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고려국 추성수정보리공신 삼중대광 판첨의부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여흥부원군(有元 高麗國 推誠守正保理功臣 三重大匡 判僉議府事 右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上護軍 驪興府院君)이고 추증된 시호 문인공(文仁公)인 민공(閔公) 묘지명 및 서문
추성양절공신 대광 삼사사 예문관 상호군(推誠亮節功臣 大匡 三司使 藝文館 上護軍) 이제현(李齊賢) 지음
나라가 천자의 신하가 되는 데에는 예(禮)로써 하고, 빈객을 사귀는 데에는 문(文)으로써 하니, 반드시 나이든 학자를 택하여 사명(詞命)을 가다듬는다. 고종(高宗) 때에는 이문순공(李文順公 : 李奎報)과 같은 사람이 있었고, 원종(元宗) 때에는 김문정공(金文貞公 : 金坵)과 같은 사람이 있었다. 충렬왕(忠烈王)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곧 돌아가신 재상인 여흥부원군 민공(驪興府院君 閔公)이 실로 그 임무를 담당하였다.
공의 이름은 지(漬)이고, 자는 용연(龍延)
1이며, 황려군(黃驪郡)
2 사람이다. 아버지 휘(輝)는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판이부 어사대사 태자태사(金紫光祿大夫 門下侍中 判吏部 御史臺事 太子太師)이다. 조부 명신(命莘)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이고, 증조 식(湜)은 태중대부 병부상서 보문각학사 지제고(太中大夫 兵部尙書 寶文閣學士 知制誥)이다. 고조 영모(令謨)는 금자광록대부 개부의동삼사 특진 수태자태사 상주국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집현전태학사 감수국사 판이부사(金紫光祿大夫 開府儀同三司 特進 守太子太師 上柱國 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 集賢殿太學士 監修國史 判吏部事)로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다. 어머니는 하원군대부인 이씨(河源郡大夫人 李氏)로 조의대부 사공경 우간의대부 보문각학사 지제고(朝議大夫 司空卿 右諫議大夫 寶文閣學士 知制誥) 세화(世華)의 딸이다.
공은 어려서 총명하였으며 8세 때 능히 글을 지을 줄 알았다. 글을 읽다가 빠진 글자나 잘못된 글자가 있으면 곧 보태거나 덜어내고는 하였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모두 선본(善本)을 가지고 살펴보면 과연 그와 같았으니, 모두들 놀래고 찬탄하면서 오래 묵은 습관과 같이 여겼다. 1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3 19세에 과거[春場]의 을과(乙科)에 1등으로 뽑혔다.
4 남경
5장서기(南京掌書記)가 되어 나갔는데, 낙헌 이시중(樂軒 李侍中 : 李藏用)이 유수(留守)로 있으면서 신진(新進)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통문원녹사(通文院錄事)에 제수되고 임금의 행차를 수행하여 원에 들어갔으며, 위위주부 겸 직한림(衛尉主簿 兼 直翰林)으로 옮겨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상소하니 원종이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경인년(충렬왕 16, 1290)에 천자가 조서를 내려 왕세자가 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 때에 도적을 피해 도읍을 옮기니 도로가 막혀서 어지러웠다. 공이 국자(國子) <결락> 로서 세자를 가르쳤는데, 밤낮으로 말을 달려 (원의) 조정에 이르니, 조정의 신하들이 바야흐로 군사를 쓸 일을 의논하였다. 교지(交趾)
6에서 보내온 황제의 글[旨]이 있어 고려 세자의 스승인 학자를 불러 물으니, 공이 대답하여 “수고롭게 군사를 내어 토벌하는 것은 사신을 파견하여 항복을 받아내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니, 그 말이 황제의 뜻과 맞으므로 특별히 조열대부 한림직학사(朝列大夫 翰林直學士)에 임명되었다.
임진년(충렬왕 18, 1292)에 원 조정이 왜(倭)를 정벌할 전함을 수리하도록 명하자 서울과 지방이 시끄러워졌다. 충렬왕이 공주와 함께 원에 들어가니
7 공이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수행하였는데 추밀(樞密) 홍군상(洪君祥)을 만나서 “왜인들은 <결락> 바다에 있고 <결락> 백성들은 완고하니, 비록 얻더라도 중국을 살지게 하기에는 족하지 못합니다. 한 번 이(利)를 잃으면 후회함이 어찌 미치겠습니까. <결락> 한(漢)은 주애(珠崖)
8를 얻었으며 <결락>”라고 하여 군상을 격앙시키니, 군상이 말하였다. “국왕의 말을 들었으니, 내가 (원에) 들어가면 천자에게 아뢰겠습니다.” 임금이 대신들에게 물으니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였으나 공이 은밀히 임금에게 보고하였고, 군상이 돌아가 황제에게 아뢰니 드디어 그 논의가 그치게 되었다. 얼마가 지나 이듬해가 되자 마침 유고가 생겼으므로
9 드디어 파하여졌다. <결락>
임금이 돌아오자 동지공거(同知貢擧)에 임명되어 선발한 사람들이 모두 명사로 알려졌으며, 뒷날 장상(將相)이나 고위 관리가 된 사람이 많았다.
10 이부(吏部)에 있을 때에는 청렴하고 검소함을 스스로 지켰으며, 소나무 같은 수염과 학과 같은 기골로 멀리서 바라보면 참으로 산과 못에 사는 신선 같았다. 일이 있으면 원의 조정에 알리는 것을 담당하였는데, 말로 하기 어려운 것은 모두 공이 문장으로 적어서 평탄하면서도 쉽게 밝혔다. 풍속을 급하게 고치는 일 같은 것도 우리 나라의 오래된 습관을 들면서 청하니, 원의 조정에서 모두 그 의견을 따른 것도 한두 번으로 헤아릴 일이 아니다.
공은 일찍이 예전의 자취는 임금이 마땅히 알아야 하지만 방대하여 두루 살피기 어렵다고 하여 하나의 그림으로 만들어 바쳤는데, 무릇 왕도(王道)와 패도(覇道),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 세대의 길고 짧음, 도읍을 정하고 연호를 세운 것, 합침과 분열을 기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누런 색과 붉은 색이 검은 색과 더불어 혹은 늘어서고 혹은 무리를 이루니, 마치 그물에 벼리가 있는 것과 같고 구슬이 꿰미에 꿰어진 것과 같아서 온 세상이 <결락> 탄복하였다. <결락> 신성대왕(神聖大王 : 太祖)
11의 세계(世系)가 (唐) 선종(宣宗)에서 나왔으니 여러 대에 걸친 잘못을 바로 잡았다.
12 태위왕(太尉王 : 忠宣王)이 그것을 보물처럼 중요하게 여겨서 상을 넉넉하고 넘치게 내려주었다.
태위왕이 서쪽으로 (유배) 갔을 때에 반역배[逆豎]인 백안두사(伯顔豆思)가 독을 품고 (황제의) 위엄을 빌려서 화와 복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결락> 원의 서울에 가서 글[表]를 올려 (태위왕을) 불러 들여 귀국시켜 줄 것을 청하니, 비록 일은 중도에 그쳤지만 듣는 사람들은 의롭게 여겼다. 태정(泰定)
13 을축년(충숙왕 12, 1325)에 추성수정보리공신 삼중대광 첨의정승 우문관대제학 여흥군(推誠守正保理功臣 三重大匡 僉議政丞 右文館大提學 驪興君)에 제수되었고, 3년(1326)에 승진하여 판첨의부사 여흥부원군(判僉議府事 驪興府院君)에 봉해졌는데, 대개 그 충성에 따른 것이다.
12월 임신일에 병으로 집에서 돌아가시니, 나이가 79세이다. 부음을 듣고 왕이 매우 슬퍼하여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장례일을 돕게 하고, 시호를 문인공(文仁公)이라 하였다.
공의 어머니가 꿈에 별과 용이 감응하여 잉태한 지 11개월 만에 공을 낳았다. 공이 당후관(堂后官)이 되어 명령을 내리는 문서를 가지고 밤에 밀직사(密直使) 김광원(金光遠)의 집으로 갔을 때, 김광원이 막 잠자리에 들었는데 한 늙은이가 그의 베개를 밀면서 말하였다. “문 앞에 큰 손님이 와 있는데 어찌 잠을 잘 수 있단 말이오.” 이에 놀라 깨어 의관을 바로 하고 나가 보니, 바로 공이었다. 공은 어려서 병을 많이 앓아 몸에 옷을 걸치지 못할 정도 약하였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서로 공의 학문이 깊어질 것을 기대하기는 하였으나, 능히 장수할지는 알지 못하였다. 마침내 지위가 인신(人臣)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르고 나이도 팔순에 이르렀으니, 작위도 누렸고 장수하였다고 할 것이다. 명성이 일찍부터 알려졌지만 절조를 지키면서도 모가 나지 않았고 기(氣)가 부족하지 하였으니, 천도(天道)로서 복과 선을 받은 것은 알려지지 않은 바탕[陰相]이 그렇게 한 바이다.
광정대부 첨의찬성사(匡靖大夫 僉議贊成事) 신사전(申思佺) 족보에 수록된 원문에는 ‘신전(申佺)’으로 되어 있으나, ‘신사전(申思佺)’의 잘못이 아닌가 한다.
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은 상정(祥正)으로 중정대부 밀직지신사 사헌집의 진현관제학 지제고 지선부사(中正大夫 密直知申事 司憲執義 進賢館提學 知制誥 知選部事)이고, 막내아들은 상백(祥伯)으로 통직랑 언부직랑(通直郞 讞部直郞)이다. 장녀는 관군만호 광정대부 첨의평리 상호군(管軍萬戶 匡正大夫 僉議評理 上護軍) 나익희(羅益禧)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중대광 삼사사 예문관대제학 상호군(重大匡 三司使 藝文館大提學 上護軍) 김원상(金元祥)에게 시집갔으며, 3녀는 내시(內侍)로 들어간 보승별장(保勝別將) 박윤류(朴允鏐)에게 시집갔다.
명(銘)하여 이른다.
여강(驪江) 물은 맑게 일렁이는데
<결락> 포부를 품도다.
곤륜산(崑崙山)의 한 조각 옥이고 계수나무 한 가지이니
높은 벼슬에 오르고 뛰어난 문장가가 되어 빛나고 밝은 노래를 짓도다.
구름 덮인 궁궐 문을 열고 검은 주머니[皂囊]를 차니
옥같은 목소리로 의젓하게 봉황새는 조양(朝陽)에서 울었네.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를 토론하며 세자[元良]를 보좌하고
조정 가운데로 높이 날며 문한(文翰)을 휘둘렀네.
황제의 조정에서 바다 건너 오랑캐[海夷, 倭]를 정벌할 것을 의논하니
한 마디 말[片言]로 두루 백성의 고통을 치료해 주었고,
충성으로 대항하며 임금을 구하는 일은 늙은 나이에도 사양하지 않고
기세로 흉악한 무리들을 꺾으니 여우와 너구리 같은 소인배들이었네.
용(龍)에 올라 타 천제가 사는 백운향(白雲鄕)으로 돌아가니
사림(士林)이 천 년 동안 그 명성과 위광을 부러워하리로다.
푸른 빛 옥[翠琰]을 갈고 다듬어 무덤에 명(銘)을 새기며
소나무와 잣나무를 자르지 않으니 팥배나무[甘棠]
14와 같으리.
태정(泰定) 3년 병인년(충숙왕 13, 1326) 12월 일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