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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보발묘지(柳甫發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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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묘지명은 이곡(李穀)의 문집인 『가정집(稼亭集)』 권3과 『동문선(東文選)』 권124에 수록되어 있으며, 1340년(충혜왕 복위1)에 이곡이 작성하였다. 묘지명의 주인공 유보발(柳甫發 : 1304~1340)은 유주(儒州 : 지금의 황해도 文化面) 사람이다. 증조는 경(璥), 조부는 승(陞), 아버지는 인기(仁奇)이다. 어머니 김씨는 지숙(之淑)의 딸로 해양군부인(海陽郡夫人)이다.유보발은 16세에 문음(門蔭)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충숙왕때 소부소윤(少府少尹) 통예문부사(通禮門副使) 밀직대언 겸 감찰집의(密直代言 兼 監察執義)를 역임하였다. 37세에 병으로 갑자기 별세하였다. 부인(夫人) 원씨(元氏)는 선지(善之)의 딸이며, 자녀 다섯을 두었다. 장남은 계고(繼高), 차남은 상좌(尙左)이다. 장녀는 심양로 다루가치인 홀실첩목이(忽失帖木耳)에게, 차녀는 홍유귀(洪有龜)에게, 막내딸은 신양군(新陽君) 노영(盧瑛)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고려국 정순대부 밀직사우부대언 종부령 겸 감찰집의 지판도사사 유군묘지명(高麗國 正順大夫 密直司右副代言 宗簿令 兼 監察執義 知版圖司事 柳君墓誌銘)
유주(儒州 : 지금의 황해도 文化面) 유씨로 고려왕조를 개국하는데 협력한 이(태조의 佐命功臣인 柳車達을 지칭함)가 있었다. 그 후로 경사로움을 잇고 덕을 펴면서 대대로 어진 사람들이 나왔다. 명종 때 재상인 공권(公權)은 학문을 좋아하고 초서와 예서(草․隸書)에 능하였다. 관직은 참지정사(參知政事)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이때 최충헌(崔忠獻)이 도적을 물리친 공으로 임금을 폐하고 세우기를 마음대로 하고 자손 대대로 국정을 마음대로 하였다. 충헌왕(忠憲王 : 高宗) 무오년(고종 45, 1258) 문간공(文簡公)의 손자 경(璥)은 재주와 덕망이 당시 으뜸이었다. 별장(別將) 김인준(金仁俊)과 더불어 충헌(忠獻)의 증손 의(誼)를 제거하고 임금에게 정권을 되돌리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사직(社稷)에 공을 세운 일이 지금까지 칭송되고 있다. 관직은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상장군 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 僉議中贊 修文殿 太學士 監修國史 上將軍 判典理司事 世子師)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군(君)에게 증조가 된다. 문정공은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 승(陞)을 낳았고, 시호는 정신(貞愼)이다. 정신공은 문화군(文化君) 인기(仁奇)를 낳고, 시호는 온정(溫靖)이다. 첨의중찬(僉議中贊) 광절공(光節公) 지숙(金之淑)의 딸을 맞았다. 해양군부인(海陽郡夫人) 김씨(金氏)로 군에게는 부모가 된다.
군의 이름은 보발(甫發)로 16세에 문음(門蔭)으로 흥왕도감판관(興王都監判官)에 임명되어 두 번 옮겨 낭장(郎將)이 되었다. 지원(至元) 2년 병자년(충숙왕 복위5, 1336) 소부소윤(少府少尹)에 임명되었다가 통예문부사(通禮門副使)로 옮겼다. 기묘년(충숙왕 복위8, 1339) 봄 밀직대언 겸 감찰집의(密直代言 兼 監察執義)가 되었다.
천성이 총명하고 공손하여 어려서부터 의릉(毅陵 : 忠肅王)의 부름을 받았는데 이때 그를 장차 크게 쓰려고 시험 삼아 납언(納言)의 임무와 풍기(風紀)의 직책을 겸하게 하였다. 군은 가업을 깊이 생각하여 욕됨이 없게 하는데 뜻을 두었고, 장차 공을 세워서 이름을 후대에 남기고자 하였다. 다른 사람들 또한 이것을 바랐다. 의릉(毅陵)이 죽자 당시의 일들이 크게 변하였다. 다음해(충혜왕 복위1, 1340) 8월 을미일에 병으로 갑자기 죽으니 나이 37세였다.
부인(夫人) 원씨(元氏)는 죽은 검교평리(檢校評理) 선지(善之)의 딸로 훌륭한 문벌에서 덕을 길러 어진 대가에 들어가 제사를 받들고 음식을 주관하였다. 공순하면서 절도가 있었다. 자녀 다섯을 두었다. 장남 계고(繼高)는 10살이고, 차남 상좌(尙左)는 8살이며, 장녀는 심양로 다루가치(瀋陽路 達魯花赤) 홍천군(洪川君) 홀실첩목이(忽失帖木耳)에게 시집갔다. 둘째 딸은 지유낭장(指諭郎將) 홍유귀(洪有龜)에게, 막내딸은 신양군(新陽君) 노영(盧瑛)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9월 경신일 성동(城東) 대덕산록(大德山麓)에 장사지냈다. 부인이 군(君)과 일찍이 왕래하던 문사 중에서 나만한 이가 없다고 하여 와서 묘지명을 청하였다.
명(銘)에 이르기를,
유씨(柳氏)의 일어남은 나라와 함께 하였고
근원은 아득하고 경사스러움이 면면이 흐르도다.
문간공(文簡公) 문정공(文正公)은 재능과 어짐이 있어
잇달아 우리 동방에서 오대를 이었네.
생각컨대 군은 능히 본받아 뜻이 독실하여 선업을 잇고자 하나
하늘이 덕을 싫어하지 않으면서 어찌 오래도록 살게 하지 않는가?
누가 수명의 짧음을 주관하는지 그 연유를 찾을 수 없도다.
무덤에 명(銘)을 새겨 오직 후대에 전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