉이 그의 말을 감당하지 못하고 담을 넘어 달아났으나, 그 뒤에 그것을 자주 생각하게 한 것이 셋이다.
정승 백안(伯顔)에게 죽고자 한 것과 간절히 간언하고 용기 있게 떠난 것 두 가지를 합한 것이 다섯이다. 아, 어찌 어질다고 하지 않겠는가?
공은 지원(至元) 6년 기사년(원종 10, 1269) 모월 모일 갑자(甲子)일에 태어났다. 지정(至正) 3년 계미년(충혜왕 복위4, 1343) 5월 기사일에 별세하였다. 같은 달 신묘(辛卯)일에 장사지냈는데, 무덤은 그 마을의 부동(釜洞)에 있다.
부인은 초계 정씨(草溪 鄭氏)로 감찰대부(監察大夫) 윤의(允宜)의 딸이다. 아들은 하나인데, 이름은 포(褒)로 밀직부사 상호군(密直副使 上護軍)이다. 손자는 7명인데, 큰 손자가 바로 인복(仁復)으로 우부대언 좌간의대부(右副代言 左諫議大夫)다. 일찍이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담(膽)은 몸보다 크고 질(質)은 문(文)보다 낫도다.
근면으로 정사에 임하였고 지성으로 임금을 섬겼도다.
이미 봉작되고 천수를 누렸으며, 아들과 손자를 두었도다.
하늘이 복주지 않았다고 할 것인가? 마을(里門)에 와서 볼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