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覺王師之碑 (題額)
고려국(高麗國) 왕사(王師)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근수본지(勤脩本智) 중흥조풍(重興祖風) 복국우세(福國祐世) 보제존자(普濟尊者) 시선(諡禪) 각(覺) 탑명(塔銘)과 아울러 서문
1
전조열대부(前朝列大夫)
2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3 좌우사랑중(左右司郞中)
4 추충보절
5동덕찬화공신
6(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 중대광(重大匡)
7 한산군(韓山君)
8 예문관
9사(藝文館事) 겸성균
10대사성
11(兼成均大司成 ) 신(臣) 이색(李穡)
12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
13 광정대부(匡靖大夫)
14 정당문학(政堂文學)
15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16 상호군(上護軍)
17 제점(提點)
18 서운관
19사(書雲觀事) 신(臣) 권중화(權仲和)
20는 교지(敎旨)에 따라 단사(丹砂)로 전액(篆額)과 글씨를 쓰다
21
현릉(玄陵)
22께서 재위(在位)한 지 20년만인
23 경술(庚戌) 9월 10일 스님을 개경(開京)으로 영입(迎入)하여
24, 16일에 스님이 주석하는 광명사(廣明寺)
25에서 양종(兩宗) 오교(五敎)에 속한 제산(諸山)의 납자(衲子)들이 스스로 얻은 바를 시험하는 공부선(功夫選) 고시장을 열었는데 스님도 나아갔으며
26, 임금께서도 친히 행차(幸次)하여 지켜 보았다.
27 스님은 염향(拈香)을 마친 다음 법상(法床)에 올라 앉아 말씀하기를 “금고(古今)의 과구(窠臼)
28를 타파하고, 범성(凡聖)의 종유(蹤由)
29를 모두 쓸어버렸다. 납자의 명근(命根)을 베어버리고, 중생의 의망(疑網::TEXT)을 함께 떨쳐 버렸다. 조종(操縱)하는 힘은 스승의 손아귀에 있고
30, 변통(變通)하는 수행은 중생의 근기(根機)에 있다.
31 삼세(三世)의 부처님과 역대(歷代)의 조사(祖師)가 교화 방법은 동일한 것이니, 이 고시장에 모인 모든 스님들은 바라건대 사실대로 질문에 대답하시오”라 하였다. 이에 모두 차례로 들어가 대답하되 긴장된 모습으로 몸을 구부려 떨면서 진땀을 흘렸다.
32 그러나 모든 응시자의 대답은 맞지 아니하였다. 혹자는 리(理)에는 통하였으나 사(事)에는 걸리고, 어떤 이는 중언부언 횡설수설하다가
33 일구(一句)의 질문에 문득 물러가기도 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본 공민왕의 얼굴 빛이 언짢은 듯이 보였다.
34 환암혼수선사(幻庵混脩禪師)
35가 최후에 와서 삼구(三句)
36와 삼관(三關)
37에 대하여 낱낱이 문답하였다.
38
이 공부선(功夫禪) 고시(考試)가 끝나고 스님은 회암사(檜嵒寺)로 돌아갔다. 신해년(辛亥年)
39 8월 26일 공부
40상서
41(工部尙書)인 장자온(張子溫)
42을 파견하여 친서(親書)와 직인과 법복과 발우(鉢盂) 등을 보내어 “왕사(王師)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근수본지(勤脩本智) 중흥조풍(重興祖風) 복국우세(福國祐世)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법칭(法稱)과 함께 왕사로 책봉하였다. 이어 송광사(松廣寺)
43는 동방(東方) 제일의 도량이므로 왕명으로 거주토록 하였다.
임자년(壬子年)
44 가을에는 지공(指空)스님이 지시한 “삼산양수지간(三山兩水之間)”에서 주석하라는 기별(記莂)
45이 우연히 생각나서 곧 회암사(檜嵒寺)로 이석(移錫)하려 하였는데, 때마침 왕의 부름을 받아 회암사 법회(法會)에 나아갔다가 여기에 주거(住居)해 달라는 청을 받았다. 스님이 이르기를 “선사(先師)인 지공스님께서 일찍이 이 절을 중창하려고 계획하였는데
46 병화(兵火)로 불타버렸으니
47 감히 그 뜻을 계승하지 않겠는가?” 하고, 이에 대중 스님과 협의하여 전당(殿堂)을 확장하여 공사(工事)가 모두 끝나고 병진년(丙辰年)
48 4월
49에 크게 낙성법회(落成法會)를 열어 회향하였다. 이 때 대평(臺評)
50이 유생(儒生)의 입장에서 불교의 왕성(旺盛)함을 시기하여 말하기를 “회암사는 서울과 매우 가까운 거리이므로
51 청신사(淸信士)와 청신녀(淸信女)들의
52 오고 감이 계속 이어져 밤낮으로 왕래가 끊이지 않아
53 혹은 지나치게 맹신(盲信)하여 생업(生業)을 폐하는 지경에 이르니 금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54”라 하였다. 이에 교지(敎旨)를 내려 나옹스님을 서울과 멀고 벽지(僻地)인 형원사(瑩原寺)
55로 이주(移住)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출발을 재촉하여 가던 도중에
56 스님이 마침 발병(發病)하였다. 출발 당시 가마가
57 열반문(涅槃門)
58을 통과할 때 모든 대중(大衆)이 무슨 이유인지를 의심하면서 실성 통곡하므로, 스님께서 그들을 돌아보시고 말하기를 “노력하고 또 거듭 노력하여 나로 인하여 슬픔에 잠겨 중도에 그만두는 일이 없도록 하라.
59 나는 가다가 마땅히 여흥(驪興)
60에서 그칠 뿐이다”라고 하였다. 한강(漢江)에 이르러
61 호송관(護送官)인 탁첨(卓詹)
62에게 이르기를 “내 병세가 심하니 뱃길로 가자” 하여 배(주(舟))로 바꾸어 타고 7일간 소류(遡流)하여
63 여흥에 이르렀다. 이 때 또 탁첨에게 부탁하기를 “몇일만 머물러 병을 조리하고 떠나자”고 하니 탁첨이 그 뜻을 받아들였다. 신륵사(神勒寺)
64에서 머물고 있는데 5월 15일에 탁첨이 또 출발하기를 독촉하므로
65 스님께서 이르기를 “그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곧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라 하고, 이 날 진시(辰時)에 조용히 입적(入寂)하였다. 군민(郡民)들이 바라보니 오색(五色) 구름이 산정(山頂)
66 에 덮여 있었다.
화장(火葬)이 끝나고
67 타다 남은 유골을 씻으려는 순간
68, 구름 한 점 없는 청천(靑天)에서 사방 수백보(數百步)의 이내에만 비가 내렸다.
69 사리(舍利)가 155과가 나왔다. 기도하니 558과로 분신(分身)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재 속에서도 얻어 개인이 스스로 비장(秘藏)한 것도 부지기수였으며, 3일 간 신광(神光)이 비추었다. 석달여(釋達如)
70 스님은 꿈에 화장장 소대(燒臺) 밑에 서려 있는 용을 보았는데, 그 모양이 마치 말(馬)과도 같았다. 상주(喪主)를 태운 배
71가 회암사(檜嵒寺)로 돌아오는데
72, 비가 내리지 않았는 데도 갑자기 물이 불어났으니, 이 모두가 여룡(驪龍)의 도움이라 했다. 8월 15일에 부도(浮圖)를 회암사 북쪽 언덕에 세우고,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신륵사에 조장(厝藏)하였으니, 열반한 곳임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이 사리를 밑에 모시고 그 위에 석종(石鐘)으로서 덮었으니, 감히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게 함이다. 스님이 입적한 사실을 조정(朝廷)에 보고하니 시호를 선각(禪覺)이라 추증하고, 신(臣) 색(穡)에게는 비문(碑文)을 짓고 신(臣) 중화(仲和)로 하여금 단사(丹砂)로 비문과 전액(篆額)을 쓰게 하였다.
73
신(臣)이 삼가 스님의 행적을 살펴보니
74, 휘는 혜근(惠勤)이고 호는 나옹(懶翁)이며 처음 이름은 원혜(元惠)였다. 세수는 57년을 살았고 법랍은 38하였다.
75 고향은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寧海)이며
76, 속성은 아씨(牙氏)
77이다. 아버지의 휘는 서구(瑞俱)이니 벼슬은 선관령(膳官令)
78을 지냈다.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니 영산군(靈山郡) 사람이다. 어머니 정씨가 꿈에 금색(金色) 새가 날아와 그의 머리를 쪼다가 오색(五色)이 찬란한 알을 떨어뜨려 가슴으로 들어오는 태몽(胎夢)을 꾸고, 임신하여 연우(延祐) 경신년(庚申年)
79 1월 15일에 탄생하였다. 나이
80 겨우 20살 때
81 이웃에 사는 친한 벗이 사망하므로, 슬픔에 잠겨 부로(父老)
82들에게 묻기를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83” 하니, 모두 말하되 “어느 곳으로 가는지 알 수 없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가슴이 답답하여 슬픔만 더하였다. 그리하여 그 길로 공덕산(功德山) 대승사(大乘寺) 묘적암(妙寂庵)으로 달려가
84 요연선사(了然禪師)
85에게 몸을 던져 삭발하고 사미계를 받았다. 요연선사가 이르되 “너는 무슨 목적으로 출가(出家)하였는가”라 하니, 대답하기를 “삼계(三界)를 초월하여 생사(生死)를 해탈(解脫)하고, 중생을 이익(利益)케 하고자 함입니다”라 하고 또 스님의 지도를 청하였다. 스님이 말하기를 “네가 여기에 온 정체가 무슨 물건인가”라 하니, 대답하기를 “능히 말하고 능히 듣고 능히 여기까지 찾아온 바로 그 놈입니다. 다만 닦아 나아갈 방법을 알지 못하나이다”라 하였다. 요연(了然)스님이 말씀하되 “나도 너와 같아서 아직 알지 못하니, 다른 명안종사(明眼宗師)를 찾아가서 묻고 배우라”고 하였다.
지정(至正) 갑신년(甲申年)
86에 회암사로 가서 주야로 홀로 앉아 정진하다가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이로 말미암아 중국에 가서 선지식을 참방(參訪)하고 유학할 뜻을 굳히고, 출국하여 무자년(戊子年)
87 3월
88 연도(燕都)
89에 도착하여 지공(指空)스님을 참방하고 법(法)을 물었는데 서로간의 문답이 계합(契合)하였다. 10년 경인(庚寅)
90 정월(正月)
91에 지공스님이 대중을 모아놓고 법어(法語)를 내리니 아무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으나, 혜근(惠勤)이 대중 앞에 나와서 몇 마디의 소견(所見)을 토출(吐出)한 다음, 삼배(三拜)하고 물러나왔다. 지공은 서천(西天)의 백팔대(百八代) 조사(祖師)이다. 그 해 봄에는 남쪽으로 강절(江浙)
92 지방을 두루 순례하고 8월에는 평산처림(平山處林)을 친견하였더니
93, 평산(平山)
94이 묻기를 “나에게 오기 전에 누구를 친견하였는가”라 하니, 대답하되 “서천의 지공스님을 만나 뵈었는데 일용천검(日用千劒)하라 하더이다”라 하였다. 평산이 이르기를 “지공천검(指空千劒)은 그만두고 너의 일검(一劒)을 한 번 보여 보아라”고 하였다. 혜근이 좌구(坐具)로 평산을 덮여 씌워 끌어 당겼다. 평산은 선상(禪床)에 거꾸러져서 “도적이 나를 죽인다”라고 고함을 질렀다. 혜근이 이르되 “나의 이 칼은 능히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또한 능히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라고 하면서 평산을 붙들어 일으켰다. 이 때 평산은 설암(雪嵒)
95이 전수(傳授)한 급암종신(及庵宗信)의 법의(法衣)와 불자(拂子)를 신물(信物)로 주었다.
신묘년(辛卯年)
96 봄에는 보타낙가산(寶陁洛迦山)에 이르러 관세음보살상에 예배하고, 임진년(壬辰年)
97에는 복룡산(伏龍山)에 이르러 천암(千嵒)스님을 친견하였다. 천암은 그 때 마침 일천여명의 납자(衲子)를 모아 놓고 입실(入室) 자격고시(資格考試)를 열고 있었다. 이 때 천암이 혜근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혜근이 대답하니, 천암이 이르기를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기 전에는 어느 곳에서 왔는가?” 하니, 혜근이 이르되 “오늘은 4월 2일입니다”라 하니, 천암이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 해에 북방(北方)으로 돌아가서 연도(燕都) 법원사(法源寺)에 있는 지공스님을 두 번째로 친견하였다. 이 때 지공은 법의와 불자와 범서(梵書)를 신물로 전해 주었다. 이에 다시 연대(燕代)의 산천(山川)을 두루 돌아 보았으니, 소연(蕭然)한 한 한가로운 도인(道人)으로써 그 이름이 원조(元朝)의 궁내(宮內)에까지 들렸다. 을미년(乙未年)
98 가을에는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명을 받들어
99 대도(大都)
100의 광제사(廣濟寺)
101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병신년(丙申年)
102 10월 15일 지공(指空)으로부터 수법(受法)한 기념법회(紀念法會)를 가졌는데, 순제는 원사(院使)
103를 보내어 축하하였고, 야선첩목아(也先帖木兒)
104는 금란가사(金襴袈裟)와 폐백(幣帛)을 하사하였으며, 황태자(皇太子)
105도 금란가사와 상아불자(象牙拂子)를 가지고 와서 선사하였다.
106 혜근스님이 가사 등의 선물을 받고 대중에게 묻기를 “담연공적(湛然空寂)하여 본래부터 일물(一物)도 없는 것이다. 이 가사의 휘황하고 찬란함이여! 이것이 어디로부터 나왔는가” 하니, 이에 대하여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스님께서 천천히 말씀하시기를 “구중궁(九重宮)
107 금구
108중(金口中)에서 나왔느니라” 하고, 곧 가사를 입고 염향(拈香)하고 성복(聖福)을 축원한 다음 법상(法床)에 올라 앉아 주장자(柱杖子)를 가로 잡고 몇 말씀 하고 곧 내려왔다.
무술년(戊戌年)
109 봄에는 지공스님을 하직하고
110 기별(記莂)을 받아
111 귀국길에 올라 동쪽으로 돌아오는 도중 머물기도 하고 계속 오기도 하면서
112 청중의 근기(根機)에 맞추어 설법해 주었다. 귀국한 후 경자년(庚子年)
113에는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거주하였다.
신축년(辛丑年)
114 겨울에는 공민왕이 내첨사(內詹事)
115 방절(方節)
116을 보내어 스님을 개경(開京)으로 영입하여 법문을 청해 듣고 만수가사(滿繡袈裟)와 수정불자(水精拂子)를 하사하였고, 공주(公主)
117는 마노불자(瑪瑙拂子)를 헌납하였으며, 태후(太后)
118도 직접 찾아와서 포시(布施)를 하였다. 임금께서 신광사(神光寺)
119에 주지하도록 청하였으나, 스님은 이를 사양하였다. 이 때 임금께서도 매우 섭섭하여 실망 끝에 말하기를 “이젠 불법(佛法)에 손을 떼겠습니다”라고 하므로
120, 부득이 신광사로 가게 되었다. 11월에 이르러 홍건적(紅巾賊)
121이 침입하여 경기(京畿)
122 지방을 유린하였으므로 거국적(擧國的)으로 국민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스님들도 공포에 휩싸여 스님께 피난을 떠나시라 간청하였다. 스님께서 말하기를 “오직 생명은 이미 정해져 있거늘 적(賊)들이 어찌 침해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요지부동하였다. 수일 후 피난을 떠나시라고 간청함이 더욱 화급(火急)하였다. 이 날 밤 꿈에 한 신인(神人)을 보았는데, 얼굴에 검은 반점
123이 있었다. 의관(衣冠)을 갖추고 스님께 절을 올리고 고하기를 “만약 대중이 절을 비우고 떠나면 적들이 반드시 절을 없애버릴 것이오니, 원컨대 스님의 뜻을 고수(固守)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다음 날 토지신장(土地神將)
124의 탱화를 보니
125 그 얼굴에 검은 점이 있는 것이 꿈에 만난 신인과 같았다. 신인의 말대로 홍건적들은 과연 들어오지 아니하였다.
계묘년(癸卯年)
126에는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갔다.
127 공민왕께서 내시(內侍)인 김중손(金仲孫)을 파견하여 개성으로 돌아오도록 청했다. 그리하여 을사년(乙巳年) 3월
128 궁궐로 나아가서 있다가 퇴산(退山)을 간청하여 비로소 윤허(允許::TEXT)를 받아 용문(龍門)·원적(元寂) 등 여러 산을 순례하였다. 병오년(丙午年)
129에는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갔으며, 정미년(丁未年)
130 가을부터는 청평사(淸平寺)에 주석하였다. 그 해 겨울에는 보암(寶嵓)스님
131이 원(元)나라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편에 지공(指空)스님의 가사(袈裟)와 편지를 가지고 와서 스님에게 전달하면서 말하기를 “지공스님이 유언하신 내용이다
132”라고 하였다. 기유년(己酉年)
133에는 다시 오대산에 들어가 머물렀으며, 경술년(庚戌年)
134 봄에는 원나라 사도(司徒)인 달예(達睿)가 지공스님의 영골(靈骨)을 모시고 왔으므로 회암사에 조장(厝藏)하고 스님은 스승의 이 영골탑(靈骨塔)에 예배를 올렸다. 이어 왕의 부름을 받아 광명사(廣明寺)에서 여름 결제(結制)를 맺어 해제(解制)를 마치고 초가을에 회암사로 돌아와 9월에 공부선(功夫選) 고시를 베풀었다.
스님이 살던 거실(居室)을 강월헌(江月軒)이라 하였다. 스님은 평생에 걸쳐 세속문자(世俗文字)를 익히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어떤 선비이든 시(詩)를 음영(吟詠)하자고 청해오면
135 붓을 잡자마자 곧 시게(詩偈)를 읊고, 마음 속으로 깊이 구상하지 않으나 시가 담고 있는 내용은 심원(深遠)하였다. 만년(晩年)에는 묵화로 산수(山水) 그리기를 좋아하여 수도(修道)에 방해가 되는 일이라고 비평하는 사람도 있었다.
136 오호라! 도(道)가 이미 통달되었으면 다방면에 능한 것이 또한 마땅함이 아니겠는가! 신(臣) 색(穡)은 삼가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비명(碑銘)을 지었다. 명(銘)하여 이르되
살피건대 위대(偉大)하신 선각선사(禪覺禪師)여!
137
기린 뿔이 하나이듯 희귀(稀貴)하도다.
138
역대 임금 지극 정성 왕사(王師)로 모셔
인천중(人天衆)의 안목(眼目)이며 복전(福田)이로다. ①
천만납
139자(千萬衲子) 한결같이 귀의(歸依)하옴이
샛강물이 바다에로 모임과 같아
140
나옹(懶翁)스님 높은 경지(境地) 아는 이 없어
갈고 닦은 그 도덕(道德)은 깊고도 넓네. ②
스님께서 태어날 때 혁혁(赫赫)한 새 알
141
떨어뜨린 그 새 알이 회중(懷中)에 들다.
열반(涅槃) 때의 그 용마(龍馬)는 팔부(八部)인 천룡(天龍)!
142
입비사(立碑事)를 건의하여 윤허(允許)를 받다.
143 ③
신비하신 그 사리(舍利)는 백오십오과(百五十五粿)
기도(祈禱) 끝에 분신(分身)함은 오백오십팔(五百五十八)
144
여천(驪川) 강물 길고 넓어 도도히 흘러
145
천강(千江) 유수(流水) 천강월(千江月)의 밝은 달이여! ④
분신(分身)이신 그 보체(寶體)는 공색(空色)을 초월(超越)
하늘 높이 비춘 달이 물 속에 왔네!
높고 높은 스님의 덕(德) 헤일 수 없고
만고(萬古)토록 우뚝하게 불멸(不滅)하소서. ⑤
선광(宣光) 7년
146 6월 일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4】(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