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시진각국사비명(贈諡眞覺國師碑銘)
고려국(高麗國) 국사(國師) 대화엄종사(大華嚴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전불심인대(傳佛心印大) … 추충보절(推忠保節) 동덕(同德) 화공신(化功臣) 벽상삼한삼중대(壁上三韓三重大) …
홍무(洪武) 15년(우왕 8, 1382) 여름 6월 16일 화엄종(華嚴宗) 부석국사(浮石國師)께서 창성사(彰聖社)에서 입적하였다. … 국사의 위업(偉業)을 영원히 썩지 않게 하기 위하여 판종(判宗) … 에게 주달(奏達)하였다. 부고를 받은 우왕(禑王)께서 시호를 진각국사(眞覺國師)라 하고 탑호(塔號)를 대각원조탑(大覺圓照塔)이라 내리고는, 신(臣) 이색(李穡)에게 명(命)하여 비문을 짓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문인(門人)들이 국사의 행장(行狀)을 적어 보내 왔으나, 매우 불충분하여 감히 하필(下筆)하지 못하고 미루어온 지가 상당히 오래되었다. 경남(敬南)이라는 승려가 있어 … 이제 와서 비로소 비문을 독촉하면서 자세히 그 행적을 말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갑진년(공민왕 13, 1364) 가을 우리 국사께서 배를 타고 중국 항주(杭州)에 이르렀다. 내가 국사를 모시고 다니면서 규보(跬步)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국사께서 휴휴암(休休菴)에 이르렀다. 그 날 밤 몽산(蒙山)의 영정을 모신 진당(眞堂) 곧 영각(影閣)에 방광(放光)함이 있었다. … 의발(衣鉢)을 전하니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여겼다. 국사를 모시고 방장실(方丈室) 앞에 다다르니, 문에 자물쇠가 매우 견고(堅固)하게 잠겨 있었다. 삼전어(三轉語)가 벽에 걸려 있었는데 국사께서 그 글을 읽고 설명하니 자물쇠에서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문이 열렸다. 이를 본 대중(大衆)은 모두 숙연(肅然)하였다. 방 가운데 궤(樻)가 있는데, …그 속에 주봉(柱棒)과 불자(拂子)가 있었다. 그것을 들어 나에게 주려고 하니 이를 본 대중들은 더욱 탄복하였다. 또 칠(漆)을 한 자그마한 궤가 있었는데, 이는 잠겨 있지 않고 다만 상면(上面)에 “때가 이르지 않았는데 여는 자는 하늘이 반드시 벌을 줄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절성(浙省) 승상(丞相) 장대위(張大尉)의 아우가 … “그 속에 무엇이 보관되어 있습니까” 물으니, 국사가 이르기를 “문서(文書)입니다”라 하였다. 또 묻기를 “지금 그것을 열어 볼 수 있겠습니까”하니, 국사가 이르기를 “열어 볼 수 있습니다”하고, 곧 열어보니 과연 2질秩의 문서가 있었다. 그 중 …하나에는 군도(群盜)가 삼보(三寶)를 파괴하여 마침내 절이 멸망(滅亡)할 것이라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이를 본 승상이 노(怒)하여 … “해외에서 온 사람을 죽인들 무슨 이익이 있으랴. 나는 우리 불법(佛法)을 부지런히 배울 뿐이다”하고, 받았던 몽산의 의물(衣物)을 그냥 두고 떠나갔다.
병오년(공민왕 15, 1366) 봄 만봉(萬峯)을 성안사(聖安寺)로 찾아갔으나, 만봉은 3일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아니하였다. 만봉이 이르기를 “고려노화상(高麗老和尙)이 … 입시(入時)가 없거늘 어찌 출시(出時)가 있겠습니까” 하니, 만봉이 말하기를 “내가 병이 있는데, 누가 친절한 마음으로 나의 병을 간호(看護)해 주겠는가” 하였다. 국사께서 주먹으로 그의 등을 안마해 주었다. 그 날 밤 삼경(三更)에 만봉이 가사(袈裟)와 선봉(禪棒)을 전해주면서 이르기를 … 듣지 못했다. 성안사(聖安寺)를 떠나 오강(吳江)에 이르니, 어떤 승려가 그곳에 머물기를 청(請)하였으나, 국사는 굳게 사양하고 떠났다. 만봉회상(萬峯會上)의 어느 승려가 만봉이 삼경(三更)에 국사에게 전해준 의(衣)·봉(棒)을 빼앗고자 이날 밤에 오강까지는 따라왔으나, 승방(僧房)에는 미치지 못하고 되돌아갔으니, 그 승려의 속성(俗姓)은 마씨(馬氏)였다. … 우는 소리를 듣고 … 건너간 것이 분명하다. 오호라! 몽산이 휴휴암에서 방광하여 앞의 일을 현몽(現夢)으로 보여준 것이고, 만봉(萬峯)이 삼경(三更)에 전법(傳法)한 것은 후일(後日)을 경계한 것이다. 미래(未來)의 일을 훤히 내다보시고 묘(妙)하게 유촉(遺囑)하였으니, 스승과 제자간의 도(道)는 시간적인 고금(古今)과 공간적인 하이(遐邇)에 간단(間斷)함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석씨지(釋氏之) … 공민왕[玄陵]이 국사의 입중유학(入中遊學)을 위로하는 한편 더욱 존숭(尊崇)하였고 모든 사람들도 서로 앞을 다투어 먼저 친견하려 하였다. 스님은 치악산(雉岳山)에 잠시 은거(隱居)하다가 동해(東海)를 순방하고, 양양 낙산사(洛山寺)에서 관세음보살님이 방광하는 상서(祥瑞)를 감득하였다. 정미년(공민왕 16, 1367) 1월에 다시 치악산으로 돌아왔다. 공민왕이 세번이나 사신使臣을 보내어 국사를 맞이하고자 하였으나 국사는 비로소 5월에야 이르렀으므로 국사國師로 추대하고, 대화엄종사(大華嚴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전불심인(傳佛心印) 대지무애(大智無碍) 성상원통(性相圓通) 복(福) … 원응존자(圓應尊者)라는 존호를 올렸다. 그리고 국사부(國師府)를 설치하고 요속(寮屬) 관원(官員)을 두어 인장(印章)과 법복(法服)을 헌납하였다.
경술년(공민왕 19, 1370) 9월 공민왕[玄陵]이 왕사(王師) 나옹(懶翁)을 청하여 개성 광명사(廣明寺)에 선교(禪敎) 양종(兩宗)의 제산납자(諸山衲子)를 모아 공부선절목(功夫選節目)을 고시할 때 국사를 증명법사(證明法師)로 모셨다. 이 선과법회(選科法會)가 끝난 후 경천사(敬天寺)에 주석하였다. 다음해인 신해년(공민왕 20, 1371)에 금강산을 순례하는 중, 5월에 공민왕이 사신을 보내어 개성으로 돌아오도록 청하였으며, 그 해 가을 국사는 치악산으로 돌아가려고 간청하였다. 임자년(공민왕 21, 1372)부터 영주 부석사(浮石寺)에 주석(住錫)하면서 전당(殿堂)을 일신 중수하여 완전히 복구하였으니, 대개 이는 국사가 입적(入寂)하기 전에 화엄종(華嚴宗) 총본산인 부석사를 완전히 복구하겠다는 계획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국사의 휘는 천희(千熙)요 호는 설산(雪山)이며 흥해(興海) 출신이다. … 어머니는 최씨(崔氏)로, 꿈에 큰 배를 보았는데 많은 스님들이 범패(梵唄)를 하고 있었고, 그 물이 대문(大門) 앞에까지 이르러 오는 태몽(胎夢)을 꾸고 임신하였다. 만삭이 됨에 또 백학(白鶴)이 그의 복부를 쪼아 청첩가사(靑帖袈裟)를 입은 한 승려가 뛰어나오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그 후 대덕(大德) 정미년(충렬왕 33, 1307) 5월 21일 탄생하였다. 스님의 나이 13살 때 화엄종 반룡사(盤龍社) 주지인 일비대사(一非大師)를 은사로 하여 머리를 깎고 사미(沙彌)승이 되었다. 19세에 상품선(上品選)
1에 합격하였으며, 그로부터 금생사(金生寺)·덕천사(德泉寺)·부인사(符仁寺)·개태사(開泰寺) 등 10여 개 사찰을 두루 역주歷住하였다. 국사의 의복(衣服)과 음식(飮食)은 행자시절(行者時節) … 과 조금도 다름없이 검소하였으며, 지조(志操) 또한 매우 고상(高尙)하였다. 선지(禪旨)를 참구하면서 소백산(小伯山)에 있을 때, 또한 꿈에 몽산이 그에게 의법(衣法)을 전해주는 것을 보았다. 금강산과 오대산(五臺山)에서도 같은 꿈을 꾸었으니, 이것이 바로 남유(南遊)를 결심한 동기가 되었다.
저서로는 『삼보일경관(三寶一鏡觀)』 몇 권이 세상에 유행(流行)하고 있다. 국사의 세수는 76세요 법랍은 63세였다. 신이 들으니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은 육조대감선사(六祖大鑑禪師)를 스승으로 하고, 대혜보각선사(大慧普覺禪師)를 도우(道友)로 삼았다고 한다. 국사가 입적한 후 시자(侍者)가 매일 몽중(夢中)에서 친견한다는 사실은 지금도 제방(諸方) 총림
2의 미담(美談)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제 원응존자(圓應尊者)·천희(千熙)는 꿈에 몽산으로부터 의법을 전해 받았으니, 부처[釋氏]의 교(敎)는 그 진리가 심오하여 가히 심구로서 사의(思議)할 수 없는 절대무상(絶對無上)의 교리(敎理)라는 것을 참으로 믿을 만하도다! 신 이색이 감히 비명(碑銘)을 지을 수 없지만 명(銘)을 짓는다.
무상대도(無上大道) 본래부터 바깥이 없어
고금(古今)에의 시간인들 어찌 있으랴!
회광반조(廻光返照) 그 근본(根本)을 살펴보건대
화엄법계(華嚴法界) 그 자체(自體)는 일심(一心)뿐일세.
육도윤회(六途輪廻) 반복하나 마음은 부실(不失)
자고 깨는 동정(動靜)에도 일여(一如)하도다.
십방삼세(十方三世) 주류(周流)하여 천류(川流)와 같고
대천세계(大千世界) 편조(遍照)함이 태양과 같네!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 등불과 같아
묘(妙)한 광명(光明) 인천중(人天衆)에 비추어 주다.
몽중(夢中)에서 전해받은 몽산의 법등(法燈)
육진경계(六塵境界) 두루하여 없는 곳 없네.
옛날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원사(遠嗣)하였고
오늘에는 원융존자(圓融尊者) 몽중(夢中)서 받다.
귀국 후엔 공민왕이 더욱 존숭(尊崇)해
온 국민과 일심으로 추대
칠십육년 사시다가 입적(入寂)하시어
무상(無常)함을 알리고자 사(死)를 보이다.
이 비석(碑石)은 천년만년(千年萬年) 우뚝 서 있어
변함없고 결락(缺落)없이 영원하소서.
홍무(洪武) 19년(우왕 12, 1386) 병인(丙寅) 1월 일
문인(門人) 개태사(開泰寺) 주지(住持) 묘지무애(妙智無碍) 통조대사(通照大師) 충술(冲述)은 비석을 세우고 비구(比丘) 혜잠(惠岑)은 비문을 새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