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 봉의대부 태상예의원판관 요기위 대흥현자 고려 순성보익찬화공신 삼중대광 우문관대제학 영예문관사 순천군 채공묘지명(有元 奉議大夫 太常禮儀院判官 驍騎尉 大興縣子 高麗純誠輔翊贊化功臣 三重大匡 右文館大提學 領藝文館事 順天君 蔡公墓誌銘)
지원(至元)
1 6년(충혜왕 복위1, 1340) 경진 정월 10일 계해에 대흥현자 순천군(大興縣子 順天君) 채공(蔡公)이 79세에 병으로 별세하였다. 예로써 장사지내려 하면서, 그 아들과 사위가 공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이곡)에게 묘지명을 청하므로, 내가 “공의 행실과 의리는 한 세상에 높았고, 공덕은 온 나라에 알려져 있는데, 묘지명을 짓는 데 무엇을 더할 수 있으리오”하고 말했다.
공의 이름은 홍철(洪哲)이고 자는 무민(無悶)으로, 교주도 평강현(交州道 平康縣) 사람이다. 나이 18세에 문사(文詞)에 능하여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23세에 진사로 합격하여 처음 응선부녹사(膺善府錄事)에 임명되었다. 다섯 차례 옮겨 통레문지후(通禮門祗侯)가 되었다가 장흥부사(長興府使)로 나가 어진 정치를 하였다. 부사의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서 한가로이 있은지 무릇 14년이었다. 스스로 중암거사(中菴居士)라 부르면서 항상 불교의 선지(禪旨)와 거문고 책 약 짓는 일로 나날을 보냈다. 천성이 높은 사람을 사사로이 찾아보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일에 욕심 없이 깨끗하게 일생을 마칠 듯 하였다.
덕릉(德陵 : 충선왕)이 평소 그의 명성을 알았으므로, 지대(至大) 무신년(충선왕 즉위, 1308) 새 정치를 하면서 어진 이를 쓰기에 급하여 장차 공을 크게 임용하려 하는데, 공은 고집을 부리다가 강청에 못 이겨 벼슬길에 나갔으며, 곧 사의부정(司醫副正)에 임명되었다. 황경(皇慶) 임자년(충선왕 4, 1312)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되었다. 지후(祗侯)로 한 번 기용된 이후 여덟 번 옮겨 재상이 되었다. 사림(士林)들은 이를 영광스럽게 여겼다.
연우(延祐) 갑인년(충숙왕 1, 1314) 토지의 경계를 바로 잡는 임무를 공이 전담하여 이에 사방 토양
2의 성질을 살피며 옛 제도를 참작하여 개간지를 획정하고 조세를 때에 맞추어 거두는데 힘써, 공사(公私)가 편안하게 되었다. 충선왕이 더욱 큰 인물로 여겨 누차 승진하여 밀직사(密直使)를 더하였다. 이듬해 겨울에 일이 알려져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올랐다가 삼사사(三司使)로 옮겼으며 얼마 후에 찬성사(贊成事)로 옮겼다. 경신년(충숙왕 7, 1320) 평강군(平康君)에 봉해졌다. 공의 아들이 원나라 조정에서 벼슬하여 관질(官秩)이 5품인 자가 있어 그 은혜로서 태상예의원판관(太常禮儀院判官)에 봉해져, 계(階)와 훈(勳) 그리고 작(爵)을 모두 갖추었다. 지순 임신년(충숙왕 복위1, 1332) 충숙왕(毅陵)이 복위하여 옛 사람을 임용하면서 다시 정승으로 기용되었고, 다시 순천군(順天君)에 봉해졌고 관계는 삼중대광(三重大匡)에 공신호가 더해졌다. 이어서 대우문(大右文 : 右文館大提學) 영예문관(領藝文館 : 領藝文館事)으로 병자년(충숙왕 복위5, 1336) (과거를 주관하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많은 선비를 얻었다고 한다.
공은 문장과 기예가 지극히 정교하였다. 특히 불교에 조예가 깊어 그 도를 논함에 비록 승려라 하더라도 공이 한 마디 말로 굴복시켰다. 참으로 식견이 없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일찍이 집 북쪽에 전단원(旃檀園)을 창설하여 항상 선승(禪僧)을 봉양하니 자못 득도한 자가 나왔다. 또 약방을 (전단)원 가운데 베풀어 나라 사람들이 의뢰하였으며, 활인당(活人堂)이라 불렀다. 뒤에 집 남쪽에 당(堂)을 짓고 중화당(中和堂)이라 이름하고, 때로 영가군 권공(永嘉君 權公 : 權溥) 이하 국상(國相) 8인을 맞아들여 기영회(耆英會)를 만드니, 대개 옛 어진 이를 사모한 것으로 풍류가 줄어들지 않았다. 공은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나고, 풍모와 지혜는 당대에 드물었다. 사람을 취하는데 미리 준비함이 없이 허물도 보고 어짐도 알았다. 집에 있으면서 남을 대할 때면 한 덩어리로 화기(和氣)롭게 하여, 훌륭하고 아름다운 군자라 할 만하다.
증조 모(某)는 상서령(尙書令)에 추증되었고, 조부 모(某)는 소부감(小府監)을 지내고 평장사(平章事)에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모(某)는 좌우위 보승낭장(左右衛 保勝郎將)을 지내고 첨의정승(僉議政丞)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박씨(朴氏)는 승평군부인(昇平郡夫人)으로 한국대부인(韓國大夫人)에 추증되었는데,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추증된 모(某)의 딸이다. 부인 김씨는 영가군부인(永嘉君夫人)으로 역시 아들이 귀하게 되자 대흥현군(大興縣君)에 봉해졌으며, 부인의 아버지 모(某 : 金方慶)는 지위가 첨의중찬 상락공(僉議中贊 上洛公)에 이르렀고, 원나라 세조 황제때 조정에 공이 있다하여 중봉대부 도원수(中奉大夫 都元帥)에 임명되었다.
부인은 유순하고 아름답고 정숙하고 착하여 규문(閨門)의 법도를 잘 지켰고, 자녀 5인을 낳았다. 맏아들 하중(河中)은 원나라 궁중에 숙위하여 태부부 자의참군(太傅府 咨議參軍)에 선임되었고, 그 사이 본국에서 벼슬하여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으며, 지금 평강군(平康君)이 되었다. 둘째 아들 하노(河老)는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이며, 셋째 아들 선지(先智)는 불교를 배워 계조연진대선사(繼祖演眞大禪師)가 되었다. 맏딸은 지금 계림부윤 검교첨의평리인 설현고(薛玄固)에게 시집갔으며, 둘째 딸은 죽은 좌우위 보승별장(左右衛 保勝別將) 정광조(鄭光祖)에게 시집갔는데, 공보다 앞서 죽었다.
공이 세상을 떠남에 사람들은 모범을 잃었고, 나라에서는 기구(耆龜)를 잃게 되어 탄식하고 애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4월 초8일 경인에 성의 동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명(銘)에 이르기를,
사람이 덕이 있으면 반드시 벼슬하고 반드시 장수하지만
혹 그렇지 못하기도 하는데 오직 공만은 능히 있었네.
오직 공만이 있으니 이 때문에 길이 전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