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국 상락공(高麗國 上洛公) 묘지<題額>
대저 천하를 통틀어 언제나 존중되는 것이 세 가지가 있으니, 덕(德)이 하나이고, 나이[齒]가 하나이고, 작(爵)이 하나이다. 군자가 세상을 살면서 그 중 하나나 둘을 얻는 것도 오히려 힘들거니와 하물며 셋을 얻겠는가. 그 셋을 얻어서 빠진 것이 없는 이는 오직 우리 상락공뿐이다.
공의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방경(方慶)으로, 영가군(永嘉郡)
1 사람이다. 증조 의화(義和)는 사호(司戶)였으나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에 추증되었고, 조부는 장야서승 겸 직사관(掌冶署丞 兼 直史館) 민성(敏誠)으로 은청광록대부 상서우복야(銀靑光祿大夫 尙書右僕射)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는 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충사관수찬관 지제고(正議大夫 兵部尙書 翰林學士 充史館修撰官 知制誥) 효인(孝印)으로 금자광록대부 중서령(金紫光祿大夫 中書令)에 추증되었는데, 모두 공이 귀하게 되었으므로 추증된 것이다. 어머니는 원흥진
2부사 낭장(元興鎭副使 郎將)인 송기(宋耆)의 딸로, 본관은 김해부(金海府)이다.
공은 천성이 충성스럽고 부지런하면서 공손하고 검소하였으며, 신의가 있고 너그러우면서도 신중하고 엄숙하였다. 비록 무관[虎官]으로 벼슬을 시작하였지만 행정에도 재간이 있어서
3, 장군(將軍)으로 급사중(給事中)을 겸하고, 혹은 어사중승(御史中丞)을 겸하였으며, 혹은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으로 지각문사(知閣門事)와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를 겸하기도 하고, 또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대각(臺閣)을 역임하면서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게으르지 않고 분명하게 처리하니, 늠름하기가 바람이 일어나는 것 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공경하였다. 때로는 덕망으로서 여러 차례 서북(西北)을 다스리면서 은혜와 위엄을 번갈아 보이니, 사람들이 (태평성대를) 구가하였고 지금까지도 그리워하고 있다.
나라가 경오년(원종 11, 1270)이 되자 강도(江都, 江華)에서 다시 송경(松京 : 開京)으로 나왔는데, 불충한 무리들이 난을 모의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三別抄의 난>. 공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서 추토사(追討使)가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진도(珍島)에서 포위하니, 이듬해 5월까지 무릇 15번이나 크게 싸워 적을 꺾었다. 드디어 금자광록대부 수대위 중서시랑평장사 판이부사 대자대보(金紫光祿大夫 守大尉 中書侍郞平章事 判吏部事 大子大保)가 되었다가 곧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임명된 것은 이 전쟁에서의 공로 때문이었다. 그물을 빠져 나간 나머지 무리들이 탐라(耽羅)에 들어가 험한 것을 믿고 독한 짓을 자행하자, 다시 공을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 삼았다. 계유년(원종 14, 1273) 4월 28일에 배를 타고 대양을 건너가 벌 떼 같이 모여있는 소굴을 모두 깨끗하게 쓸어내니, 큰 산이 계란을 누르는 듯하여 삼한(三韓)이 모두 애오라지 살기를 바라게 되었다.
원종(元宗)이 침전으로 불러들여 정성스럽게 연회를 베풀고 위로하면서 수대사 개부의동삼사 문하시중 상주국 판어사대사(守大師 開府儀同三司 門下侍中 上柱國 判御史臺事)로 임명하였다. 그 해에 선제(先帝 : 元 世祖)가 조칙을 내려 (원에) 조회하게 하자, (황제가) 광한전(廣寒殿)에 행차하여 공을 승상의 반열에 앉히고 연회를 크게 베풀어서 손수 상 위의 진미를 집어주었다. 이어 금부(金符)와 금으로 장식한 안장과 백은(白銀) 덩어리[鋌] 등의 많은 예물을 상으로 내렸는데, 보고 들은 천하 사람들이 부러워하지 않음이 없었고, 삼한(三韓)에 인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또 일본(日本)을 정벌하라는 명[東征之命]을 받들어 갑술년(충렬왕 즉위, 1274)에 일본으로 들어가 토벌하니, 사로잡고 베어 죽인 자가 매우 많았다.
기묘년(충렬왕 5, 1279)에 공이 다시 글[章]을 올려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빌었다. 임금이 늘 중사(中使)를 보내어 간곡하게 타이르며 “고(孤)가 경에게 안석과 지팡이[几杖]를 내리고자 하여도 요즈음 변고가 많아서 예의를 갖출 수가 없으므로, 고의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청컨대 경은 다시 직무를 보십시오.”라고 하니, 공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4 경진년(충렬왕 6, 1280) 겨울에 황제가 있는 곳으로 가서 조회하자, 황제가 중봉대부 관고려군도원수(中奉大夫 管高麗軍都元帥)로 임명하였다.
신사년(충렬왕 7, 1281) 여름에 다시 일본을 정벌하였으나, 남송군(南宋軍)이 약속보다 석 달 뒤에 왔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지체되어 배가 상하고 돌림병이 일어났다. 상국(上國 : 元)의 여러 장수들이 매번 군사를 돌이키자고 꾀었으나, 공은 힘써 불가하다고 쟁론하고 여러 차례 싸운 뒤에야 돌아왔다.
계미년(충렬왕 9, 1283)에 또 글을 올려 간절하게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부득이 하여 삼한벽상 추충정난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판도첨의사 상장군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韓壁上 推忠靖難定遠功臣 匡靖大夫 三重大匡 判都僉議事 上將軍 判典理司事 世子師)로 임명하고 이에 은퇴하도록 하였으나, 임금이 마음에 만족하게 여기지 못하여 또 상락공 식읍 1,000호 식실봉 300호(上洛公 食邑 一千戶 食實封 三百戶)를 더하여 주었다.
공이 관직에 있을 때는 항상 밤늦게 잠자리에 들고 일찍 일어나 앉아서 새벽이 되기를 기다렸다. 물러난 뒤에도 여전히 그와 같이 하면서 여전히 나라의 편안함과 위태함을 걱정하였다. 대덕(大德)
5 4년(충렬왕 26, 1300) 8월 16일에 병환으로 백목동 앵계리(栢木洞 鸎溪里)에서 돌아가시니, 9월 초3일에 예안(禮安)
6의 서산(西山) 기슭에 장례지냈는데, 유언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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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려움에서 구하고 백성을 건져내어 사직을 다시 안정시켰으니 덕이 하나이고, 89세에 이르렀으니 나이가 하나이며, 상국도원수(上國都元帥)로서 또 공(公)으로 봉해졌으니 작이 하나이다. 이른바 셋을 갖추어 빠진 것이 없으니, 대개 칭찬이 지나치지 않도록 사실만 적은 것이다.
공은 기거랑 지제고(起居郞 知制誥) 박익정(朴益旌)의 딸과 결혼하여, 3남 3녀를 낳았다. 선(瑄)은 봉익대부 부지밀직사사 전법판서 상장군(奉翊大夫 副知密直司事 典法判書 上將軍)이었는데 공보다 먼저 죽었고, 흔(忻)은 관고려군만호 진국상장군 광정대부 도첨의참리 상장군(管高麗軍萬戶 鎭國上將軍 匡靖大夫 都僉議叅理 上將軍)이 되었으며, 순(恂)은 봉익대부 밀직사부사 판비서시사 문한학사(奉翊大夫 密直司副使 判秘書寺事 文翰學士)가 되었다. 장녀는 참지정사(叅知政事) 조계순(趙季恂)의 둘째 아들인 변(忭)에게 시집갔는데, 변은 벼슬이 봉익대부 부지밀직사사 상장군 전리판서(奉翊大夫 副知密直司事 上將軍 典理判書)에 이르렀다. 2녀는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 김광원(金光遠)의 맏아들인 조현대부 신호위보승장군(朝顯大夫 神虎衛保勝將軍) 김원충(金元冲)에게 시집갔고, 3녀는 통례문사(通禮門使) 권윤명(權允明)에게 시집갔다. 박씨가 공보다 먼저 사망하였으므로, 또 손씨(孫氏)와 결혼하여 딸 한 명을 낳으니,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 채의(蔡宜)에게 시집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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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자손들이 끊이지 않고 또한 좋은 벼슬을 하였으며, 훌륭한 자손이 접(接)하고 이어지니 가문이 밝게 빛났다. 공은 아흔 살이 가까웠어도 동안(童顔)이었고, 눈으로 직접 손자를 보았으니, 이 또한 뛰어나지 아니한가. 정벌하러 나갔을 때에는 늘 대조(大朝 : 元)의 군마(軍馬)와 함께 출입하며 응대(應對)를 법식대로 하면서도, 비록 온화하나 업신여기지 않도록 하였으며, 비록 자신을 높였으나 노하게 만들지 않았다. 어려움을 당하여도 구차하게 면하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삶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와 같은 하나 하나의 공적은 모두 녹권(錄券)과 국사(國史)에 실려 있으므로, 여기서는 자세하게 적지 않고 단지 그 대강만 남길 뿐이다. 내가 인척[瓜葛之分]이 되면서도 또한 따로 (공에게) 보살핌을 받았는데, 게다가 아들인 상국(相國)의 요청이 있으므로 삼가 붓을 잡고 묘지명을 짓는다.
명(銘)하여 이른다.
큰 집이 사람을 감싸주듯이 기둥이 되고 받침돌이 되니
추위와 더위가 해치지 못하고 비바람도 닥쳐오지 못하네.
여기에서 만 년을 살아도 썩지 않으리니
높고 높도다, 우리 공이여, 주(周)의 단(旦)과 석(奭)과 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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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을 도운 공로와 난을 평정한 방책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삼한(三韓)의 백성들이 그 혜택을 누리네.
나라의 원로는 가셨지만 하늘과 땅은 끊임 없이 이어지니
가는 길은 알지 못해도 오늘과 옛날을 감응하여 생각하게 하도다.
고향의 아름다운 언덕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온 산에 가득 하고
조상의 영혼이 있으니 점(占)을 쳐도 가히 무덤으로 정할 만한 곳인데
유언도 분명하니 어찌 다른 곳을 택하겠는가.
공만 홀로 편안한 것이 아니라, 자손들도 더욱 이롭게 하는도다.
4년 경자년(충렬왕 26, 1300) 9월 일
전 정헌대부 밀직사좌승지 판비서시사 문한학사 충사관수찬관 지제고(前 正獻大夫 密直司左承旨 判秘書寺事 文翰學士 充史館修撰官 知制誥) 이진(李瑱)이 짓다.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