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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묘지(琴義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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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묘지명은 이규보가 1230년(고종 17) 작성했으며,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36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동문선(東文選)』과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도 수록되어 있다. 묘지명의 주인공인 금의(琴義 : 1153~1230)는 무신정권기의 문신. 본관은 봉화(奉化). 초명은 극의(克儀), 자는 절지(節之)이다. 삼한공신(三韓功臣) 용식(容式)의 후손으로 계양(桂陽 : 지금의 부천지역) 김포현(金浦縣) 출신이다. 급제 이전에 청도의 감무로 나갔는데, 강직하여 굽히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철태수(鐵太守)라고 하였다. 1184년(명종 14)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고 내시(內侍)에 임명되었다. 주로 신종·희종·고종 때인 최충헌 정권 때 문사로서 요직을 거쳤다.여러 번 지공거가 되어 명사(名士)를 뽑았다. 세상에서는 이를 ‘금학사옥순문생(琴學士玉筍門生)’이라 하였다. 문장에도 뛰어나 『한림별곡(翰林別曲)』에 금학사(琴學士)로 소개되어 있다. 시호는 영렬(英烈)이다.
벽상삼한대광 금자광록대부(壁上三韓大匡 金紫光祿大夫) 수태보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수문전태학사 판이부사(守太保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 修文殿大學士 判吏部事)로 치사(致仕)한 금공(琴公)의 묘지명
대개 하늘이 베풀면서 뿔을 준 자에게는 날개를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비로서 과거에 장원으로 뽑히고서 높은 지위에 오른 자는 드물다. 공은 그렇지 않아 과거에 장원으로 뽑혔는데, 또한 재상(黃扉)의 귀한 자리를 역임하고 장수까지 누렸다. 한 평생이 시종 모두 모자람이 없었으니, 어찌 이유가 없이 그러했겠는가? 이는 반드시 하늘이 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이가 있어서, 그런 이는 비록 얻은 것이 많은데도 하늘이 주기를 싫어하지 않는 것이리라.
공의 이름은 의(儀)이고, 자는 절지(節之)이다. 이전의 이름은 극의(克儀)인데, 나중에 의(儀)로 고쳤다. 공은 삼한 공신(三韓功臣)인 용식(容式)의 세보(世譜)에서 나오는데, 계양(桂陽 : 지금의 부천지역) 김포현(金浦縣)이 고향이다. 증조부인 아무개는 신호위 산원(神虎衛 散員)으로 상장군(上將軍)에 추증되었다. 조부인 아무개는 검교태자소보(檢校太子少保)로 좌복야(左僕射)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아무개는 창안택 아전(昌安宅 衙典)이었는데, 공 때문에 좌복야(左僕射)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서씨(徐氏)는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인 숙(淑)의 딸이다. 역시 공 때문에 이천군대부인(利川郡大夫人)에 추증되었다.
공은 젊어서 학문에 힘쓰고 글짓기를 잘 하였다. 을미년(명종 5, 1175) 대학(大學)에 들어가고 연이어 과거를 보았으나, 급제하기 전에 청도군(淸道郡)을 다스렸다. 행실을 닦고 청렴하며 굳세고 정직하여 흔들림이 없이 정사를 하였다. 그 지방에서 청도철상공(淸道鐵相公)이라고 불렀다. 임기가 끝나자 팔관보 팔관(八關寶判官)이 되었다. 이듬해 과거에 장원으로 뽑혀 내시(內侍)에 적을 두었다. 임금이 훌륭하다 여겨 벼슬을 시켰다. 관직이 장작주부 당후관(將作主簿 堂後官)에 이르렀다가 드디어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임명되었다. 그 동안 빛나고 권세있는 요직을 말하면, 상서이부 원외랑(尙書吏部 員外郞) 직보문각(直寶文閣) 좌사낭중(左司郎中) 기거사인(起居舍人) 지제고(知制誥) 형부낭중(刑部郎中) 태자사경(太子司經) 국학직강(國學直講) 어사잡단(御史雜端) 중서사인(中書舍人) 사관수찬(史館修撰) 병부시랑(兵部侍郞) 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 동궁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 상서우승(尙書右丞)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태자찬선대부(太子贊善大夫)를 역임하였다. 공이 일찍이 쌍학사(雙學士)의 관직을 띠고 또 삼대부(三大夫)를 겸직하므로 조정에서 영화롭게 여기었다.
공이 간관(諫官)으로 있을때 적임자가 아닌 사람이 참관(參官)의 직위를 받자, 공이 여러 낭관들과 함께 불가하다고 했다. 권세를 잡은 자들이 이를 좋아하지 않아 (중서문하)성의 낭관(郎官)을 모두 내보내 다른 관직에 임명했다. 공 역시 이에 따라 장작감 지합문사 집례(將作監 知閤門事 執禮)가 되었다. 이는 가장 어렵다고 하는 자리로서 공이 비록 처음 맡는 직책이었으나 행동이 자상하여 오래 동안 이 직책에 있던 원숙한 사람보다 나았다. 공의 재주는 어떤 일이고 이와 같이 할 수 있었다. 얼마 안 가서 좌간의대부 판비서성(左諫議大夫判秘書省)에 임명되었으며, 다음에 추밀원 우승선(樞密院 右承宣)에 제수되었다. 간관직(諫官職)과 제고학사(制誥學士)를 모두 그대로 가지고 있었으며, 자급에 따라 지주사(知奏事) 지이부(知吏部)가 되었다. 공이 여러 해 동안 후설(喉舌)의 직을 맡아 무릇 임금에게 건의하는 일(奏對)이나 임금의 명령을 받드는 일(應奉)이 임금의 뜻에 맞았다. 임금은 공에 의지하고 중하게 여겼으며, 정사도 많은 자문을 받았다.
임신년(강종 1, 1212) 금나라 사신이 왔는데, 정문(正門)으로 들어오려 했다. 우리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고 통역인을 시켜 이를 꾸짖었으나,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날 큰 비가 내려서 여러 신하들은 옷을 적시면서 기다렸는데, 임금이 공에게 명하여 그들을 깨우치게 하였다. 공이 가서 먼저 묻기를 ‘천자가 제후의 나라를 순행하는 일은 옛날부터 있었는데, 만약 그대 나라 황제가 소국에 왕림하면 어느 문으로 들어가야 할 것인가?’하니, 그들은 ‘천자가 출입하는 곳이야 중문을 버려두고 어디로 들어갈 것인가?’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신하로서 임금이 출입하는 정문으로 들어가려 하는 것이 옳은가?’하니, 저들은 그 말에 크게 감복하고 서문으로 들어왔다. 이처럼 공은 기회에 따라 계략을 내는데 있어, 다른 사람은 생각도 못할 점이 있었다.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겨 상을 내렸다.
계유년(강종 2, 1213) 승진하여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첨서추밀사 좌산기상시 한림학사승지(簽書樞密事左散騎常侍翰林學士承旨)에 임명되었다. 을해년(고종 2, 1215) 상부(相府)에 들어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정당문학좌복야 보문각태학사 수국사(政堂文學左僕射寶文閣大學士修國史)가 되고, 정축년(고종 4, 1217) 수태위 중서시랑 평장사(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무인년(고종 5, 1218) 문하시랑 수문전태학사(門下侍郞 修文殿大學士)가 되었다. 일찍이 팔관회(八關會)에서 수대(獸臺)의 움직임을 법대로 하지 않는 자가 있었다. 헌관 대관이 좇아가 대정(隊正)의 목과 옷깃을 잡고 욕보였다. 이에 군사와 장수들이 큰 소리로 떠들고 성내어 기왓장과 자갈을 어사대의 연석에 마구 던졌다. 돌멩이가 재상의 연석을 지나기도 하였다. 공이 크게 노하여 급히 뜰 아래로 내려가 우뚝 서며 목소리를 가다듬어 크게 호령하기를 ‘너희들이 군신 상하(君臣 上下)가 구비된 나라에 있으면서 감히 이런 짓을 하느냐. 정말 난을 일으키려거든 먼저 늙은 나를 죽이라.’하면서 두세 번 소리치자 군사들의 마음이 차츰 저지되어 난이 일어나지 못하였다. 위기를 당해서도 두려워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공이 춘주도(春州道)를 다스릴 때 아전을 매우 엄하게 다스리고, 민폐를 개혁하는데 심력을 다하여 백성들이 이를 힘입었다. 일찍이 사마시(司馬試)를 맡았고, 세 번이나 과거를 맡아 보았다. 거기에서 뽑힌 사람은 모두 당대의 이름난 사람들로서 문사의 성한 것이 근고에 없던 일이었다. 경진년(고종 7, 1220) 벽상삼한대광 수태보 문하평장사 수문전태학사 판이부사(壁上三韓大匡 守太保門下平章事 修文殿大學士 判吏部事)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집에 있으면서 덕망 있는 원로들과 함께 기로회(耆老會)를 만들고 날마다 잔치를 베풀어 교유하면서, 재물을 멀리하는 즐거움(揮金之樂)을 누렸다. 경인년(고종 17, 1230) 정월 26일에 차츰 병을 앓았다. 이 날도 자손들을 시켜 바둑을 두게 하고 구경하였고, 저녁이 되어서도 태연하게 조용히 담소하다가 밤이 되자 조용히 별세하였다. 곁에 모신 사람들도 알지 못하였다.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향년은 78세였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하고 해당 관청에 명해 상사를 치르게 하여, 봉황산(鳳凰山) 기슭에 장사지내고 모공(某公)이라고 시호를 내렸다.
공은 풍채가 아름답고 장중하였다. 젊었을 때 송(宋) 나라에서 온 장천각(莊天覺)은 관상을 잘 보는 사람이었다. 공을 보고 말하기를 ‘후일에 반드시 재상이 되리라’하였는데, 과연 그의 말과 같이 되었다. 성품이 굳세고 과단성이 있어 다른 사람을 대해 책망할 적에는 아무것도 숨기는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많이 꺼리며 혹은 훼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심이 평탄하여 면전에서는 욕설을 하더라도, 뒤에는 모두 잊어 조금도 남겨 두는 일이 없기 때문에 끝까지 그 몸을 보전하였으니, 활달하고 도량이 큰 군자라고 할 만하다.
공은 풍채가 아름답고 장중하였다. 젊었을 때 송(宋) 나라에서 온 장천각(莊天覺)은 관상을 잘 보는 사람이었다. 공을 보고 말하기를 ‘후일에 반드시 재상이 되리라’하였는데, 과연 그의 말과 같이 되었다. 성품이 굳세고 과단성이 있어 다른 사람을 대해 책망할 적에는 아무것도 숨기는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많이 꺼리며 혹은 훼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심이 평탄하여 면전에서는 욕설을 하더라도, 뒤에는 모두 잊어 조금도 남겨 두는 일이 없기 때문에 끝까지 그 몸을 보전하였으니, 활달하고 도량이 큰 군자라고 할 만하다.
이 조정의 어느 정승이 온 나라에 크게 울렸나
아름다울손 우리 태보(太保)님 그 중에서 제일 우뚝하네.
빠른 걸음 대각(臺閣)에서 수염 다듬고 정색하니, 간악한 관리 기운 꺾여 전도하며 포복하네.
정문이 높고 높아 사람들 감히 곁에도 못가는데,
오랑캐 나라 사신의 더러운 발길 그 문지방을 넘으려 했네.
우리 님이 가서 효유하여 한 마디 말로 적중하니, 저들의 짐승 마음도 활연히 풀렸네.
국사의 계획 주밀한 것을 이리저리 손으로 가리키듯 하였고,
푸른 초야에 돌아와선 마음대로 한가히 지냈네.
신선 수레에 편안히 가 저승길 멀었으니,
덕 있는 이가 가셔라 누구를 보고 모범을 삼으리.
저 봉황산 날개도 가벼운 듯한데, 흙이 살찌고 샘은 맑으며 나무숲도 울창하네.
어느새 정해 마련한 임 계실 그 집인데,
깊은 무덤에 명문을 드리나니 남은 광채 무궁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