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택춘묘지명(梁宅椿墓誌銘)
- 시대
- 고려
- 연대
- 1254년(고종 41)
- 유형
- 묘지명·묵서명
- 크기
- 가로 57.5cm, 세로 37.5m, 두께 4.5cm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6가 168-6 국립중앙박물관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 /각자 /서자
- 김구(金坵) / 미상 / 김구(金坵)로 추정
- 지정사항
- 비지정유산
- 연구정보
개관
양택춘(梁宅椿 : 1172~1254)의 선조는 계림((鷄林 :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김씨(金氏)인데 뒤에 대방군(帶方郡 : 지금의 전라북도 南原市)으로 이주하여 양씨로 바꿨다. 나이 거의 60세에 온수군(溫水郡 : 지금의 충청남도 牙山市 溫泉洞) 감무(監務)가 되어 처음으로 벼슬하였다. 최이(崔怡)가 선원사(禪源社 : 仁川광역시 江華郡 禪源面에 있던 절)를 창건하게 되자, 당대의 뛰어난 승려로 모임을 주관하도록 하였는데, 공의 큰아들 안기(安其)가 그 선발을 주도하였다. 이에 아들 덕택으로 나이 이미 70여 세에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이 되었다. 뒤에 조청대부 예빈경(朝請大夫 禮賓卿)이 되어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였다. 1254년(고종 41)에 83세로 별세하였다. 처음 내시(內侍) 김수(金脩)의 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승려가 되었다. 큰아들 천영(天英)은 안기(安其)라고 이름을 고쳤다. 후처는 별장(別將) 배씨(裴氏)의 딸인데 세 아들을 낳았다. 묘지명은 장사랑 시상서예부낭중 국학직강 지제고(將仕郞 試尙書禮部郎中 國學直講 知制誥) 김구(金坵)가 지었다. 묘지명의 뒷면에는 범어(梵語)로 된 진언(眞言)이 4행으로 새겨져 있다. 현존하는 송광사 고려문서(松廣寺高麗文書)의 노비첩은 1358년(공민왕 7)에 작성한 것인데, 수선사 주지(住持)인 원오국사(圓悟國師) 내로(乃老)가 아버지인 양택춘으로부터 받은 노비를 당시 수선사에 봉안한 거란본 대장경을 관리하도록 하여 달라고 올린 소지에 대해서 관에서 인증한 문서이다. 이 고려문서는 수선사와 관련된 유일한 문헌으로 당시 수선사의 규모를 비롯해서 노비제도, 대장경 관리, 원오국사 등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수선사 주지(住持)인 원오국사(圓悟國師)는 바로 공의 큰 아들인 천영(天英)이다.
판독문/해석문
해석문 | 김용선 | ||
판독문 | 김용선 |
참고문헌
단행본 | 2001 | 金龍善, 2001, 『高麗墓誌銘集成(第三版)』,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
논문 | 1989 | 金龍善, 1989, 「高麗 支配層의 埋葬地에 대한 考察」『東亞硏究』17; 2004『고려 금석문 연구-돌에 새겨진 사회사』, 일조각 |
논문 | 1984 | 許興植, 1984, 「高麗의 梁宅椿墓誌銘」『文化財』17; 1986「圓悟國師의 父 梁宅椿墓誌銘」 『高麗佛敎史硏究』 |
논문 | 1975 | 李蘭暎, 1965, 「韓國匙箸의 形式分類」『歷史學報』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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