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결락> 수태위 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대학사 수국사(守太尉 門下侍郞平章事 修文殿大學士 修國史) <결락> 문정공(文正公) 조공(趙公) 묘지명 및 서문
공의 이름은 충(冲)이고, 자는 담약(湛若)으로, 횡천(橫川)
1 사람이다. ▨▨▨▨▨▨▨▨▨ 대보(大保)인 정신(正臣)의 증손이고, 각문지후(閣門祗候)로 사공 상서좌복야(司空 尙書左僕射)에 추증(追贈)된 ▨ 시언(時彦)의 손자이며, 금자광록태부 특진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문하시중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 판이부사 태자대사(金紫光祿太夫 特進 三重大匡 開府儀同三司 門下侍中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判吏部事 太子大師)로 추증되고 시호가 문경공(文景公)인 영인(永仁)의 아들이다. 어머니 영평군부인(鈴平郡夫人) 윤씨(尹氏)는 실로 추성봉의 배향공신(推誠奉議 配饗功臣) 영평백(鈴平伯)이고 추증된 시호가 문숙공(文肅公)인 관(灌)의 손자이자, 평장사 상주국(平章事 上柱國)이고 추증된 시호가 문강공(文康公)인 언이(彦頤)의 아들인, 직사관(直史館) 자고(子固)의 딸이다.
공이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자라면서 이를 알게 되자 슬퍼하고 그리워함이 참으로 깊고, 효도와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기 때문에 집에서 이름을 효동(孝童)이라고 하였다.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다. 가음(家蔭)으로 벼슬하여 간정도감판관(刊定都監判官)에 임명되었다. 대학(大學)에 들어가 여러 번 시험을 보았는데 거듭 우등하였으므로 상사(上舍)에 올랐다. 나이가 겨우 약관(弱冠)이 되었을 때 진사제(進士第)에 합격하여
2 내시(內侍)에 속하게 되었다. ▨ 각문지후 시상식봉어(閣門祗候 試尙食奉御)에 오르고, 비의(緋衣)와 은어(銀魚)를 하사받았다.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으로 바뀌면서 자금어대[金紫]를 하사받고, 공부낭중 대자문학(工部郞中 大子文學)으로 옮아갔다.
명창(明昌)
3 7년(명종 26, 1196)에 명을 받들고 사신이 되어 금(金)에 갔다. 객성(客省)의 막(幕)에 이르니, 중사(中使)가 집례관(執禮官)과 함께 왔는데, 전정(殿庭)에서의 예(禮)를 여러 차례 번잡하게 ▨ 치렀다. 황제가 국왕의 안부를 묻자, 중사가 무릎을 꿇고 “국왕인 신(臣) 아무개의 사절입니다.”라고 아뢰었다. ▨(공이) 말하기를 “임금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는 일은 예(禮)가 아닙니다.”라고 하였으나 중사(中使)는 “이것은 관행에 따른 것이라 고칠 수가 없소.”라고 하였다. 공은 “작은 나라와 큰 나라는 비록 다르지만 임금을 섬기는 예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큰 나라로서 사람들에게 예가 아닌 것을 강요합니까. 본인은 차마 입으로 우리 임금의 이름을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라 하였다. 중사가 두세 차례 힐난하였으나 그 고집을 꺾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드디어 전중(殿中)으로 인도하여 들어가 예를 행하니 한결같이 공의 뜻대로 되었다.
사행에서 돌아와 보고하니 임금이 듣고 크게 감탄하여 상을 내리면서 말하였다. “‘사방(四方)에 사신으로 가서 임금의 명(命)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그대를 두고 일컫는 말인가 봅니다.” 이듬해에 대복소경 태자궁문랑(大僕少卿 太子宮門郞)에 임명되고, 양광(楊廣)
4 충청(忠淸) 등 지역의 안찰사가 되어 나가자 수레가 이르는 곳마다 모두 위엄과 자애로움이 있었다.
임술년(신종 5, 1202)에 아버지 문경공(文景公)의 상을 당하여 슬픔으로 몸이 상하였으나 예법대로 (장례를 치르고) 상을 벗었다. 예·병·이부 3부의 시랑(侍郞)과 ▨▨동궁(▨▨東宮)을 거쳐 국자좨주 지도성(國子祭酒 知都省)에 올랐다. 무진년(희종 4, 1208) 봄에 병마사(兵馬使)로 동북로(東北路)에 나가 다스렸는데 폐단을 고치고 이익을 일으키며, 물 흐르듯 막힘 없이 판결하여 장수와 서리들의 신임을 깊이 얻었다. 기사년(희종 5, 1209 )에 ▨▨▨을 주관하여 추영수(秋穎秀) 등 66명을 ▨(선발하였다).
5
신미년(희종 7, 1211)에 대사성 보문각학사 지제고(大司成 寶文閣學士 知制誥)가 더해지고, 얼마 되지 않아 지예부(知禮部)가 더해졌다. 이 해 가을에 과거[禮部]의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강창서(姜昌瑞) 등 28명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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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년(1213) 가을에 지금의 임금<高宗>이 즉위하였는데, 겨울에 한림학사 ▨▨▨상서에 임명되었다. 갑술년(고종 1, 1214) 가을에 다시 병마사로서 서북로에 나가 다스렸는데, 그 ▨ 다스리는 방식이 동북로에서와 같았으나 위엄과 명망은 더하였다. 뒤에 채방사(採訪使)를 보내어 ▨ 관리들의 ▨▨ 치적을 살피게 하였는데, 공을 으뜸으로 보고하자 은청광록대부 부추밀사 이부상서 상장군 한림학사승지(銀靑光祿大夫 副樞密使 吏部尙書 上將軍 翰林學士承旨)에 임명하였다.
병자년(고종 3, 1216) 겨울에 부원수(副元帥)로 거란(契丹)적을 정벌하려 나가게 되었다. 군사를 훈련시키고 정비가 이루어진 뒤에 나가려고 하였으나, 당시 원수(元帥, 鄭玄)는 성미가 까다롭고 고집이 세어 혼자 마음대로 하였고, 공은 성격이 너그럽고 넓어서 힘써 훈련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적(▨績)을 세우지 못하고 모두 파직되었다. 정축년(고종 4, 1217) 가을이 되자 조정에서 공의 위엄이 무겁고 또 자애가 있었기 때문에 다시 공을 기용하여 서북로 병마사(西北路 兵馬使)로 삼았다. ▨▨은 공이 오는 것을 보고 모두 기뻐하여 힘을 다 쓰지 않음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황기(黃旗)와 흑감(黑紺) 등의 여러 도적들이 사라지고 없어졌다. 이듬해에 또 거란적들을 대패시키니, 아들과 사위 등이 모두 그 공훈의 음덕을 입게 되었다. 여름에 교체되어 서울로 돌아와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좌복야(金紫光祿大夫 守司空 左僕射)에 임명되었다.
▨▨ 가을에 ▨가 다시 번지게 되자, 조정에서는 다시 군을 지휘할 장수를 논의하였다. 상재(上宰)인 진강후(晋康侯) 최공(崔公 : 崔忠獻)이 공만한 이가 없다고 아뢰자, 곧 부월(斧鉞)을 주어 적의 보루로 ▨하게 하였다. 싸워서 다시 크게 승리하니 적이 두려워하여 ▨ 대주 대주는 고려시대 경상북도 성주군의 이름인데, 이 대주는 다른 곳인 듯하다.
성(垈州城)에 들어가 지켰다. 이 때 마침 몽고국(蒙古國)의 군사령관 합진찰라(合珍札剌) 등이 승병(勝兵) 만여 명을 이끌고 동쪽 변방으로부터 ▨ 들어와 대주성을 공략하면서, 단지 우리 나라와는 화합을 청하고 거란의 ▨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공의 군▨에게 알려 오니, 공이 곧 임금께 보고하였다. 이에 앞서 몽고국에서 40여 명을 보내 문서를 가지고 배를 타고 ▨▨▨ 정주(定州)에 와서 오늘과 같이 강화(講和)를 요청한 일이 있었다. 조정에서 의논하여 말하기를 이들이 거란의 유종(遺種)인지 알 수가 없고, 일반인이 거짓 몽고 문자로 글을 써 거란에게 복수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지만 실은 ▨▨▨하려는지도 모른다고 하여, 마침내 응답하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 말을 달려 보고하는 것이 바야흐로 급하였다. 조정의 신하들은 오히려 이전의 논의를 고집하여 오랫동안 확실하게 결정하지 못하였다. 오직 지금의 추밀사(樞密使)인 최공(崔公 : 崔怡)이 말하기를, “원수(元帥)가 ▨▨▨▨▨▨▨▨▨▨ 저들을 ▨▨ 거짓되고 망령되게 알려오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힘써 ▨을 열어 말하니, 여러 공들이 그러하다고 여겨 ▨ 점차 풀어져서 다시 강화할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군량과 말먹이를 요구하는 일은 ▨▨▨ 정하지 못하였다. 공이 곧 ▨▨ 일로 몽고와 우호를 맺게 되어 거란을 공파하여 평정하였다. 몽고가 사로잡은 부녀자와 아이들 6백여 명을 주니, 공이 눈물을 흘리면서 ▨▨▨▨▨ 풀었다. 공이 이에 사찰과 관청에 ▨ 나누어 주어 심부름꾼[驅役]으로 부리도록 하였다.
이 해에 정당문학 판예부사(政堂文學 判禮部事)에 임명되고, 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김중룡(金仲龍) 등 28명을 뽑았다.
7 ▨▨▨ 수대위 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대학사 판병부사(守大尉 門下侍郞平章事 修文殿大學士 判兵部事)가 되었다. ▨▨▨ 이 해 6월 28일에 병이 들어 ▨▨▨ 의원(醫員)이 ▨▨▨ 약(藥)이 ▨▨ 종일 문(門)에 이어졌다. 사성(司星)이 아뢰기를, “태백성(太白星)이 방성(房星)
8을 침범한 형상입니다”라고 하였는데, 9월 초 3일이 되어 병이 깊어져 돌아가시자 양제리(楊堤里)의 집에 빈소를 차렸다. 바로 금(大金) 정우(貞祐)
9 8년 경진년(고종 7년, 1220)으로, 향년 50세이다.
임금이 듣고 매우 슬퍼하여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부조(賻弔)를 보내어 장례를 돕게 하고, ▨ 시호를 추증하여 문정공(文正公)이라고 하였으며, 사흘 동안 조회를 멈추었다. 이 달 28일 갑인일에 승천부(承天府)
10의 건유산(乾維山) 기슭에 ▨ 장례지내니, 예(禮)에 따른 것이다.▨(공은) ▨ 외모가 뛰어나고 컸으며, 위의(威儀)가 있었다. 마음은 바르지만 밖으로는 부드러웠다. 어려서부터 손님들과 즐기며 ▨ 날마다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러므로 ▨ 술을 마시고 즐겁게 담소하며 ▨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책 읽기를 좋아하여 ▨에 푹 빠져서 백가(百家)의 책을 거쳤으며, 특히 『시경(詩經)』과 『주역(周易)』에 ▨하였다. 소경(少卿)으로부터 ▨랑(郎)▨▨동궁(東宮)에 이르기까지 사자(使者)의 ▨나 훈도(訓導)에 반드시 그 방책을 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태화(泰和)
11 년간에 용잠(龍潛)
12의 ▨가 있어서 문득 은총을 받아 동원(同院)▨의 고원(誥院)에서 훌륭한 글과 큰 ▨을 가다듬으니, 임금과 신하가[上下]가 ▨흡족해 하였다.
13 과거[文場]를 주관하여 ▨재를 선발하니 학문이 뛰어난 이들이 모두 문중에 모여들었다. 혹은 여러 생도들을 ▨ 가르치기도 하고, 변방에서 오랑캐들을 교화시켜 내속(內屬)하게도 하였다.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안에서 있어서나 밖에서 있어서나, 지위에 임하면 모두 직무를 잘 처리한다는 평판이 있었고 움직이면 곧 명성이 뒤따랐으니, 타고난 재능과 인품이나 계책이 가히 끝이 없었다.
대주(岱州)에서 싸울 때 ▨ 몽고의 대장이 본래 완고하기가 짐승과 같은 자였고, 또 승세를 타고 있다고 자부하여 군대 안의 ▨▨ 무리들이 모두 무례하게 제멋대로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공의 거동을 보고는 마침내 탄복하고 존경하며 두려워하여 윗자리에 않게 하고 ▨ 형[大哥]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사람으로서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니, 그것은 어떠한 기술로 ▨ 한 것인가. 어찌 이른바 몸소 행함으로써 말하지 않더라도 믿게 하는 이가 아니겠는가. 생각하건대 조정에서 (정책을) 확정하지 못하였을 때 ▨▨▨ 권한을 가진 이가 만일 이와 같은 신명(神明)으로 홀로 결단하지 않고 관망하였더라면 조▨(〔朝廷〕)은 거꾸로 사나운 오랑캐의 ▨을 거슬려 삼한(三韓)의 업(業)이 ▨▨▨하게 되었을 것이다.개선하여 돌아온 이래 ▨▨▨▨▨ 떨어진 곳에 별장을 마련하고 샘을 파서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독락원(獨樂園)이라 이름지었다. 물러나게 되자 즐겨 친척과 자제와 문생(門生)과 옛 친구들을 불러모아 간단한 잔치를 베풀었다. ▨▨▨▨▨ 화락하며 전하니 ▨▨ 호사가들이 입으로 이어가며 노래하였다. 이는 또한 당시의 이름난 가르침 중의 일단의 훌륭한 일이다.
공은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門下侍郞平章事 判吏部事) 문의공(文懿公) 최선(崔詵)의 딸인 ▨▨▨ 창원군부인 최씨(昌原郡夫人 崔氏)와 결혼하였다. 아들은 세 명을 낳았는데, 장남은 과거[春官]에 합격한 뒤 거듭 승진하여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郞)이 되었으나, ▨▨ 무반직[虎職]으로 바꾸어 신호위보승▨▨▨▨▨견룡행수(神虎衛保勝▨▨▨▨▨牽龍行首)가 되었다. 둘째 아들
14은 대학(大學)에 들어가 경덕재(經德齋) 국자감(國子監)에 설치한 7재(齋) 가운데 하나로, 『모시(毛詩)』를 강하였다.
에 소속되었다가 연희궁녹사(延禧宮錄事)에 임명되었다. 딸은 다섯 명인데, 큰딸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임유(任濡)에게 시집갔으나 ▨▨▨ 공보다 먼저 죽었다. 둘째 딸은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안유좌(安劉佐)의 ▨째 아들에게 시집갔는데, 공의 문생(門生)이다. 셋째 딸은 병부낭중(兵部郎中) 서저(徐氐)의 둘째 아들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어리다. ▨▨▨한 이가 두 명이 있어서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공의 문하(門下) ▨이다. ▨▨ 공과 같은 해에 급제하여 공의 문하에 하루라도 쫓지 않는 적이 없었다. 고공낭(考功郞)군이 행▨(〔行錄〕)을 ▨(〔지어〕) 부탁하니 마땅히 힘써 자세하게 말을 하여 ▨▨▨▨▨내(來)▨ 다음은 번거로워 생략한다.
시기거랑 지제고(試起居郞 知制誥) 윤우일(尹于一)이 글을 지으며, 명(銘)하여 이른다.
덕행과 학문과 다스림, 그 어느 것도 가히 부끄러울 것이 없으니, 안(顔 : 顔淵)과 민(閔 : 閔子騫)·▨·▨·염(冉 : 冉雍)·로(路 : 子路)
15와 나란히 하도다. 나가면 장수가 되고 들어오면 재상이 되어 반백 살이 되기 전에 공명과 부귀를 이루었으니, 무엇이 한스럽겠는가. 공의 수명이 길지 못하였으니, 동네 아이들과 마을 아낙네들도 ▨ 오히려 ▨하도다. ▨문(門)▨▨ 군중(軍中)의 장교와 관리들도 평생 받은 것이 많았도다. 아홉 겹의 수레에 ▨▨▨ 산 자를 슬픔으로 위로하고 죽은 자를 추증하는 예(禮)
16에 더함이 있으니, 공적이 크다고 ▨▨▨▨▨▨▨ 이르는 것이다. 그 베푼 방략(方略)이 환하게 빛남이 없이 옥[圭]▨▨과 같이 밖으로 들어나고 <결락> 삼한(三韓)의 아버지를 구원하니 ▨ 효성스럽도다. ▨ 다시 ▨▨ 장부의 사업이 끝났으니, 아, 크도다, 공의 업적이여. ▨▨ 자취가 사라졌으니 <결락>금(大金) 정우(貞祐) 8년 <이하 결락>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