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광 현복군(重大匡 玄福君) 권공(權公) 묘지명 및 서문
권씨는 김행(金幸)에서 비롯되었다. 김행은 신라의 대성(大姓)으로 복주(福州 : 安東)의 태수였는데, 태조(왕건)가 이미 왕위에 올라 신라를 공격하여 복주에 이르자, 김행은 천명이 돌아가는 바를 알고 항복하였다. 태조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김행은 능히 권도(權道)가 있다고 할만 하다” 말하고, 권(權氏)라는 성을 주었다.
후세에 가문의 많은 이들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문청공(文淸公) 단(㫜)은 신망이 컸고, 첨의참성사(僉議贊成事)를 지냈다. 국재선생(菊齋先生)인 부(溥)는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으며, 문장과 도덕이 당대에 으뜸이었다. 송재선생(松齋先生) 준(準)은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봉해져 관원을 두었다. 겸손하며 절의를 지켰으며, 집에 머물기를 즐겨하였다. 온 나라 사람들이 선생을 존경하였다. 3대(權㫜, 權溥, 權準)가 모두 지공거(知貢擧)를 지내 많은 문생들이 높은 관직에 올랐다. 이 때문에 부귀를 흠모하고 예법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모두 권씨에게 돌아갔다.
의릉(毅陵 : 충숙왕)의 비가 된 공의 딸은 수비(壽妃)이고, 영릉(永陵 : 충혜왕)의 비 화비(和妃)는 공의 누이의 딸인 홍씨(洪氏)이다. 이는 (왕실이) 권씨를 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공은 비록 문음(門蔭)으로 높은 관직에 올라 세상에 이름을 빛내었으나 마음에 그다지 즐거워하지 않았다. 오직 절의를 중히 여겼다. 세상에서는 이 때문에 공을 칭찬하였다.
공의 이름은 렴(廉)이며 자는 사렴(士廉)이다. 송재공(松齋公 : 권준)이 밀직사(密直司) 오인영(吳仁永)의 딸에게 장가들어 대덕(大德) 임인년(충렬왕 28, 1302) 동10월 기사(己巳)일에 공을 낳았다. 10세 때 함경전 녹사(含慶殿 錄事)에 임명되었다. 연우(延祐) 갑인년(충숙왕 1, 1314) 별장(別將)으로 옮겼다. 이듬해 보마배행수(寶馬陪行首)에 선발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낭장(郞將)으로 승진하였다. 정사년(충숙왕 4, 1317) 연경(燕京)에 갔다. 무오년(충숙왕 5, 1318) 삼사부사(三司副使)에 임명되고, 관계(官階)는 봉상대부(奉常大夫)에 올랐다. 여름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지치(至治) 계해년(충숙왕 10, 1323) 또 연경에 가서 황제가 계신 곳에 나아가 받들었다. 태정(泰定) 갑자년(충숙왕 11, 1324) 중정대부 사복정(中正大夫 司僕正)이 되었다. 이듬해 원나라 황제에게 아뢰어 선무장군 합포진변만호부 만호(宣武將軍 合浦鎭邊萬戶府 萬戶)에 임명되었다. 대개 선대부터 물려받은 관직이다.
1 그 이듬해 응양군 대호군(鷹揚軍 大護軍)으로 관직을 옮겼다. 다시 그 이듬해 선군별감(選軍別監)이 되어 토지를 나누어 줌에 법도가 있어, 사람들이 그것을 편하게 여겼다. 천력(天曆) 무진년(충숙왕 15, 1328) 연경에 갔다. 지순(至純) 경오년(충숙왕 17, 1330) 고려로 돌아와 정순대부 좌상시(正順大夫左常侍)에 임명되었다. 후지원(後至元) 을해년(충숙왕 복위4, 1335) 현복군(玄福君)에 봉해졌다. 공은 아량이 있고 공무(公務)를 다스리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를 흠모하였다. 무인년(충숙왕 복위7, 1338) 춘삼월 의릉(毅陵 : 충숙왕)이 말하기를 “현복군(玄福君)은 함께 정사를 의논할 만하다”고 하고, 공에게 광정대부 첨의찬성사(匡靖大夫 僉議贊成事)로 임명하였다. 당시 연남(燕南) 출신인 양재(梁載)가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공은 그 사람됨을 비루하게 여겨 사귀지 않았다. 양재가 그것을 마음에 품고 원망하여 공의 임명을 극력 저지하였다. 이듬해 다시 현복군에 봉해졌고, 일년이 지나 공은 집에서 병으로 별세하였다. 경진년(충혜왕 1, 1340) 4월 초 9일이다.
정헌공(正獻公) 왕후(王煦)
2는 공의 숙부이다. 정헌공이 울면서, “권씨의 자제로 만호(萬戶)보다 현명한 이가 없다. 나는 일찍이 그가 권씨의 종족을 비호해주리라고 바랐다. 하늘은 어찌 이다지도 빨리 나의 현명한 자제를 뺏어가는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정헌공은 좋아하는 바에 아부하지 않았고 또 사람을 알아보는 학식과 견문을 가지고 있어, 공의 어짊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공은 부귀한 집안에서 자랐으나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물리쳤으며, 경조사에는 반드시 몸소 갔다. 타인의 장례에 종족과 벗을 불문하고 검은 갓과 흰 옷을 입고 안색을 슬프게 하여 보는 자들이 그 지성에 감복하여 모두가 자기들이 미치지 못할 바라고 여겼다. 평생 사람들과 잘 사귀어 사람들이 환난을 당하면 힘을 다해 도와주려 하였으며 일이 수습된 뒤에야 도와주는 것을 그쳤다. 비록 주연 베푸는 것을 좋아하였으나 노래 부르며 노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고 또 활쏘기와 말 타기를 잘하여서 사냥하면서 어긋나는 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잡은 것이 매우 많아, 무부(武夫)들이 그의 능력을 칭송하였다. 그가 좋아하지 않는 것은 작록(爵祿)이며, 부모에게 받아들여지고 벗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그의 큰 바램이었다.
공이 섬기거나 벗하는 자는 익재 이시중(益齋 李侍中 : 李齊賢) 회안 장순공(淮安 莊順公) 양파 홍시중(陽坡 洪侍中 : 洪彦博) 안상헌(安常軒 : 安震) 안근재(安謹齋 : 安軸) 홍당성(洪唐城) 김언양(金彦陽) 민급암(閔及庵 : 閔思平) 최졸옹(崔拙翁 : 崔瀣) 이평리(李評理) 권・배복야(權裵僕射) 배천경(裵天慶)이다. 모두 당대의 호걸들로 문학과 정치, 말타기와 사냥에서 사람들이 지금도 으뜸으로 삼는 이들이다. 공은 그들과 교유하여 자연스럽게 재주를 익혔으며 또 죽은 시중 김봉일(金逸逢)을 초빙하여 몽고어를 익혀 잘하였다. 그 재주의 아름다움이 족히 많았으나, 하늘은 어찌하여 공에게 천수(天壽)를 내리지 않았는가.
공이 돌아가셨을 때에 조부모와 부모가 모두 병이 없었으니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으며, 공이 장차 죽으려 할 때 조부모와 부모를 생각하였을 것이니 공의 마음은 또 어떠하였겠는가. 아 슬프다.
부인 조씨는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낸 충숙공(忠肅公) 연(璉)의 딸이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자식들을 가르침에 법도가 있어 종족들이 부인을 칭송하였다. 공이 돌아가신지 지금 삼십여 년이다. 자식들이 모두 높은 관직에 올라 집안을 잇고 있으니 죽은 영혼인들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공이 돌아가실 때에 이색(李穡)의 나이 겨우 13세였다. 누가 13세의 어린아이가 공의 묘지명을 지으리라고 말했겠는가. 아. 이것이 모두 감개로운 일이다. 공의 자식들이 모두 나와 친하게 지냈고 또 찾아와서 공의 묘지명을 부탁하는 까닭에 그 집안의 내력과 거쳐간 관직을 서술하고 자손을 기록한다.
장남 용(鏞)은 선무장군 합포진변만호부만호 중대광 현성군(宣武將軍 合浦鎭邊萬戶府萬戶 重大匡 玄城君)이다. 차남 현(鉉)은 왕부단사관 봉익대부 판도판서 상호군(王府斷事官 奉翊大夫 判圖判書 上護軍)이다. 3남 호(鎬)는 봉익대부 전법판서 상호군(奉翊大夫 典法判書 上護軍)이다. 4남 균(鈞)은 봉의대부 융상제점소 제점 봉익대부 전공판서 상호군(奉議大夫 隆祥提點所 提點 奉翊大夫 典工判書 上護軍)이다. 5남 주(鑄)는 중정대부 삼사좌윤 진현관직제학 지제교(中正大夫 三司左尹 進賢館直提學 知製敎)이다. 장녀는 수비(壽妃)이다. 차녀는 원나라 한림학사승지 영록대부(翰林學士承旨 榮祿大夫)인 보달실리(普達實理)에게 시집을 갔다. 3녀는 봉익대부 판전의사(奉翊大夫 判典儀事)인 오중화(吳仲和)에게 시집을 갔다. 4녀는 중정대부 전의령 보문각직제학 지제교(中正大夫 典儀令 寶文閣直提學 知製敎)인 염국보(廉國報)에게 시집을 갔다. 5녀는 선수정동행중서성 도진무사도진무 충근찬화공신 광정대부 정당문학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宣授征東行中書省 都鎭撫司都鎭撫 忠勸贊化功臣 匡靖大夫 政堂文學 進賢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인 원송수(元松壽)에게 시집을 갔다.
손자와 손녀 몇 명이 있다. 현성군(玄城君)은 2남 4녀를 낳았다. 장남 준(濬)은 행수별장(行首別將)이다. 차남 연(演)은 산원(散員)이다. 딸은 별장 민공량(閔公亮), 차녀는 중랑장 송인수(宋仁壽)에게 각각 시집을 갔으며, 나머지는 아직 시집가지 않고 집에 있다. 단사관(斷事官)은 1남5녀를 낳았다. 남자는 수안(壽安)으로, 성균학생(成均學生)이다. 딸은 도제고판관(都祭庫判官) 김균(金稛)에게, 차녀는 보마행수별장(寶馬陪行首別將) 박자안(朴子安)에게, 차녀는 별장 김을부(金乙富)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판서(判書)는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징(澄)은 행수낭장(行首郞將)이며, 차남 한(澣)은 성균진사(成均進士)이며, 차남 담(湛)은 전보도감녹사(典寶都監錄事)이다. 딸은 좌우위녹사(左右衛錄事) 홍희충(洪希忠)에게, 차녀는 별장 한휴(韓烋)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제점(提點)은 1남 2녀를 낳았다. 남자인 홍(弘)은 성균학생이다. 딸들은 모두 어리다. 좌윤(左尹)은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훈(壎), 차남 식(埴)은 모두 어리고, 여자 또한 어리다.
외손 몇 명이 있다. 승지(承旨)는 1남 1녀를 낳았다. 남자는 습득로(拾得驢)이며, 딸은 어리다. 오씨(吳氏)는 1남 4녀를 낳았다. 아들 제보(齊甫)는 흥복도감녹사(興福都監錄事)이며, 딸들은 모두 어리다. 염씨(廉氏)는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치중(致中)은 목릉직(穆陵直)이며, 차남 치화(致和)는 창릉직(昌陵直)이며, 딸은 어리다. 원씨(元氏)는 2남을 낳았다. 장남 서(序)는 복두점녹사(幞頭店錄事)이며, 차남 상(庠)은 사경원판관(寫經院判官)이다. 장례는 개성현의 대평원(大平院) 서쪽 언덕에 지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이미 어버이에 효도하고 또 사람에게 믿음을 받았으며
벼슬 또한 군에 봉해졌으니 그 몸이 일세에 현양하였도다.
천자께서 이르기를 아라 탄식하시고 호부(虎符)를 내리시니
가문을 잘 이어 그 영광이 해동에까지 넘쳤도다.
아들 많이 두고 장수하는 사람이 세상에 많기도 하건만
한스럽게도 공에겐 부족하였으니 그 누가 방해하였던고
오직 일시의 은총은 사람이 어질지 않으면 중하지 않을 것이나
저 무덤이 황무할 지라도 경의 이름은 민멸되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