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고려국 고중대광 첨의찬성사 상호군 판총부사 치사 시충순 민공묘지(有元高麗國 故重大匡 僉議贊成事 上護軍 判摠部事 致仕 諡忠順 閔公墓誌)
▨국이 당나라 말에 일어나 처음 동방을 높이고 인과 덕을 쌓아 대대로 더욱 빛을 발하여 지금까지 무릇 4백 여년이 되었다. 사대부들은 모두 대대로 녹을 받아 편안하였고, 예의로서 서로를 숭상하였다. 여흥(驪興 : 지금의 경기도 여주) 민씨(閔氏)는 일찍이 그 명망이 높아 명신(名臣)의 집안으로 불리었다.
영모(令謨)에 이르러 (결락) 명왕(明王 : 명종)때 대사평장(大師平章)이 되었고,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공(公)의 고대부(高大父 : 고조)가 된다. 공의 증대부(曾大父 : 증조)인 공규(公珪)는 대보 평장(大保 平章)으로 돌아가셨으며, 시호는 정의(定懿)이다. 대부(大父 : 조부)인 인균(仁鈞)은 한림학사(翰林學士)로 돌아가셨다. 부(父)인 황(滉)이며, 호부시랑(戶部侍郞)으로 돌아가셨다. 호부공(戶部公 : 공의 아버지)은 창원 최씨(昌原 崔氏)를 부인으로 맞았으며, 창원군부인(昌原郡夫人)으로 봉해졌다. 평장(平章)으로 돌아가신 시호가 문경(文景)인 린(璘)의 딸이 공의 어머니이다.
공은 충헌왕(忠憲王) 을사년(고종 32, 1245)에 태어났다. 어려서 민첩하고 지혜로웠다. 외조부가 (공을) 사랑하여 이면하지 않고, 항상 말하기를 “훌륭한 그릇이다.”라고 하였다. 11세때 학문에 나아가 대의(大意)를 통달하였고 문음(門蔭 : 음서)으로 뽑혀 왕자시양부 학우(王子始陽部學友)가 되었다. 19세 때 청도군(淸道郡) 감무(監務)에 임명되었는데, 충경왕(忠敬王) 계해년(1263, 원종 4, 1263)인 황원중통(皇元中統) 4년이다. 청도군은 대성(大姓)이 많으나 감무의 관품이 낮아, 서로 대등한 예를 갖출 정도로 다스리기는 어려운 곳으로 소문이 나 있다. 공은 연소하여 정사를 바꾸지 못할 것이라고 사람들은 가볍게 보았다. 공이 부임하자 청탁을 받지 않고 일체 법으로 재단하였다. 감히 저항하는 일이 없고 능히 잘 다스린다는 소문이 났다. (감무의 일을) 마친 후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에 임명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시(內侍)로 적을 옮겼다가 도염서승(都染署丞)에 임명되었다가 무반으로 직을 바꾸어 흥위위 별장(興威衛 別將)이 되어 견룡행수(牽龍行守)에 임명되었다.
충렬왕이 원나라 황제의 딸인 제국공주(齊國公主)와 혼인하고 특별히 응선부(膺善府)를 설립하였다. 을해년(충렬왕 1, 1275) 응선부 견룡행수가 되었고, 좌우위 낭장(左右衛 郎將)에 임명되었다. 우지유(右指諭)로 옮기었다 곧 흥위위 장군(興威衛 將軍)이 되었다. 계미년(충렬왕 9, 1283) 조현대부 시소부윤(朝顯大夫 試少府尹)으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고, 충주목 부사(副使)로 지방에 갔다. 무자년(충렬왕 14, 1288) 전법총랑 지통례문사(典法摠郞 知通禮門事)로 동계안집사(東界按集使)가 되었다가 전리총랑(典理摠郞)으로 바꿨다. 기축년(충렬왕 15, 1289) 충청도 안렴사(按廉使)가 되었다가 각각 대부시(大府侍)와 대복시(大僕侍)의 윤(尹)으로 옮겼다. 임진년(충렬왕 18, 1292) 동경유수부사(副使)에 부임했다가, 예빈윤(禮賓尹)으로 소환되어, 삼사우윤 겸 세자궁문령(三司右尹 兼 世子宮門令)으로 고쳤다가 여러 차례 옮겨 판통례문 선군별감사(判通禮門 選軍別監使)가 되었다. 관계(官階)를 다섯 번 바꾸어 정헌대부(正獻大夫)가 되고, 밀직지신사 지전리감찰사(密直知申事 知典理監察司事)에 임명되었다. 무술년(충렬왕 24, 1298) 봉익대부 밀직부사(奉翊大夫 密直副使)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구차하게 사람들에게 영합하지 않아 면직되었다. 정미년(충렬왕 33, 1307) 다시 밀직부(密直副)에 임명되었다가 감찰대부(監察大夫)로 바뀌었고, 광정대부(匡靖大夫)로 승진되면서 찬성사(贊成事)에 임명되었다. 태위왕(太尉王 : 충선왕) 원년(1309)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은퇴하였다. 기미년(충숙왕 6, 1319) 중대광(重大匡)을 제수받고 부흥군(復興君)에 봉해졌다. 지치(至治) 신유년(충숙왕 8, 1321) 왕씨(王氏)가 아니면 군자(君者)를 생략하는 예에 따라 부흥군의 관작이 삭탈되고, 다시 첨의찬성사 상호군 판총부사(僉議贊成事 上護軍 判摠部事)로 은퇴하였다. 태정 개원 갑자(泰定 改元 甲子 : 충숙왕 11, 1324) 5월 5일 을축일 집에서 별세하였다. 향년 80세였다.
공의 이름은 종유(宗儒)이다. 성품이 장중(莊重)하고 풍채와 태도가 아름다웠다. 예문(禮文)에 밝고 관리로서의 재간(吏幹)도 뛰어났다. 안으로는 형조와 헌부(憲府)를, 밖으로는 안렴(按部)과 수령(牧民)이 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모두 공의 능력을 칭찬하였다. 빈찬(賓贊)을 주관하고 후설(喉舌)을 관장할 때 겸손하게 응대하여 많이 임금의 뜻에 부응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스스로 공에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 대개 공은 훌륭한 집안의 자제로서, 최문경공(崔文景公 : 崔璘) 아래서 성장하였다. 장성해서는 혼인으로 인해 유문도(兪文度 : 兪千遇)와 혼인하여서 배운 바가 많았다. 이 까닭에 일을 처리하는데 여유가 있어 마치 스스로 완성된 사람 같았다. 전후하여 이부(二府 : 첨의부와 밀직사)에 재직했으나, 비록 오래되지 않아 별세하였다. 지위가 군(君)의 반열에 있었고 명성을 온전하게 하였고 장수를 누려, 그 최후를 아름답게 하였다. 그에게 정사를 맡겨 전적으로 맡기고 오랫동안 있게 하였다면 그가 베풀은 것이 마땅히 어떠했겠는가?
평소에 사람과 사귀는데 망녕되지 않았다. 종족(宗族)에 대해서도 돈독히 하였으며, 형제자매 모두에 대해서도 (그들의 처지를) 염려해주었다. 처음 벼슬할 때부터 재상에 오르기까지 퇴근하면 공은 곧 집으로 돌아갔으며, 사람에게 청탁하거나 아첨하지 않았다. 집안을 다스릴 때에는 정결함에 힘써 늘 집안을 청소하여 하나의 먼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말[馬]을 좋아하여 남에게 좋은 말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사가지고 오게 하여 집 아래 매어두고 조석으로 아끼고 감상하면서 권태로움을 잊었다. 만년에는 더욱 음악을 좋아하였고 여러 가지 기예와 꽃나무를 가까이 하였다. 날마다 악기로써 소일하며 스스로 그것을 좋아하여 늙음이 찾아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이가 점점 들어갔어도 오르내리는 일에 오히려 건강하고 굳세어져서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지치(至治 : 1321~1323)중 왕이 원나라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자, 일을 꾸미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무리를 지어 사람을 핍박하고 백지 문서(白狀)에 서명하게 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였다.
1 공경(公卿)과 사서(士庶)들은 세력을 두려워하여 영합하거나 뒷일을 두려워하여 간혹 위태로움을 피할 뿐, 감히 배척하여 옳지 않다고 말하는 자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 종이를 가지고 (공의) 집에 와서 공의 서명을 요구하였다. 공은 “신하는 임금을 위해 숨는 것은 곧음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같이 속이는 일이 두렵지 않느냐? 내 이미 늙었으니 나를 팔지 않는다.”고 꾸짖으면서, 물리치고 서명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면서 물러갔다. 늙어서 더욱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나라의 풍속에 단오일에는 선조에게 제사 지내는데 공이 이날 일찍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제사 올리기를 평소와 같이 하였다. 일을 끝내고 피곤한 듯하여 잠시 잠을 잤다. 가인(家人)들이 오랫동안 잠을 깨지 않음을 이상하게 여겨 보니 이미 별세하였다.
장사군부인(長沙郡夫人) 유씨(兪氏)를 배필로 삼았는데, 대위평장(大尉平章)으로 작고한 시호가 문도(文度)인 천우(千遇)의 딸이다. 처음 문도공이 도병마사가 되었을 때 공은 녹사였다. 공의 그릇됨을 보고 마침내 부인을 시집보낸 것이다. 자녀로 2남 1녀를 두었다. 1남 적(頔)은 지원(至元) 을유년(충렬왕 11, 1285) 급제하여 지금 통헌대부(通憲大夫)로 전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였다. 다음은 서(舒)로 검교신호위 낭장(檢校神虎衛 郎將)이다. 딸은 승봉랑(承奉郞)으로 전에 전교서승(前典校署丞)을 지낸 국담(鞠覃)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5인이다. 남자 5인인데, (차남) 서(舒)의 한 아들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통헌공(通憲公 : 頔) 소생이다. 평(平)은 전흥위위 별장(前興威衛別將)으로, 연우(延祐) 을유년(충숙왕 2, 1315) 과거에 급제하였다.
곡출독(曲出篤), 금강(金剛), 망가독(忙哥篤)이다. 서(舒)의 소생은 나이가 어려 이름이 없다.
공이 죽은지 5일에 내가 통헌공(通憲公)에게 조문하였다. 조문이 끝나자 묘지명을 부탁받았다. 나는 부족하여 선친의 덕을 드러내기에 부족하다고 사양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공은 바야흐로 슬퍼하고 애통해하여 공의 집에서 조용히 물러나왔다. 수일 후 공이 아들 평(平)을 시켜 그의 역임한 관력(官歷)의 전말을 기록하여 나에게 와서 다시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나는 나의 선군자(先君子 : 부친)께서 일찍이 통헌공과 교유하였고, 나 또한 평(平)과 가까워 의리상 거절할 수 없었다. 그 까닭에 삼가 절하고 묘지명을 적는다. 이해 6월 6일 경신에 묘소를 어느 산(謀山)의 언덕에 모시었다. 서울에서 몇 리(里) 떨어져 있다. 관청에서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시호를 충순(忠順)이라 하였다.
명(銘)하여 이르기를
관작(官爵)이 제군(諸君)과 같은 반열에 나이가 팔순이라
젊어서 벼슬하고 늙어서 물러나 즐거이 몸을 마치네
행실을 상고하니 남에게 부끄럽지 않으며
점쳐 신조(新兆)를 얻으니 그 언덕 높이네
공의 덕이 백세(百世)토록 감추어지니 경사스러움이 후손에게 흘로
돌에 새겨 무덤에 넣어 오래지 않아 조상의 뜻을 받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