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감묘지(崔太監墓誌)
나(최해)는 성격이 게으르고 싸움에 겁이 많다. 10년 전에 임금님께 총애를 받는 한 내시에게 모함을 당하였다. 내가 비록 게으르고 겁이 많지만 가서 그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가보니 당시의 현사대부(賢士大夫)들이 모두 그의 손님으로 있고, 그 집 대문은 시장바닥 같았다. 조금 있다 내시가 나오자 손님들은 계속 절하고 무릎을 구부리며 서로 뒤질까 두려워 하였다. 나는 선비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예법에 맞게 그와 상대하려고 하였다. 그랬더니 내시는 거만하게 나를 바라보고는 곧 말에 올라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나는 부끄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여 물러나 오며 말하였다. “일이 내 뜻대로 된 것이 아닌데 그것을 밝힐 수 없다하여도 무슨 손해가 있겠는가.”
최밀직(崔密直)이 매일 임금을 뵙고 아뢰는 것이 모두 받아들여 진다는 것으로 명성이 높다는 것을 들었는데 누군가가 나에게 가서 만나 뵙고 별도로 말을 해보라고 권하였다. 나는 그 권유를 따라서 그의 집 문 곁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밀직(密直)은 멀리서 여러 사람 속에 있는 나를 보고 자리에서 내려와서 먼저 나에게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나에게 찾아 온 이유를 묻고 곧 나를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해 주었다. 당시 그 내시의 세력이 대단하여 (최밀직의 노력을) 힘써 방해한 까닭에 나의 일은 끝내 올바르게 해결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밀직은 먼저 인사 받으려 하지 않고 선비들을 대접하는 옛날 의협(義俠)의 풍모가 있는 것에 감동되었고 그 후 매번 뵐 때마다 특별한 대접을 해주었다. 밀직은 고려의 벼슬인데 그는 원나라 조정에 벼슬하여 3품에 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내가 어찌 추모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그 아들들의 부탁을 받아 그의 행적을 기록하는 글을 써주면서 거기에 나의 슬픔을 담고자 한다.
공의 이름은 안도(安道)이고 성은 최씨(崔氏)이며 어릴적 이름은 나해(那海)이다. 그 선대는 해주인(海州人)이지만, 뒤에 용주(龍州 : 지금의 평안도 龍川)로 이사하여 그곳에 적을 두었다. 그의 윗대 조상은 알 수 없다. 증조인 광(光)은 주(州)의 부호장(副戶長)을 지냈다. 할아버지인 대부(大富)때 처음 벼슬하여 검교 대장군(檢校大將軍)이 되었다. 아버지 현(玄)은 광정대부 검교첨의평리 상호군(匡靖大夫 檢校僉議評理 上護軍)이었고, 공이 원나라 조정에서 귀하게 되자 조청대부 대도로 동지교위(朝請大夫 大都路 同知驍騎尉)에 추증되고 또 대흥현남(大興縣男)에 추봉(追封)되었다. 어머니 김씨(金氏)도 대흥현군(大興縣君)에 추봉되었다.
지대(至大) 원년(충선왕 즉위, 1308) 공은 15세로서 산원(散員)에서 낭장(郞將)으로 발탁되었고, 연우(延祐) 4년(충숙왕 4, 1317)에 호군(護軍)으로 임명되면서 관계(官階)는 봉상대부(奉常大夫)가 되고 금자(金紫)의 옷을 하사받았다. 이후 계속 승진하여 대호군(大護軍),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 관계는 세 번 뛰어 정순대부(正順大夫)가 되었다. 태정(泰正) 4년(충숙왕 14, 1317) 응양군주 판군부서(鷹揚軍主 判軍簿書)가 되었다. 지순(至順) 원년(충혜왕 즉위, 1330) 부밀직사(副密直司)에 승진되고 관계도 봉익대부(奉翊大夫)가 되었다가, 곧 감찰대부 동지밀직사사(監察大夫 同知密直司事)가 되고 협모동덕공신(協謀同德功臣)의 호를 받았다. 다시 황제의 칙명(勅命)으로 정돈행성(征東行省)의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郞)이 되었고, 지순(至順) 2년(충혜왕 2, 1331)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 숙위(宿衛)하였다. 원통(元統) 원년(충숙왕 복위2, 1333) 원나라 중상감승(中尙監丞)에 임명되고 봉의대부(奉議大夫)가 되었다. 지대(至大) 2년(충숙왕 복위5, 1336) 태부감소감 조청대부(太府監少監 朝請大夫)가 되었고, 지대(至大) 6년(충혜왕 복위1, 1340) 다시 대부감대감 중의대부(太府監大監 中議大夫)가 되었다.
원나라 수도에서 벼슬한지 9년에 3번 승진하였고 두 번 (국왕을 임명하는) 황제의 조서를 받들어 나라의 영광이 되었다. 한 번은 지순(至順) 3년(충숙왕 복위1, 1332)이고 두 번째는 지원(至元) 5년(충혜왕 복위, 1339)이다. 다음 해 봄에 (조서를 전달하는) 사신의 일을 마치고 원나라에 돌아가려다 병이 나서 7일 만에 죽으니 나이 47세였고, 경진년(충혜왕 복위원, 1340) 3月 27日이었다.
공은 어려서 아버지 조청공(朝請公)을 따라 원나라 수도의 관저에서 태위심왕(太尉瀋王 : 충선왕)을 모시면서 세 나라(몽고 중국 고려) 말을 잘하였다. 뒤에 선왕(先王 : 忠肅王)이 왕자로 있을 때 그의 관속(官屬)으로서 오랫동안 섬겼다. 그 수고를 생각하여 토지 100결(우리나라의 풍속에 5묘(畝)에서 100궁(弓)을 뺀 것을 결(結)이라고 하고,
1 곡(斛)에서 1두(斗)를 뺀 것을 섬(苫)이라고 文昌侯(최치원)가 말하였다)과 노비(奴婢) 10구(口)를 내려주었다. 또 지치(至治) 연간(충숙왕 8, 1321~충숙왕 10, 1323)에 선왕(先王)이 충성스럽지 못한 신하들의 음모에 의해 원나라 수도에 머물게 되었는데 공은 왕의 말고삐를 잡고 수행하며 두 마음을 갖지 않아 토지 200결과 노비 20구(口)를 받았다. 태정(泰定 : 충숙왕 11, 1324~충숙왕 14, 1327)초에 원나라 조정은 반역자의 말을 듣고 (고려에) 정동성관(征東省官)을 두어 고려를 원나라에 편입시킬 것을 의논하였는데, 공은 죽은 재상 김이(金怡) 등과 함께 힘써 노력하여 그 의논을 중지시켰다. 이에 그 공을 논하여 토지 100결과 노비 10구(口)를 내려주었다. 충혜왕이 선왕을 이어 즉위하자 곧 밀직(密直)을 제수하였고 왕이 믿고 의지하는데 공을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 또 지순(至順) 연간(1330~1332, 충혜왕 즉위~폐위) 지금의 천자(원나라 순제)께서 바다에 계실 때
2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데 개인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뒤에 등극하여 물건을 매우 많이 주셨고 특별히 옥쇄가 찍힌 문서를 내려서 토지와 재산을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침탈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원나라에서 벼슬하게 된 것도 이에 바탕한 것이었다.
아! 이상의 대강을 보면 공의 사람됨을 충분히 볼 수 있으니 그 밖의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처 구씨(具氏)는 죽은 봉익대부(奉翊大夫)인 예(藝)의 딸로서, 역시 공이 귀하게 되면서 박릉군군(博陵郡君)으로 봉해졌다. 슬하에 4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유(濡)
3로 지금 상호군(上護軍)이고, 차남은 원(源)으로 지금 호군(護軍)이다. 그 다음은 숙신(淑臣)과 문구(文丘)인데 모두 아직 벼슬에 오르지 않았다. 장녀는 전호군(前護軍) 인당(印瑭)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전낭장(前郎將) 김유온(金有溫)에게 시집갔다. 3녀는 전별장(前別將) 임희재(林熙載)에게 시집갔고, 막내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금년 5월에 공을 모지(某地)의 들판에 장사지냄에 예에 맞게 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왕국(王國)에 벼슬하여 왕의 신하가 되었고, 천자의 조정에 벼슬하여 천자의 신하가 되었네. 이것이 가볍고 저것이 무거운 것을 어찌 내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옛말에 ‘일국의 선비가 있고, 천하의 선비가 있어 재주는 두 가지를 겸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공과 같은 사람이 어찌 다시 있을 수 있을 수 있겠는가. 아깝도다. 생각은 깊으되 수명이 길지를 못하였구나. 믿을 수 없는 것은 하늘에 있다고 하지 않던가. 하늘에 있다고 하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