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皇元] 고려국(高麗國) 여흥 민문인공(驪興 閔文仁公)의 처 동한국대부인 신씨(東韓國大夫人 申氏) 묘지명 및 서문
정순대부 전 성균관대사성 보문각제학 지제교(正順大夫 前 成均館大司成 寶文閣提學 知制敎) 백문거(白文擧) 지음
원(有元) 후지원(後至元)
1 3년 정축년(충숙왕 복위6, 1337) <결락> 병진에 대부인(大夫人)이 돌아가시니, 민문인공(閔文仁公)의 부인이자 지금의 재상인 상정(祥正)의 어머니이다. 내가 문인공의 문생(門生)으로 의(義)가 깊어서 매우 슬퍼하였는데, 재상인 민군(閔君)이 나를 보고 소리를 내어 울면서 또한 “그대가 일찍이 선친의 문하에 있어서 우리 가문을 이미 상세하게 알고 있으니, 청컨대 묘지명을 지어주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비록 글재주가 없지만, 두터운 의리에 어긋날까 두려워 잠시 그 대략을 적고자 한다.
대부인의 성은 신씨(申氏)로 천안부(天安府)
2 사람이다. 아버지 사전(思佺)은 광정대부 첨의시랑찬성사 상장군 판전리사사(匡正大夫 僉議侍郞贊成事 上將軍 判典理司事)이고 시호는 순간(純簡)이다. 할아버지 선주(宣冑)는 정의대부 추밀원우승선 천우위상장군 판예빈시사(正議大夫 樞密院右承宣 千牛衛上將軍 判禮賓寺事)이고, 증조 주석(周錫)은 금자광록대부 수태보 참지정사 상장군(金紫光祿大夫 守太保 叅知政事 上將軍)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어머니 여씨(呂氏)는 곡성군대부인(谷城郡大夫人)에 봉해졌는데, 작고한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 여취(呂就)공의 딸이다.
부인은 나이 14세가 되자 순간공(純簡公)이 사위를 택하여 민씨(閔氏) 집안에 시집보냈다.
부인은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상정(祥正)은 중대광 첨의찬성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판판도사사 상호군(重大匡 僉議贊成事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判版圖司事 上護軍)으로,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언충(李彦沖)의 장녀에게 장가들어 아들 일곱 명을 낳았다.
3 감(瑊)은 군부총랑 예문응교 지제교(軍簿摠郞 藝文應敎 知製敎)이고, 후(珝)는 사복부정(司僕副正)이며, 숙(琡)은 대전보마배 행수낭장(大殿寶馬陪 行首郎將)이며, 의존(義存)은 출가하여 선사(禪師)가 되었으며, 선(璿)은 감찰규정(監察糾正)이고, 수(琇)와 현(玹)은 모두 별장(別將)이다. 감(瑊), 후(珝), 숙(琡), 선(璿), 순(珣)은 또한 모두 아들이 있다. 막내아들 상백(祥伯)은 중정대부 사복정 지철원부사(中正大夫 司僕正 知鐵原府事)로 민부전서(民部典書) 박홍수(朴弘秀)의 둘째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다. 석룡(釋龍)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근(瑾)은 권무(權務)이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장녀는 선수 무덕장군 전 관군만호 중대광 금성군(宣授 武德將軍 前 管軍萬戶 重大匡 錦城君) 나익희(羅益禧)에게 시집가서 1남 1녀를 낳았는데, 영걸(英傑)은 관직을 이어 만호(萬戶)가 되었고, 딸은 상호군(上護軍) 최문도(崔文度)의 처이다. 차녀는 중대광 전 판삼사사 진현관대제학(重大匡 前 判三司事 進賢館大提學) 김원상(金元祥)에게 시집가서 1남 1녀를 낳으니, (딸은) 창원부원대군(昌原府院大君) 왕우(王瑀)의 부인이다. 3녀는 판도정랑(版圖正郞) 박윤류(朴允鏐)에게 시집갔다.
아, 창성하였도다. 선행을 쌓아 복의 유래가 멀고 또한 크니, 진실로 그 자손이 이와 같이 많은 것은 마땅할 것이다. 부인의 어질고 중후함은 천성에 바탕을 둔 것이니 매우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부드럽고 온순하였다. 시부모를 섬기면서 공경하면서도 즐거워하였고, 자손을 기르는데 사랑하면서도 미쁘게 하였다. 부도(婦道)가 이미 갖추어져있으니 집안일이 잘 다스려졌다.
문인공(文仁公)은 이름이 지(漬)이고, 자는 용연(龍涎)으로, 오로지 문장(文章)으로 자부하며 나라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대위왕(大尉王 : 忠宣王)이 세자로 원에 들어갔을 때 공은 사부(師傅)로 수행하였는데, 세조(世祖) 황제가 불러보고 크게 기뻐하여 조열대부 한림직학사(朝列大夫 翰林直學士)를 제수하였다. 공은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근무하였으되 집에 들어와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편히 지내고, 재산을 모으는 일로 그 마음에 누를 끼치지 않았던 것도 실로 그 내조에 힘입은 것이다. 태정(泰定)
4 3년 병인년(충숙왕 13, 1326)에 공이 추성수정보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판도첨의사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여흥부원군(推誠守正保理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 判都僉議使事 右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上護軍 驪興府院君)으로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79세였다.
부인은 지원(至元 : 後至元) 2년 병자년(충숙왕 복위5, 1336)에 동한국대부인(東韓國大夫人)으로 봉해졌다. 올해 85세가 되었는데, 병이 들어 돌아가시자 집의 정침(正寢)에 빈소를 마련하였다. 9월 병오일에 국례(國禮)로서 송림현
5 대덕산(松林縣 大德山) 아래 문인공의 무덤 옆에 장례지냈다.
대개 그 처음에 잘 시작하였다고 하여 반드시 그와 같이 마치는 것은 아니다. 살아서는 영예로운 것보다 큰 것이 없고, 죽음에는 슬픔보다 큰 것이 없다. 영예로왔으니 처음이 좋았고, 슬프지만 그 끝을 온전하게 한 사람은 생각하건대 부인이 아닌가 한다. 마땅히 계승하여 명(銘)으로 삼아 단단한 돌에 새겨둘 것이다.
명(銘)하여 이른다.
오래 된 귀한 집안[華宗]에서 태어나 배필을 구하였으니
덕망 높은 집안으로 시집가서 화목하고 공손하였네.
지어미의 일을 지키고 집안을 다스려 일구었으니
61년 동안 즐겁게 해로(偕老)하였네.
자손이 불붙듯 창성하여
크게는 후상(侯相)이 되고 작게는 경사(卿士)가 되었네.
신의로서 가르쳐 또한 영원토록 지키게 하니
공경하며 살아계신 분을 봉양하였고, 예로써 돌아가신 분을 제사드렸네.
저 언덕을 살펴보니 무덤 자리로 기(氣)가 성하여
덕망 있는 사람이 머무를 곳이니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