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흥군신륵사보제사리석종기(驪興郡神勒寺普濟舍利石鐘記)
선각왕사(禪覺王師)인 보제존자(普濟尊者)가 여흥(驪興)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入寂)하였다. 왕사가 입적할 때 혁혁한 영험(靈驗)과 이서(異瑞)에 대하여 한 때 의심하였던 각신(覺信)대사는 더욱 분발하여 천년 후에까지 모든 불자(佛子)들에게 신심을 일으키게 하고자 진영당(眞影堂)을 짓고 영정(影幀)을 모시는 한편, 석종탑(石鐘塔)을 만들어 사리(舍利)를 조장(厝藏)하였으니,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난 셈이다. 각신대사는 석종(石鐘) 불사(佛事)를 맡아 주선하고 각주(覺珠)대사는 비석에 사용할 돌을 구하는 한편 장차 왕사의 행적(行跡) 사실을 비석에 새기고자 비문을 이색(李穡)에게 청탁하기로 하였다.
이때 염(廉) 정당(政堂)이 천녕(川寧)에 있으면서 자주 신륵사에 왕래하였다. 각주(覺珠)대사가 염 정당에게 이를 부탁하였더니 공(公)이 기꺼워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곧 개경(開京)으로 가서 마땅히 대사를 대신하여 한 말씀을 한산자(韓山子)에게 청(請)하겠습니다. 그러면 한산자는 반드시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염 정당이 나에게 진당기(眞堂記)를 청원(請願)하므로,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강월헌(江月軒)은 보제왕사가 주석(住錫)하던 당호(堂號)인 것이다. 보제(普濟)의 육신은 이미 불에 타서 없어졌으나, 여천강(驪川江)과 달은 전일(前日)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지금도 신륵사는 장강(長江)을 굽어보고 있으며, 석종탑은 강변 언덕에 우뚝 서 있다. 달이 뜨면 달그림자가 강물 속에 거꾸로 비치어서 천광(天光)과 수색(水色)과 등불 그림자와 향불 연기가 그 가운데 서로 교잡(交襍)하니, 이른바 강월헌은 비록 진묵겁(塵墨劫)
1이 지나가더라도 보제선사(普濟禪師)의 생존시(生存時)와 조금도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이제 보제의 사리(舍利)는 사방으로 흩어져서 혹은 하늘 높이 올라가 운무(雲霧) 중에 있고, 혹은 여염(閭閻)의 연진(烟塵) 속에 있으며, 혹은 사리함에 모시고 목에 걸거나 머리에 이고 다니기도 하고, 혹은 그 사리를 잠잘 때에도 항상 팔 곁에 모시고 자기도 한다. 이와 같이 극진히 사리를 봉지(奉持)하는 것을 생전에 왕사를 존경하던 것과 비교하면, 백배 이상으로도 견줄 수 없다. 하물며 신륵사는 나옹의 입적(入寂)한 곳이므로, 마땅히 각주대사가 사리에 대하여 온 정성을 다하였다. 신륵사는 보제왕사로 말미암아 그 이름과 규모가 높고 넓어 졌다.
그러므로 장차 그 이름이 영원히 빛나며, 석종탑비(石鐘塔碑)도 견고하여 신륵사와 더불어 시종(始終)을 같이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여천강과 이 달과 더불어 무궁할 것이다. 오호라! 허공에서 보이는 꽃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눈병 때문이며, 진묵겁도 또한 인간의 분별이지 결코 긴 시간이 아닌 것이다. 세계에는 성(成)·주(住)·괴(壞)·공(空)의 변천이 있어 세계가 비록 성(成)·주(住)·괴(壞)·공(空)에 따라 변천하지만 우리들의 인성(人性)은 영원히 불변자약(不變自若)한 것이다. 보제의 사리가 장차 세계와 더불어 성괴(成壞)함이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인성과 같이 자약(自若)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비록 우부(愚夫)와 우부(愚婦)일 지라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후세에 이 사리에 예경(禮敬)하는 사람들은 보제왕사의 고상한 도풍(道風)을 흠모하고 귀의하여 그의 마음을 구(求)하는 것이어야 비로소 가히 보제가 끼친 큰 은혜에 보답함이 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보제의 도덕은 보제에게만 필요한 것이지 결코 우리들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리하여 이에 대해 보제의 《사리석종기(舍利石鐘記)》를 기록하는 바이다.
보제존자(普濟尊者) 진당시(眞堂詩)와 서문(序文).
석지선(釋志先)대사는 나와 아직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이다. 국신리(國贐里)의 노구(老嫗)가 내하여 왔다. 그가 말하기를 “우리 왕사인 선각(禪覺)왕사의 탑은 선생(先生)께서 이미 그 비문을 지어 주었으므로 지선(志先) 등 문인(門人)들이 선생으로부터 망극(罔極)한 은혜를 입었다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또 선생을 찾아뵙는 것은 한 마디로 말씀드려서 우리 스승의 진당(眞堂)에 대한 찬시(讚詩)를 지어달라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그 전말(顚末)을 적는 바이다. 우리 왕사께서 오탁(五濁)
2 악세(惡世)에 나타나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설법(說法) 도생(度生)함이 비유컨대 마치 부처님이 출현하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회암사(檜巖寺)는 기원정사와 같고 신륵사는 또한 구시나가라의 쌍림(雙林)과 같다 할 것이다. 지선대사 등이 아무리 반호(攀呼)하고 민절(悶絶)한들 마침내 무슨 이익이 있으랴!
왕사의 행적을 돌아보건대 마치 밝은 달이 허공에서 떨어진 것과 같아서 그 여광까지 이미 끝나고 없으나, 다행히도 사리를 남겨 두었으므로 모두가 지극한 마음으로 봉지(奉持)하며 또한 도모(道貌)를 영정에 담아 두었으므로 후세에 널리 전시(傳示)하게 될 것이다. 이제 이 신륵사의 석종탑은 실제로 왕사의 정골사리(頂骨舍利)를 봉안하고 있다. 지선 등이 염려하는 바는 후대에 이 사리탑에 예경(禮敬)하는 이가 우리 왕사의 도모를 알지 못하거나, 또한 그의 도풍(道風)을 흠모하더라도 그 모습을 알지 못한다면 귀앙(歸仰)하는 마음에 반드시 부족하게 여기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도모인 영정을 첨앙(瞻仰)하고, 물러나와 사리석종탑(舍利石鐘塔)을 참관하면, 흔모(欣慕)하는 마음이 개연지경(介然之頃)이라도 감명을 받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진당을 짓고 영정을 봉안하는 이유인 것이다.
선생께서 만약 우리 불교를 알지 못한다면 결코 붓을 잡고 석종기(石鐘記)를 짓는다 하더라도 선생의 견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말하기를 지선대사의 말이 옳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 살펴보건대 전국 각 사찰에 불상과 영정이 봉안되고 있음이 적지 않다. 전문가가 아닌 동남(童男) 동녀(童女)와 신남(信男) 신녀(信女)들이 어찌 이를 제대로 알 수 있겠는가? 반드시 설명자로부터 이는 불상이니 그 명호가 모불(某佛)이시고 또 이는 부처의 제자인 왕사의 영정이니 그의 당호(堂號)는 모(某)스님이라고 안내를 받고서야, 비로소 귀앙의 예배(禮拜)를 드리고 마음이 그 상모(像貌)에 명합(冥合)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선각왕사의 진영도 또한 하나의 단청(丹靑)한 고물(故物)에 불과할 것이니, 누구인들 제대로 알 수 있으랴? 지선 등이 구구(區區)한 그 마음을 장래(將來)에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곳이 없다면서 그의 청탁함이 돈독하므로 부득이 사양하지 못하고 간략히 그 전말(顚末)을 서술하였으니, 후대에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꾸짖지 않는다면 다행이겠다. 그리고 진당을 건축하는 토목공사(土木工事)의 과정 등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상사(常事)이므로 기록하지 않는 바이다. 다음과 같이 진당시(眞堂詩)를 읊는다.
심심(甚深)하온 부처님의 묘(妙)한 법(法)이여!
그 정체는 유(有)도 무(無)도 아닐 것이다.
위대하신 우리 왕사 영정(影幀)이시여!
누가 감히 왕사 도덕 이길 것인가.
늠연(凜然)하고 탁월하신 왕사의 생애!
준수(俊秀)하온 왕사 모습 영정(影幀)에 담다.
먼 곳에서 찾아와서 예배(禮拜)하는 자(者)
왕사 육성(肉聲) 생생하게 듣는 듯하네!
추충보절 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한산군(韓山君) 영예문 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겸(兼)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이색(李穡)이 짓고,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 대광(大匡) 상당군(上黨君) 진현관(進賢館) 대제학(大提學) 신(臣::TEXT) 한수(韓脩)가 왕명을 받들어 쓰다.
창룡 기미년(우왕 5, 1379) 5월 15일
문인(門人) 각주(覺珠)·각성(覺惺)·각굉(覺宏)은 비석을 세우고 이인린(李仁鄰)은 글자를 새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