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신공(寬愼公) 묘지명
공의 성은 채(蔡)이고, 이름은 모(謨)이며, 자는 응지(膺之)로, 계보가 평강군(平康郡)
1에서 나왔다. 아버지 화(華)는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평장사 상장군 판이부사(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平章事 上將軍 判吏部事)이다. 어머니 최씨(崔氏)는 전주(全州) 사람으로 문화군대부인(文化郡大夫人)이고, 은청광록대부 추밀원사 호부상서 상장군(銀靑光祿大夫 樞密院使 戶部尙書 上將軍) 연(璉)의 딸이다.
공은 덕이 크고 재능이 뛰어났으며, 또 문지(門地 : 門蔭)로 일찍 벼슬에 올라 처음 만보전직(萬寶殿直)에 임명되었다. 곧 금규(金閨 : 內侍)에 적을 두고 용산도 왕지별감(龍山道 王旨別監)
2이 되어 나갔는데 임금의 뜻을 잘 받들어 좌우위(左右衛)에 발탁되었다. 공이 이 때 도(道)의 관리 14명을 천거하였는데, 모두 경상(卿相)에 올랐다. 중찬(中贊) 정가신(鄭可臣)이 그 중의 한 명으로,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이 이와 같았다.
지원(至元)
3 갑자년(원종 5, 1264)에 내비원(內備院)의 일을 도맡았는데, 이 때 원종(元宗)이 바야흐로 몽고(蒙古)에 가게 되어 그 호종(扈從)에 참여하고 돌아오자, 그 공으로 합문지후(閤門祗侯)에 뛰어 올랐다. 영암(靈巖)
4의 수령으로 나갔다가 임기가 차자 권지신사(權知申事)로 불려오고, 이어 상사봉어(尙舍奉御)로 옮겼다. 전라도 안찰사(全羅道 按察使)가 되어 서해(西海)를 다스리면서 명성을 크게 떨치니, 양부(兩府 : 中書門下省과 中樞院)에서 보고하여 공을 대우하였는데 포상이 자손에게까지 미쳤다. 얼마 되지 않아 전중시어(殿中侍御)로 옮겼다.
이듬해 경오년(원종 11, 1270 )에 수도를 옮길 때 적이 사납게 일어나니,
5 공은 홀로 말을 타고 궁궐문으로 달려나가 알렸으며, 명을 받고 다시 화산(花山)을 지키면서 내부(內府)의 금과 비단을 옮기는 데 힘쓴 것이 적지 않았다. 또 전라도 안찰사가 되었을 때 역적이 남으로 내려오자 공이 제압하고 토벌한 공훈이 있었으므로, 조정에서 포상을 의논하여 시어사(侍御史)로 뛰어 승진시키고 이어 금자(金紫)를 내렸다.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호부(戶部)와 형부(刑部) 낭중(郞中)이 되었고, 예빈소경(禮賓少卿)으로 진주목(晉州牧)의 수령이 되어 나갔는데, 그 직에 있으면서 죄가 아닌데도 억울한 일을 당하였다.
지금 임금<忠烈王>이 즉위한 지 6년인 기묘년(충렬왕 5, 1279)에 다시 전법시랑(典法侍郞)으로 기용되었다. 당시 전법사(典法司)에 노비를 다투는 소송 문서가 여러 해 동안 해결되지 못한 것이 매우 많았으나, 넉 달 동안 공이 해결한 것이 모두 150건[道]이나 되었으므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30년 동안이나 귀감이 되고 있다. 태부소윤(太府小尹)으로 뛰어 오르고, 신사년(충렬왕 7, 1281)에 경상도 권농사(慶尙道 勸農使)가 되어 나갔다.
그 해에 왜(倭)를 정벌하는 일로 임금이 남으로 거둥하였다. 공이 몸과 마음을 다해 힘쓰니 더욱 임금의 신임을 얻어 조청대부 태복윤(朝請大夫 太僕尹)으로 승진하고 특별히 용후(龍喉 : 承旨)에 임명되었다. 이로부터 승진하여 품계는 중렬·영렬·정윤·봉익대부(中列·榮列·正潤·奉翊大夫)를 역임하였으며, 관직은 감문위(監門衛)와 사순위(司巡衛)의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지군부 지전리 삼사사 전법·전리판서 감찰대부(知軍簿 知典理 三司使 典法·典理判書 監察大夫)를 역임하였는데, 모두 상장군을 겸직하였다. 밀직(密直)에서는 좌·우부승지 좌·우승지 지원사 부사 지사사(左·右副承旨 左·右承旨 知院事 副使 知司事)가 되고, 궁관(宮官)으로는 세자사인 궁령 소첨사 첨사 세자원빈
6(世子舍人 宮令 少詹事 詹事 世子元賓)이 되었으며, 사상(使相)으로는 전라도 도지휘사(全羅道 都指揮使)가 되었다. 이러한 관직들이 모두 공이 거친 것이다.
경인년(충렬왕 16, 1290) 봄에 광정대부 도첨의참리 상장군(匡靖大夫 都僉議叅理 上將軍)으로 은퇴하여 물러났다가, 뒤에 첨의시랑찬성사 판군부사사(僉議侍郞贊成事 判軍簿司事)가 되었다. 물러난 뒤에는 전원에 머물면서 13년 동안 거문고나 바둑을 일삼지 않고, 밤낮으로 선업(善業)을 닦는 데 힘썼다. 대덕(大德)
7 임인년(충렬왕 28, 1302) 6월 병이 들어 8월 초하루에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니, 향년 74세이다. 임금이 애도하여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백관들이 장례를 치르게 하고, 시호를 관신공(寬愼公)이라 추증하였다.
아, 대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뉘라서 부귀를 누리다가 생을 마치려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끝까지 영화로우면서도 흠이 없는 자는 드문데, 지금 나는 공에게서 이를 본다. 공은 평생 늘 스스로를 닦아서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었으니, 생각해 보면 오늘과 같은 보답이 어찌 평소와 같을 뿐이겠는가.
부인 (미기재)씨는 예빈소경(禮賓少卿) 주(澍)의 맏딸로, 공이 귀해짐에 따라 강화군부인(江華郡夫人)으로 봉해졌다. 3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종린(宗璘)은 지금 조현대부 근위역령장군 도첨의중사(朝顯大夫 近衛役令將軍 都僉議中事)이고, 차남 종서(宗瑞)는 전주판부사 조현대부 흥위위정용장군(全州判副使詞 朝顯大夫 興威衛精勇將軍)이며, 3남 신환(神煥)은 머리를 깎고 선승(禪僧)이 되었다. 장녀는 비서랑(秘書郞) 권한공(權漢功)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근시랑(近侍郞) 오연(吳璉)에게 시집갔으며, 3녀는 견룡(牽龍) 이희담(李希聃)에게 시집갔다.
장례를 지내면서 아들 종린 등이 내가 친족으로서 조카의 항렬이 되며 특별한 보살핌을 받았다고 하여 묘지명을 써 달라고 부탁하므로, 어쩔 수 없이 명(銘)을 지어 이른다.
당당하도다, 우리 공이여, 기량이 크고 재주가 뛰어났고
때를 만나 훌륭하게 되었으며 나이가 들어 물러나도다.
뜻은 참다운 공(功)을 세우는 데 있어서 재상[黃扉]의 높은 지위에 이르렀으나
관작을 탐하지 않고, 마음 또한 그에 따라 지나치지 않았도다.
수명과 즐거움을 온전하게 하고 선행을 닦으며 끝을 맺으니
훌륭한 군자가 되어 끝까지 어그러짐이 없도다.
명당을 점쳐서 묘소를 정하니 산과 물도 신령스러워
훌륭한 자손들이 창성하고, 영원히 이에 힘입으리로다.
대덕(大德) 6년 임인년(충렬왕 28, 1302) 9월 일 광록대부 도첨의참리 영현전태학사 동수국사 판문한서사(光祿大夫 都僉議參理 英賢殿太學士 同修國史 判文翰署事) 민지(閔漬)가 짓다.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