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榮陽)
1 정대부(鄭大夫) 묘지<앞면 題額>
조산대부 검교예빈경 행섭대부경(朝散大夫 檢校禮賓卿 行攝大府卿)으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받은 영양 정공(榮陽 鄭公)의 이름은 목(穆)이고, 자는 없으며, 본래 동래(東萊) 사람이다. 조부 지원(之遠)은 군장(郡長)이고, 아버지 문도(文道)도 혹은 군장(郡長)이었다고 한다.
공은 18세에 어버이를 떠나 유학하여, 고생하며 부지런하여 분발하려는 의지로 능히 공적을 이룩하였다. 함옹(咸雍)
2 2년 병오년(문종 20, 1066)에 성균시(成均試)에 급제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이름이 빛나면서 □크게 소간(蘇幹)
3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하게 되자, 당시에 과거에 뜻을 둔 자들이 한결같이 칭찬하였다. 장인인 검교장작감(檢校將作監) 광릉(廣陵) 고익공(高益恭)공이 공이 빼어나게 총명하다는 말을 듣고 진실로 아깝게 여기다가 함옹(咸雍) 7년 신해년(문종 25, 1071)에 장녀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다음해 봄에 성왕(聖王) 문종(文宗)이 친히 광전(廣殿)에서 선비를 뽑으면서, ‘명경지수는 형체를 비춘다[止水鑑形]’이라는 시의 제목과, ‘공자는 모든 임금의 스승이시다[仲尼爲百王師]’라는 부(賦)의 제목을 내려 주었다. 임금이 먼저 스스로 시를 친히 지어,
낮에는 천자의 해를 엿보고
밤에는 서민의 별을 품는다.
라고 하였다. 공이 뛰어난 무리들과 더불어 함께 시험에 나갔는데 바친 글을 비교하니, 임금이 지은 한 구절과 서로 부합하였다. 임금이 이에 감탄하여 공에게 병과(丙科)를 하사하고,
4 비서성 교서랑동정(秘書省 校書郞同正)에 임명하여 관리의 명부에 이름을 올리게 하였다. □□ 문무백관이 자주 서로 대면할 때에 공은 한결같이 온화함과 신실함으로 그들을 대하고 틈이 나거나 모진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끝까지 공과 더불어 시기하거나, 그 족성(族姓) 간에 이간하는 말을 하는 자도 없었으니, 이는 모두 공이 낙천적이고 편안한 성품과 깊고 두터운 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강(大康)
5 2년 병진년(문종 30, 1076)에 군기주부(軍器主簿)에 임명되고 고주
6통판(高州通判)이 되었다가, 임기가 끝나자 가족을 이끌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지금의 재상인 위계정(魏繼廷)과 윤관(尹瓘)이 공과 친하게 지내면서 세력과 지위를 관계하지 않고 사귀었다. 이로부터 공이 때때로 막부(幕府)에 나아가면 반드시 자리에 앉기를 재촉하여 균등한 예의로 대하면서 큰 소리로 떠들고 유쾌하게 담소하며 자기의 진정한 벗이라고 하였다.
공이 일찍이 백전(白傳)의 시를 외워
벌레도 성명(性命)을 온전히 하려면 독이 없어야 하고
나무가 천 년의 수명을 누리려면 재목이 되어서는 안 되느니라.
라는 글귀로서 자식들을 가르치고, 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경계하였다.
너희 어린아이들을 위해 말하노니
현달하여 조정에 오르더라도 갈 길이 같지가 않다.
관리가 되어서는 굳게 방두(房杜)
7의 방법을 준수해야 할 것이고
유학을 업으로 하려거든 공희(孔姬)
8의 가르침을 끝까지 배워야할 것이다.
집에서는 반드시 모든 뜻을 효도를 이루고
나라에 보답하는 데에는 충성을 다할 것을 잊지 말라.
너희들이 만일 내가 훈계한 말에 따라 행한다면
앞으로 어찌 반드시 속박과 궁벽함을 받겠느냐.
대강 10년 갑자년(선종 1, 1084)에 영청현(永淸縣)
9에 나가 다스렸는데, 그 해에 나라가 가물어서 백성이 살 길이 없어 구덩이와 도랑에 빠져 죽는 자가 이따금 생겨났다. 공이 부임한 지 몇 달이 되지 않아, 그 현 서쪽의 덕지원(德池原)에 몇 리 가량 불을 놓아 잡초를 태우게 하였다. 백성들은 처음에는 의구심을 가졌으나, 보리와 벼가 무르익자 피[稗]는 자라지 않고 온 들판에 이삭이 여물어 늘어져 있었다. 공이 사람을 시켜 베어 들이게 하니 실로 50여 섬을 군량으로 저축하였으며, 백성이 수확한 것이 또한 얼마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2년째 되는 겨울에 대요국(大遼國)의 봉책사(封冊使)와 부사 일행이 우리 조정에 들어올 때 현의 동쪽에 있는 영덕역(迎德驛)에서 묵었다. 공이 그 현의 채리(寨吏)를 거느리고 맞아들였는데 예문(禮文)이 매우 화려하고 음식과 접대 또한 매우 훌륭하니, 요나라 사람들이 “이 고을은 영청(永淸)이 아니라 영성(榮城)입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접반사(接伴使)인 전재상 소공(邵公 : 邵台輔)이 조정에 포상하기를 천거하여 직사관(直史館)에 임명하였다. 백성을 사랑하던 정치의 자취가 남아 있어 이제 20년이 지났어도 고을 사람들이 음식꾸러미를 바치는 자가 잇달아 끊어지지 않으니, 양공(羊公)
10이 여가에 한 일보다 더하다고 할 것이다. 또 고을 사람들이 고개마루에 공덕비를 세우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공이 『선종실록(宣宗實錄)』 한 권을 편찬하여 사전(史典)에 덧붙였으며, 그 유고가 집안에 전해지고 있다. 대안(大安) 9년(선종 10, 1093)이 되자 감찰어사에 제수되었다. 그 해 봄과 여름에 동쪽의 백성이 기근에 시달리자
<뒷면>
영양(榮陽) 정대부(鄭大夫) 묘지명<뒷면 題額>
선종(宣宗)이 공에게 명하여 고주·화주·장평·영인·흥원·현덕·정주·변주(高州·和州·長平·寧仁·興元·現德·靜州·邊主)
11 등 7주(州)의 춘하번 동북면병마판관 갑장별감 겸 선무(春夏番 東北面兵馬判官 甲杖別監 兼 宣撫)로 삼아 곡식 □ 1,870여 섬과 장염(醬鹽) 310여 섬을 내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게 하였다. 보고되지 않은 사람이 9,909명이나 있었으나, 공이 말하기를 “나머지를 비록 지급해 준다 하여도 관청에서 쌓아두는 것이나 실로 마찬가지이니, 또한 이 백성들에게 적으나마 혜택을 주는 것이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전중내급사(殿中內給使)에 임명되고 금주(金州)
12의 수령이 되어 나갔다. 그가 처음 명을 받을 때에 마을 친구들이 알려주며 말하였다. “아무 주(州)는 제사를 드려야 할 신위(神位)만 거의 백 개나 되는데, 그 위령들이 몹시 드세어서 사람들에게 해를 입힙니다. 자사(刺史)가 허물이 있으면 달포도 되기 전에 반드시 심한 벌을 내리기도 하지요.” 이와 같은 말을 처와 자식들이 듣고 꺼려하며 낮밤으로 그들이 붙좇을까 근심하였다. 공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또 말하기를 “귀신이 이미 총명하고 정직하다면 사람들에게 함부로 벌을 내리지 않을 것이오, □ 반드시 걱정할 필요가 없소.”라고 하였다. 부임한 지 3년이 되어도 황웅(黃熊)
13과 대태(臺駘)
14를 숭배하지 않았는데도, 불려 와 좌습우 지제고(左拾遺 知制誥)에 임명되니, 이것이야말로 귀신은 반드시 정직한 사람을 돕는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러 번 옮겨서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다. 공은 조정에서 □ 좌우에 □ 없어도 바로 성실함으로써 임무에 종사하고, 삼가고 근신하는 것으로 스스로 규칙으로 삼았으니, 마음을 삼가고 지키면 끝까지 패하거나 잘못할 리가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수창(壽昌)
15 3년 정축년(숙종 2, 1097)에 기거랑(起居郞)이 되었다. 그 해 가을에 지금의 임금<肅宗>이 선정전(宣政殿)에 행차하여 친히 온 나라의 죄수들을 살피면서, 재상에게 명하여 임금에게 가까이 나와서 모시고 일을 보라고 하였다. 공이 홀로 분연히 붓을 들고 지대뜰 위에서 바로 글을 써서 임금에게 바치니, 이 또한 옛말에 이른바 ‘좌사(左史)
16가 삼가 자신이 맡은 직책의 도리를 안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여러 번 천거를 받아 형부(刑部)와 예부시랑(禮部侍郞)에 이르렀다. 늘 녹봉을 받는 날이 되면 그 혜택이 내외의 친인척 및 마을의 천소(賤小)들에게까지 미치고는 하였다. 이 관직을 떠날 때까지 무릇 나누어 준 곡식이 35석(石)이나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감히 소홀하게 쓰지 못하고 집집마다 추렴하여 불사를 일으키고 길가에 연등을 매달아서 공의 복과 장수를 빌어주었다.
건통(乾統)
17 5년(숙종 10, 1105) 봄에 또 3품 관직에 임명되었다. 공이 □ 여러 해 동안 질병을 앓으면서 낫지도 않고 약이 끊이지를 않았는데, 이 해 3월에 병이 심해졌다. 차남인 점(漸)이 곁에서 간호하면서 근심하는 빛을 보이자 공이 “명(命)을 주는 것이 도(道)인가, 명을 빼앗는 것이 도인가. 너는 어찌하여 근심하느냐.”라고 하였다. 5월 을묘일에 용흥사 덕해원(龍興寺 德海院)에서 돌아가셨다. 그 달 신유일에 불교 예절에 따라 절의 서쪽 언덕에서 화장하였는데, 장례를 지내고 상여를 꾸미는 것이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경오일에 유골을 거두어 임시로 서울 동북쪽의 안불사(安佛寺)에 모셔두었다. 그 해 10월 9일 계유일에 권지태사감후(權知太史監侯) 곽자인(郭子仁)이 좋은 장지를 점쳐서 알려주었으므로, 갑신일 새벽에 홍호사(弘護寺) 서남쪽 언덕에 안장하였다. 춘추는 66세이다.
아들이 넷이 있는데, 장남 제(濟)는 이술(吏術)로서 관리가 되어 지금 위위주부 영광군통판(衛尉主簿 靈光郡通判)이고, 2남 점(漸)은 위위주부동정(衛尉主簿同正)이며, 3남 택(澤)은 내시(內侍)에 들어와 잡직서승(雜織署丞)이 되었고, 막내 항(沆)은 지금 상주목사록 겸 장서기(尙州牧司錄 兼 掌書記)이다. 위위주부 점 이하 세 아들은 모두 진사로써 과거에 급제하여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니, 옛 사람들의 ‘덕을 행한 자는 마땅히 그 후손도 잘 될 것이다.’라는 말이 참으로 속이지 않는다고 하겠다. 이제 평생의 업적을 글로 적었는데 나머지는 비문과 행장에 실려 있다.
명(銘)하여 이른다.
잇고 전해주는 일은 쉬우나 처음 시작하는 것은 어렵다.
후손은 창성하였지만, 선조의 자리는 외롭고 고단하네.
옛부터 바르고 미쁘면 편안하게 수를 다한다 하였으나,
지금은 그 말도 어찌 그릇되이, 홀연히 저 세상으로 가시는가.
슬프다, 이미 정해졌으니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노라.
건통 5년 10월 일에 중 응량(膺亮)이 돌에 새기다.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