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광 판삼사사 보문각대제학 상호군(重大匡 判三司事 寶文閣大提學 上護軍) 김순(金恂) 묘지명 및 서문
옛 말에 군자라고 함은 덕행(德行)을 말한 것인가, 공업(功業)을 말한 것인가. 나는 다만 덕행일 뿐이고 공업은 아니라고 말하고자 하니, 왜 그러한가. 덕행은 마음에 달려 있고 공업은 때에 달려 있는 것인데, 마음에 달린 것은 사람이 닦을 수 있으나 때에 달린 것은 하늘이 주는 바이니, 능히 사람이 닦을 수 있는 것을 닦으면 군자가 되는 것이다. 대저 덕행은 충과 효로 바탕을 삼는 것인데, 충효로 당시에 이름을 떨친 이는 우리 판삼사 상군(判三司 相君)이다.
공의 이름은 순(恂)이고, 자는 귀후(歸厚)이며, 가계가 신라왕(新羅王) 김부(金傅 : 敬順王)에서 나왔다. ▨▨▨▨▨▨▨▨▨▨▨▨▨▨▨▨▨▨▨ 공은 김부의 10세손으로 안동부(安東府)가 곧 그 고향이다. 증조 민성(敏成)은 좌복야 행장야서승 겸 직사관(左僕射 行掌冶署丞 兼 直史館)에 추봉되었고, 조부 효인(孝印)은 중서령 행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충사관수찬관 지제고(中書令 行正議大夫 兵部尙書 翰林學士 充史館修撰官 知制誥)에 추봉되었으며, 아버지 방경(方慶)은 선수중봉대부 판고려군도원수 추충정난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판도첨의사사 전리사사 상장군 상락군개국공 식읍 1,000호 실봉 300호(宣授中奉大夫 判高麗軍都元帥 推忠靖難定遠功臣 匡靖大夫 三重大匡 判都僉議司事 典理司事 上將軍 上洛郡開國公 食邑一千戶 實封三百戶)로 선충협모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충렬공(宣忠協謀定難靖國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 忠烈公)으로 추증되었다. 어머니 박씨는 중서사인 지제고(中書舍人 知制誥) 익정(益旌)의 딸로 음평군부인(陰平郡夫人)에 봉해졌다.
공은 글씨를 잘 써서 여러 비문(碑文)을 베껴 썼다. 나이 15세쯤[志學]에 문음(門蔭)으로 벼슬하여 장생서승(掌牲署丞)이 되고, 뒤에 별장(別將)으로 바뀌면서 어견룡행수(御牽龍行首)가 되었다. 관직은 비록 동반(東班, 文班)에서 시작하여 서반(西班, 武班)에 이르렀지만 그 뜻은 학문[文學]에 두지 않은 적이 없었다. 대개 부친이 비록 양조(兩朝)의 장상(將相)이라는 극히 높은 지위에 올랐으나 다만 과거[桂籍]에 오르지 못했음을 한스럽게 여겨, 아들이 조업(祖業)을 회복하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1 공은 이로 말미암아 힘써 공부하고 게으르지 않아서 지원(至元)
2 16년 기묘년(충렬왕 5, 1279)의 과거[春場]에 응시하여 단번에 2등[副元]으로 합격하였다.
3 그 해에 처음 섭낭장(攝郞將)에 임명되었다가 뒤에 국학직강(國學直講)으로 바뀌었으니, 이는 공이 아버지가 가진 분(憤)을 푼 것이다.
이로부터 선공(先公)은 막내아들에게 은혜를 더 하여 늘 곁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였고, 상국(上國 : 元)에 하정사(賀正使)로 갈 때에도 따라가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단지 일본(日本)을 정벌하는 배[東征船]에는 따라 오르지 못하게 하였으니 종군하면서 위험한 일에 빠지지 않도록 한 것이었다. 공은 이 때에 임금을 호종하였는데, 명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전함(戰艦)에 오르니 자못 호위하고 구원한 공로가 있었다. 이 일은 공이 다만 충효를 오로지 하면서 분발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은 것이다.
임오년(충렬왕 8, 1282)에 전중시사(殿中侍史)로 옮기고, 이듬해에 상주판관(尙州判官)이 되어 나갔는데, 잘 다스렸으므로 일년이 못 되어 들어와 전법좌랑 ▨지통례문사 고공정랑(典法佐郞 ▨知通禮門事 考功正郞)이 되었다. 병술년(충렬왕 12, 1286 )
4에 남녘 지방으로 사명(使命)을 받들어 내려가면서 선공을 모시고 고향에 있는 조상의 묘에 참배하였다.
5 무자년(충렬왕 14, 1288)에 비서소윤 지통례문사(秘書少尹 知通禮門事)에 임명되고, 그 해에 임금의 명으로 공을 세자부 행리별감(世子府 行李別監)으로 삼아 사부(師傅)의 직책을 맡겼다. 임진년(충렬왕 18, 1292)에 조현대부 전법총랑 지제고(朝顯大夫 典法摠郞 知制誥)로 승진하고, 여러 차례 옮기면서 소부윤 ▨▨▨학 군부총랑 전리총랑 조봉대부 비서윤 삼사우윤(少府尹 ▨▨▨學 軍簿摠郞 典理摠郞 朝奉大夫 秘書尹 三司右尹)을 지냈는데 모두 지제고(知制誥)[三字]를 겸하였다. 원정(元貞)
6 을미년(충렬왕 21, 1295) 겨울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자, 뽑힌 사람들이 모두 당시의 이름난 선비들이었다.
7 크게 잔치를 열자 ▨▨▨▨ 선비와 조야(朝野)에서 훌륭하다고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것은 선공을 지극히 영화롭게 한 효도이다.
그 해에 조의대부(朝議大夫)로 승진하고, 병신년(충렬왕 22, 1296)에 세자사인(世子舍人)을 겸하였다. 대덕(大德)
8 정유년(충렬왕 23, 1297)에는 국학전주(國學典酒)로 옮기고, 다시 봉렬대부 밀직사 우부승지(奉烈大夫 密直使 右副承旨)에 임명되었다가 곧 좌부승지 보문각직학사(左副承旨 寶文閣直學士)로 옮겼다. 이듬해 우승지 지판도사사(右承旨 知版圖司事)에 올랐으며, 옮길 때마다 모두 지제고[三字]를 겸하였다. 그 해 봄에 남녘지방으로 사명(使命)을 받들고 내려갔다. 돌아오게 되자 통의대부 광정부사 승지 성균제주(通議大夫 光政副使 承旨 成均祭酒)로 고쳐 임명되었고, 또 정의대부 집현전학사 좌산기상시(正議大夫 集賢殿學士 左散騎常侍)로 바뀌었다. 그 해 7월에 다시 밀직사 우승지 국학제주 보문각학사 지민조사(密直使 右承旨 國學祭酒 寶文閣學士 知民曹事)가 되었는데 전과 같이 지제고[三字]를 겸하였다. 8월에 봉익대부 삼사좌사 숭문관학사(奉翊大夫 三司左使 崇文館學士)에 오르고, 9월에 다시 정헌대부 밀직사좌승지 판비서시사 충사관수찬관 지제고 지군부사사(正獻大夫 密直司左承旨 判秘書寺事 充史館修撰官 知制誥 知軍簿司事)로 바뀌었으며, 12월에 봉익대부 밀직사부사 문한학사(奉翊大夫 密直司副使 文翰學士)에 임명되었다. 기해년(충렬왕 25, 1299)에 물러날 때가 된 것을 알고 은퇴할 것을 청하였다.
이듬해 8월에 선공이 세상을 떠나니 유언에 따라 고향에 장례지내고, 경술년(충선왕 2, 1310) 겨울 선공의 묘에 제사지냈다. 임자년(충선왕 4, 1312)에 다시 중대광 상락군(重大匡 上洛君)으로 임명되면서 선공의 작위[茅土]를 이어받았다. 기미년(충숙왕 6, 1319)에 또 선공의 묘에 참배하려하자, 임금이 막내아들 영후(永煦)에게 명하여 사명(使命)을 받들고 따라가게 하였으니, 그 행차를 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지치(至治)
9 원년 신유년(충숙왕 8, 1321)에 재상을 임명하면서 어진 이를 뽑도록 하였는데 공이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8월에 보문각대제학 상호군(寶文閣大提學 上護軍)을 더하였다. 그 달 21일에 병이 들어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64세이다.
공은 성품이 정이 두텁고 곧으면서도 부드러우며, 내실(內實)이 있으면서도 강직(剛直)하여 굴하지 않았다.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는 것이 조금도 꾸밈없이 자연스러웠으니, 애석하다. 공의 재주와 덕으로써 만일 더 오래 살았더라면 이익과 혜택이 어찌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았을 것이며, 명성과 지위가 어찌 여기에 그칠 뿐이었겠는가.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 僉議中贊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典理司事 世子師)이며 시호가 문경공(文敬公)으로 추증된 허공(許珙)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영돈(永暾)은 지금 도관직랑 지합주사(都官直郞 知陜州事)이고, 차남 영휘(永暉)는 지금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 保勝別將)이며, 3남 사순(思順)은 머리를 깎고 자은종(慈恩宗)의 대덕(大德)이 되었으며, 4남 영후(永煦)는 사헌지평(司憲持平)이 되었다. 장녀는 내시 중정대부 친어군대호군(內侍 中正大夫 親御軍大護軍) 정지에게 시집갔고, 2녀는 대광 상당군(大匡 上黨君) 백이정(白頤正)에게 시집갔으며, 3녀는 사인(舍人) 별리가불화(別里哥不花)에게 시집갔으니 원의 좌승상(左承相) 아홀반(阿忽反)의 아들이다.
영돈 등이 덕수현
10 마산(德水縣 馬山)에 무덤을 정하고 장례를 치르려고 하면서, 내가 선공의 친구라고 하여 공의 행장을 갖추어서 매우 간절하게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내가 비록 병들었지만 차마 굳게 거절하지 못하고 수락하고 글을 짓는다.
명(銘)하여 이른다.
빛나는 충성과 절의는 우리 나라[東國]의 분양(汾陽)
11이 되고
뜰에 가득한 자손[蘭玉]들은 모두가 빼어나서 아름다움을 다투도다.
백미(白眉)는 바로 막내이니 당대에 가장 뛰어나다고 일컬어졌는데
부친이 아쉬워한 것은 과거[桂堂]에 오르지 못한 것이었도다.
공은 그 뜻을 이어 문장에 마음을 단단히 두고
집안에 전해오는 조상의 법(法)이 들어 있는 시(詩)의 비단주머니[錦囊]를 차서
젊은 나이[妙齡]에 을제(乙第)에 합격하니 이름은 사방에 떨치고
대각(臺閣)을 두루 거치면서 고명(誥命)을 펼치니 향기를 품었도다.
한 차례 과거를 주관하자 복사꽃과 오얏꽃 같이 뛰어난 인재가 줄을 이으니
부모님도 즐거워 눈물을 흘리고, 장수를 비는 술잔은 넘쳐 흐르도다.
생전에 재상에 임명되니 늙은 부모에게 영광이고
힘써 입신양명하여 효도를 다하고, 고향에 부친을 장례지내며 슬픔이 지극하도다.
아들된 도리를 다하였으니 마땅히 온갖 상서가 내릴 것이며
노년에 한가로이 물러났으니 하늘의 뜻을 그대로 따르도다.
끝내 작위[茅土]를 이어 받으니 가문에 다시 영광이 되었으나
시정(時政)에 참여하지 않은 채 마음을 비우며 9년을 보내었도다.
문득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르니 백성은 안정되고 나라는 평안한데
어찌 나이를 다 채우지 않고 갑자기 선계(仙界)로 떠날 채비를 재촉하는가.
공은 아쉬움이 없을지라도 나라를 위해서는 애통하기만하여
명(銘)을 새겨 빛나는 이름을 전하고자 하니 무궁하기를 바라노라.
원[大元] 지치(至治) 원년 신유년(충숙왕 8, 1321) 10월 14일
선수 조열대부 한림직학사 삼중대광 검교첨의정승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여흥군(宣授 朝烈大夫 翰林直學士 三重大匡 檢校僉議政丞 右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驪興君) 민지(閔漬)가 짓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