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숙공(忠肅公) 묘지
이름난 가문과 훌륭한 혈통[名家右族]으로 장수와 재상을 겸하여 덕망은 태산(泰山)과 화산(華山)처럼 높고 위엄과 명성은 천둥과 같이 우렁차서, 공적이 종(鍾)과 솥[鼎]에 새겨지고
1 빛나는 행적이 대나무와 비단[竹帛]에 기록되었더라도
2 처음부터 끝까지 결함이 없는 사람은 고금에 드문데, 지금 정승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 김공(金公)에게서 그것을 본다.
공의 이름은 심(深)이고, 자는 연수(淵叟)이며, 광주(光州) 사람이다. 증조 광세(光世)는 조의대부 신호위대장군(朝議大夫 神虎衛大將軍)에 추증되고, 조부 경량(鏡亮)은 조정대부 흥위위대장군(朝靖大夫 興威衛大將軍)이며, 아버지 주정(周鼎)은 선수 소용대장군 관군만호 광정대부 지도첨의부사 보문각태학사 동수국사 판삼사사 상장군(宣授 昭勇大將軍 管軍萬戶 匡靖大夫 知都僉議府事 寶門閣太學士 同修國史 判三司事 上將軍)이고 시호는 문숙공(文肅公)이다. 어머니 장씨(張氏)는 그 세계(世系)가 상질현(尙質縣)
3에서 나왔는데, 정헌대부 군부판서 응양군상장군(正獻大夫 軍簿判書 鷹揚軍上將軍)에 추증된 득구(得球)의 딸이며, 공이 귀하게 되자 상질현대부인(尙質縣大夫人)에 봉하여졌다.
공은 나이 15세 때 문음(門蔭)으로 이직(吏職)에 보임되었다가 곧 별장(別將)으로 바꾸어 임명되었다. 지원(至元)
4 15년 무인년(충렬왕 4, 1278) 공의 나이 17세에 의관자제(衣冠子弟)로 황제의 궁궐에 입시(入侍)하였다. 신사년(충렬왕 7, 1281)에 낭장(郎將)이 되고, 정해년(충렬왕 13, 1287)에 서해도
5 권농사(西海道 勸農使)로 명을 받고 귀국하여 금위(禁衛)의 수령(首領)이 되었다. 기축년(충렬왕 15, 1289)에 임금을 수행하여 원(元)에 조회하고, 경인년(충렬왕 16, 1290)에는 임금을 따라 돌아와 사순위 정용장군(司巡衛 精勇將軍)이 되었다. 이 해에 각산(角山)
6에 나가 다스리니 군령(軍令)이 엄숙하여 아버지의 풍모가 있었다. 갑오년(충렬왕 20, 1294)에 지합문(知閤門)이 되었는데, 용모와 행동이 뛰어나며, 오고가는 것이 법도에 맞으니 임금이 크게 쓰려는 마음이 있었다.
원정(元貞)
7 원년 을미년(충렬왕 21, 1295)에 선수 정략장군
8 고려우군만호 부만호(宣授 正略將軍 高麗右軍萬戶 副萬戶)가 되고, 대덕(大德)
9 원년 정유년(충렬왕 23, 1297)에 흥위위 대장군(興威衛 大將軍)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밀직사 우부승지(密直司 右副承旨)로 뛰어 올랐다. 얼마 뒤 차례대로 승진하여 우승지 지신사(右承旨 知申事)가 되었는데, 아뢰는 것이 모두 뛰어나 임금의 뜻에 잘 맞았으므로 곧 우상시 상장군(右常侍 上將軍)이 되었다. 5년(충렬왕 27, 1301)에 서북면 도순사(西北面 都巡使)가 되어 나갔는데, 관리들을 살피고 백성들의 고충을 물으니 온 경내가 편안하여졌다. 6년(충렬왕 28, 1302)에 차례를 뛰어넘어 지사사 판사사(知司事 判司事)가 되었다. 9년 을사년(충렬왕 31, 1305)에 선수 선정장군
10 고려우군만호(宣授 宣正將軍 高麗右軍萬戶)가 되었다. 이 해에 나라에 어려운 일
11이 있어 조야(朝野)가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는데, 공이 네 명의 원로 재상
12과 함께 대도(大都)에 나아가 주청하여 공(功)을 세우니, 이에 다툼이 해결되고 평안해졌다. 11년 정미년(충렬왕 33, 1307)에 광정대부 도첨의참리 상호군 판삼사사(匡靖大夫 都僉議叅里 上護軍 判三司事)가 되었다.
지대(至大)
13 원년 무신년(충선왕 즉위, 1308)에 선수 진국상장군 고려병마도원수(宣授 鎭國上將軍 高麗兵馬都元帥)가 되고, 2년(충선왕 복위1, 1309)에 벽상삼한 대광 첨의중찬 영사복시사 상호군(壁上 三韓大匡 僉議中贊 領司僕寺事 上護軍)이 되었다. 3년(충선왕 2, 1310)에 도첨의찬성사 상호군 판민부사(都僉議贊成事 上護軍 判民部事)가 되고, 4년(충선왕 3, 1311)에 여절보안공신 삼중대광 밀직사 영회의도감사 상호군 화평군(勵節保安功臣 三重大匡 密直使 領會議都監事 上護軍 化平君)을 더하였다.
황경(皇慶)
14 2년 계축년(충선왕 5, 1313)에 행궁(行宮)을 받들어 대도(大都)에 있었다. 오래 머물게 되어 편하지 아니 하였으므로 함께 간 신료들과 글을 올려 귀국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의 뜻에 어긋나 임조부(臨洮府)
15에 유배되었다. 마침 아들 승석(承石)과 그 누이 영정옹주(永靖翁主)가 황제를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서 정성을 함께 하여 간절히 청하였으므로, 이에 사면되어 드디어 조서를 받들고 돌아오게 하였다. 이에 대도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 일은 아들의 노력 뿐만 아니라 옹주의 공이 없었더라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할 뻔하였으니, 진실로 지극한 효도가 아니겠는가.
연우(延祐) 7년 경신년(충숙왕 7, 1320)에 공이 대도(大都)에 있었는데, 이 해에 충선왕(忠宣王)이 서역(西域)으로 가게 되자 따르던 신료들이 모두 다 도망하고 숨었으나 오직 공만이 의(義)를 떨치고 홀로 나가 한결같이 곁에서 모시면서 먼 지방에까지 가서 전송하였다. 임금이 이에 지극히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공이 전에 한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되니, 그 말은 임금을 사랑한 충성이었소.”
지치(至治)
16 원년 신유년(충숙왕 8, 1321)에 임금이 공이 덕망있는 원로대신[舊德]이라고 하여 벽상삼한 삼중대광 도첨의우정승 판총부 사헌부사 상호군 화평부원군(壁上三韓 三重大匡 都僉議右政承 判摠部 司憲府事 上護軍 化平府院君)을 특별히 제수하였다. 태정(泰定)
17 2년 을축년(충숙왕 12, 1325)에 수성수의충량공신 삼중대광 수첨의정승 판전리사사 상호군 화평부원군(輸誠守義忠亮功臣 三重大匡 守僉議政丞 判典理司事 上護軍 化平府院君)이 되고, 지순(至順) 2년
18 경오년(충혜왕 즉위, 1330)에 수성수의협보충량공신 삼중대광 도첨의중찬 판전리사사 화평부원군(輸誠守義協輔忠亮功臣 三重大匡 都僉議中贊 判典理司事 化平府院君)이 되었다.
신미년(충혜왕 1, 1331)에 공이 70세가 되었으므로 글을 올려 물러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 뜻을 저버리기 어려워 이에 벽상삼한 삼중대광 화평부원군(壁上三韓 三重大匡 化平府院君)을 특별히 제수하고, 중요한 업무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공이 사례하고 집안에 한가롭게 지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7·8년을 보내다가, 후지원(後至元)
19 4년 무인년(충숙왕 복위7, 1338) 10월 23일에 집에서 돌아가셨다. 향년 77세이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하여 담당 관리에게 명기(明器)를 갖추어 봉국산(奉國山) 동쪽 기슭에 장례지내게 하고, 시호를 추증하여 충숙공(忠肅公)이라 하였다.
공은 사람됨이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몹시 엄하여 사람들이 바라보고는 두려워하고 복종하였다. 그러나 손님을 접대하면서 차별하지 않고 즐겁게 대하였다. 집안에 있을 때에는 사소한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살림을 돌보지 않아 집에는 변변한 재물이 없었다. 관직에 있을 때에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소임으로 삼아 밤늦도록 게으르지 않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나 그렇지 않을 때에나 절조를 한결같이 하여 바꾸지 아니하였으니, 이른바 신하가 충성되고 곧다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장남 승석(承石)은 지금 광정대부 삼사우사 상호군 판사재사사(匡靖大夫 三司右使 上護軍 判司宰寺事)인데, 부인은 변한국대부인 왕씨(卞韓國大夫人 王氏)로 4녀 1남을 낳았다. 맏딸은 선수 현정장군 전라도진변만호 정순대부 판통례문사(宣授 顯正將軍 全羅道鎭邊萬戶 正順大夫 判通禮門事) 오첨(吳瞻)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원에 들어가 황후가 되었으며
20, 셋째는 종실인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 : 王珛)의 비(妃)인 복안옹주(福安翁主)가 되었으며, 넷째는 대도유수(大都留守) 안동(安董)에게 시집간 경령택주(敬寧宅主)이다. 차남 승사(承嗣)는 중정대부 응양군대호군 간변내시원사(中正大夫 鷹揚軍大護軍 幹辨內侍院事)이다.
(공은) 다시
21 진강군부인 노씨(鎭江郡夫人 盧氏)와 결혼하여 2남을 낳았으니, 맏아들 승한(承漢)은 도재고판관(都齋庫判官)이고, 둘째 승진(承晉)은 관직이 없다. 또 영가군부인 김씨(永嘉郡夫人 金氏)와 결혼하여 딸 한 명을 낳았다. 임조(臨洮)에 갔을 때에도 두 자식을 보았는데, 아들은 승로(承魯)이며, 딸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이에 앞서 딸 하나가 있었는데, 사재주부(司宰注簿) 최한(崔漢)에게 시집갔다.
아, 공의 선친은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한 명재상으로, 황제로부터 만호(萬戶)를 제수받아 명망이 두 나라의 조정에서 무거웠다. 공 또한 만호가 되고, 도원수(都元帥)가 되었으며, 우리 조정에서 세 번이나 정승으로 임명하였다. 대유(帶有)한 훈계(勳階)가 모두 공신과 부원군(府院君)을 칭하였고, 겸하여 장상(將相)이 되었으니, 지위가 신하로서 지극하였다. 가문도 성대하여 아들들도 아울러 경상(卿相)에 올랐고, 딸은 황후(皇后)와 옹주(翁主)와 택주(宅主)가 되었다. 수(壽)를 오래 누려 거의 팔순에 가까웠으니 인간의 세상에서 어찌 아쉬울 것이 있겠는가. 가히 아름답다고 하겠다.
장례일에 앞서 우사(右使 : 金承石)가 나에게 공의 행적의 시말을 자세하게 갖추어 글을 지어주기를 청하니 끝내 사양할 수가 없어서, 드디어 명(銘)을 지어 이른다.
산에서 신령이 내려와 훌륭한 우리 공으로 태어나니
사직을 임무로 삼고 충직하여 몸을 돌보지 않았도다.
지위는 높은 총재(冢宰)가 되고, 위엄은 원수[元戎]와 같이 두터웠으며
정성을 다해 나라를 도우니 그 공은 태산(泰山)과 같도다.
일흔하고도 일곱 해 동안 원로의 덕망은 더욱 높아지니
우리 나라의 분양(汾陽)
22으로 사람들이 우레와 같이 우러러보도다.
아들은 상부(相府)에 오르고 딸은 황궁(皇宮)의 배필이 되었으니
문벌이 번성하여 해동(海東)에 빛나도다.
신선이 되어 푸른 하늘 아래 노닐다가 멀고 아득한 곳으로 가니
조야가 탄식하고 삼한(三韓)이 텅 비었도다.
백관이 모여 장례를 치르면서 마지막 보내는 예절이 극진하니
묘소가 있는 언덕은 땅이 기름지고 기이한 봉우리는 빽빽하도다.
무덤에 편안히 모셨으니 자손은 무궁할 것이며
글을 새겨 후세에 보이고자 무덤 가운데 간직하였으니
천 년이 지나도 그 아름다움은 더욱 커지리로다.
후지원(後至元) 5년(충숙왕 복위8, 1339) 정월 광정대부 첨의평리 예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匡靖大夫 僉議評理 藝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上護軍)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윤선좌(尹宣佐)가 짓고, 통직랑 기거주 지제교(通直郞 起居注 知製敎) 이훤(李暄)이 쓰다.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