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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륜묘지(金倫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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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묘지명은 이제현(李齊賢)의 문집 『익재난고(益齋亂藁)』권7과 『동문선(東文選)』권124에 실려 있으며, 1348년(충목 4)에 이제현이 작성하였다.
묘지명의 주인공 김륜(金倫, 1277~1348)의 자는 무기(無己), 호는 죽헌(竹軒) 또는 당촌(戇村)이다. 계림(雞林) 언양(彦陽;지금의 경남 울주군 언양면) 사람이다. 증조부는 취려(就礪), 조부는 전(佺), 아버지는 변(賆)이다. 어머니는 양천군대부인(陽川郡大夫人) 허씨이며, 공(珙)의 딸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김륜은 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 때 활동한 관료이다. 묘지명은 변정도감에서 노비 판정, 지방관으로서의 치적, 충혜왕을 위해 조적의 난 연루자를 치죄한 사실 등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김륜의 부인 최씨(崔氏)는 서(瑞)의 딸이다. 공보다 1년 먼저 죽었으며,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에 추증되었다. 7남 2녀를 낳았다. 가기(可器), 경직(敬直), 종훤(宗煊), 달잠(達岑), 숙명(淑明), 희조(希祖), 승구(承矩)이다. 딸 하나는 민사평(閔思平)에게, 하나는 김휘남(金輝南)에게 각각 시집갔다.
참고로 증조부 김취려, 아버지 김변과 그의 부인 허씨의 묘지명이 있다.
유원고려국 수성수의협찬보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언양부원군 정렬공 김공묘지명 병서(有元高麗國 輸誠守義協贊輔理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 彦陽府院君 贈謚貞烈公 金公墓誌銘 幷序)
공의 성은 김씨, 이름은 윤(倫), 자는 무기(無己), 호는 죽헌(竹軒) 또 다른 호는 당촌(戇村)이다. 계림(雞林) 언양(彦陽;지금의 경남 울주군 언양면) 사람이다. 증조부는 태사 문하시랑평장사(太師 門下侍郞平章事)이며 위열공(威烈公)으로 추증된 취려(就礪)이며, 조부는 태부 문하시랑평장사(太傅 門下侍郞平章事)로 익대공(翊戴公)으로 추증된 전(佺)이고, 아버지는 도첨의참리 집현전태학사 감수국사(都僉議參理 集賢殿太學士 監修國史)로 문신공(文愼公)으로 추증된 변(賆)이다. 어머니는 양천군 대부인(陽川郡 大夫人) 허씨이며, 첨의중찬 수문전태학사(僉議中贊 修文殿太學士)로 문경공(文敬公)으로 추증된 공(珙)의 딸이다. 지원(至元) 14년(1277, 충렬3) 6월 29일에 공을 낳았다.
27년 경인년(1290, 충렬16) 합단(哈丹)이 우리나라에 쳐들어오자 도읍을 강화(江華)로 옮겼다. 그때 (외할아버지인) 문경공이 수상으로 국인(國人)들의 뒤를 맡게 되어 공에게 가족을 이끌고 먼저 가게 하였다. 공은 나이 14세인데도 지도하고 계획하는 것이 어른과 같아서 온 가족이 그에게 의지하였다. 음직(蔭職)으로 노부판관(鹵簿判官)에 임명되었다가 전구승(典廐丞)으로 옮겼다. 별장을 거쳐 낭장(郎將)에 올랐다. 각각 견룡행수(牽龍行首)와 좌도지우중금(左都知右中禁)의 지유(指諭)가 되었다. 신호위호군 겸 감찰시승(神虎衛護軍 兼 監察侍丞)에 임명되었다. 여러 번 승진하여 헌부의랑 전부령 중문사 겸 사헌집의 제점전부 밀직우부승지(獻部議郞 典符令 中門使 兼 司憲執義 提點典符 密直右副承旨)가 되었다. 검교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로서 품계는 광정대부(匡靖大夫)가 되고, 외직으로 충주 수주(水州) 익주(益州)의 세 고을을 맡았다. 내직으로 돌아와서 각각 헌부(讞部)와 선부(選部)의 전서(典書)가 되었다. 경상전라(慶尙全羅)의 도순문사(都巡問使)로 합포를 다스렸고, 천의평리 상의회의도감사 삼사좌우사(僉議評理 商議會議都監事 三司左右使)가 더해졌다. 언양군(彦陽君)에 봉해졌고, 품계는 중대광(重大匡)이며, 추성찬리공신(推誠贊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또 도첨의찬성사 판판도사사(都僉議贊成事 判版圖司事)와 추성수의협찬공신(推誠守義協贊功臣)의 호가 더해졌다. 판좌정승(判左政丞)에 임명되었다 얼마 안 되어 퇴직하기를 원하자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고, 품계는 벽상삼한(壁上三韓), 공신호는 보리(輔理)의 두 글자가 더해졌다. 이상이 벼슬을 역임했던 대략이다.
공이 호군(護軍)일때 충정공(忠正公) 홍자번(洪子藩)의 천거로 변정도감부사(辨正都監副使)가 되었다. 권세가(巨室)가 시골 백성과 한 여종(女奴)을 두고 다투었는데, 여종의 자손이 1백 명이나 되었다. 공이 그 문서를 보고 “이것은 아무개 왕 때 아무개 재상이 아무 해에 여러 아들과 함께 만든 문서로 시간이 꽤 되었다. 여종의 아들과 손자의 연령을 따져 선후를 비교하여 보면 서로 다르고 여종 이름의 한 글자가 희미하니, 이것은 어찌 “어(魚)”자를 “노(魯)”자로 고친 것이 아닌가? 아무개 재상의 여러 아들은 모두 후손이 있으니, 집집마다 문서 한권씩을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 그 차이를 살펴야 하지 않는가” 라고 말하였다. 공의 말과 같이 하려 하자 권세가(巨室)가 드디어 굴복하였다. 공이 시승(侍丞)이 되었을 때 갑 아무개와 을 아무개가 집안의 노비(家口)를 다투었는데, 을이 말하기를, “선대에 대각(臺閣)에 소송하였습니다. 당시 대각의 장(知臺)은 성이 허씨이고 이름은 잊었습니다. 분별하여 명확히 나누어 주었는데, 갑이 얻은 노비는 죽어버리고 후손이 없으나, 을이 얻은 가구는 다행히 번식하였습니다. 그런데 화재로 문서를 잃어버리자, 갑은 화재를 다행으로 여겨 을을 무고하여 노비를 빼앗으려 합니다” 하였다. 공이 가만히 세월을 계산하고 말하기를, “이른바 허지대(許知臺)는 바로 우리 집안의 문경공(文敬公)이구나” 하고, 관리에게 당시 문서를 조사하게 하니 나누어 준 가구의 이름과 수효가 함께 보존되어 있었다. 그것으로 갑에게 힐문하니 갑이 굴복하였다. 공의 일에 대한 정밀함과 자세함이 이와 같은 것이 많았다.
어떤 내신(內臣)이 감정을 품고 5품 낭관(郎官)을 전문(殿門)에서 구타하자, 공이 매우 준엄하게 탄핵하고 아울러 증인이 사실대로 말하지 아니하고 내신을 두둔하는 것을 탄핵하였다. 내신은 임금의 총애를 받고 증인도 관직이 높고 가문이 힘이 있어 공을 배격하여 지방관으로 좌천시켰다. 그때 궁실과 사원을 크게 수리하였는데, 백성을 모아 사역시키기 위해 사신이 지방으로 빈번히 왕래하였다. 그러나 모두 공을 꺼려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감히 공이 있는 고을로 들어오지 않아, 고을 사람들이 이 때문에 편안하였다.
공이 합포(合浦)를 다스릴 때 군장(軍將)들이 급한 일로 사사로이 백성을 괴롭히지 못하였고, 주와 군의 수령들도 사사로운 감정으로 향리들을 함부로 다루지 못하였다. 원나라 사신이 군졸과 수레가 엄숙하고 호령이 엄한 것을 보고서 공을 공경하였다. 그와 함께 사냥을 할 때 좌우로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면 반드시 맞히니 또한 즐거워하였다. 가는 곳마다 칭찬하는 말이 입으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이 일찍이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을 때 충선왕이 날마다 저택에 와서 안부를 물었다. 모시는 신하들은 물러가기를 생각하였으나, 공은 여러 가지 책임을 겸하고 왕의 좌우에서 모셨으므로, 충렬왕이 그 뜻을 가상하게 여겼고 충선왕도 또한 예로써 대우하였다.
의릉(毅陵;충렬왕의 묘호)이 원나라 수도에 억류된 지 5년에, 심왕(瀋王)이 천자에게 총애를 얻게 되자 여러 불령한 무리들이 나라사람을 위협하고 꾀어 “심왕으로 임금 삼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자, 공과 동생인 원윤(元尹) 우(禑)만이 거기에 서명하지 않았다. 어떤 이가 공에게 사사로이 말하기를, “중의를 어기고 스스로 달리 하다가 후회하게 되면 어찌 하겠는가” 하니, 공이 꾸짖기를, “신하로서 두 마음을 가지지 않는 것이 직분이다. 무슨 후회가 있겠는가” 하였다. 조적(曹頔)이 난을 일으켰다가 목이 베이자, 영릉(永陵;충혜왕의 묘호)이 공에게 명하여 그 도당을 순군만호에서 신문하게 했다. 모든 관원들이 역적을 따른 것을 미워하여 심하게 고문하면서 통렬히 다스리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조적의 선동에 빠져 그렇게 된 것인데, 어찌 족히 책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들이 살이나 뼈를 다치게 하면 반드시 ‘내가 법을 굽혀 강제로 굴복시켜 조정을 속인다’ 고 할 것이다” 하고 이에 그 형을 늦추자 죄수들이 감동하여 기꺼이 그들의 죄를 숨김없이 자백하였다. 영릉이 황제의 부름을 받고 길에서 공을 불러 함께 가자고 하니, 공이 60세가 지났으나 왕명을 듣고 달려가서 수일 만에 압록강에서 만났다. 원나라 수도에 도착하니 승상(丞相) 백안(伯顔)이 황제에게 아뢰어, 오부관(五部官)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로 심문하게 하면서 조적의 무리를 힘써 도왔다. 조적의 무리에 말 잘하는 무리가 많았으나, 공이 한마디로 결단하매 말의 이치가 간명하고 정직하였다. 오부관들이 경의를 표하면서 “백발재상(白鬚宰相)”이라 하였다.
영릉이 석방되어 우리나라로 돌아와 복위한 지 4년 동안에 소인들이 얽어낸 참소가 수없이 많았다. 천자가 옷과 술을 하사하였는데 농보(籠普)가 가지고 왔다. 이어 타적(朶赤)을 보내어 덕음(德音)을 반포하게 하였다. 왕이 나아가 맞으려 하니 타적이 칼날을 들이대고 왕을 잡아 말에 싣고 달려갔다. 공이 그때 집에 있다가 갑자기 변이 일어났음을 듣고, 달려가 문안드리지 못한 것을 통탄하였다. 농보에게 가서 또 의리로써 감동시키지 못할 것을 알고, 돌아와서 재상들과 함께 원나라 조정에 애걸할 것을 말하니, 모두들, “배신(陪臣)으로 천자의 위엄을 범하면 큰 꾸짖음이 있을까 두렵다” 하였다. 공이 그들을 꾸짖으며, “임금과 신하는 부자(父子)와 같다. 아들이 아버지를 구하는데 누가 죄를 주겠는가? 죄가 두려워 아버지를 구하지 않는다면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비로소 상서(上書)할 것을 의논하였으나 끝내 못하고 말았으므로, 공은 종신토록 분통함이 말과 얼굴빛에 드러났다. 덕령공주(德寧公主)가 뒤를 이을 국왕과 함께 공을 방문하여 시호를 정하는 일에 대하여 물었다. 공이 말하기를, “선왕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은 한갓 소인을 가까이 하여 원망을 사고 덕을 더럽힌 때문인데, 이제껏 화를 일으킨 장본인이 아직 살아 있으니, 반드시 먼저 그 죄를 바르게 하여 선왕이 죄가 없다는 것을 밝힌 뒤에 시호를 청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죄악을 낱낱이 가려 올리자 두 분(兩宮;공주와 국왕)이 감격하고 뉘우쳐 원나라에 그 사실을 올렸다. 공에게 정삭(正朔)을 고치고 시호를 청하는 두 표문을 주어 원나라에 가서 아뢰게 하였다. 공은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신은 상유(桑楡)의 나이1)가 다 된 72세입니다. 길에서 쓰러져 밝은 명령을 욕되게 할까 두려우나, 죽기 전에는 감히 힘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물러와서 행장을 챙겨 곧 출발하려는데, 수일 만에 갑자기 풍질(風疾)에 걸려 10일간이나 음식을 먹지 못하였다. 좌우로 하여금 부축하여 일으키게 하고서 의관을 갖춘 다음 단정히 앉아 서거하였다. 지정(至正) 8년 무자년(1348, 충목4) 2월 2일이었다. 부음을 왕에게 아뢰자 3일간 조회(朝會)를 철폐하고 관에서 장사를 도왔다. 정렬공(貞烈公)으로 추증되었다. 2월 24일에 대덕산(大德山) 감응사(感應寺) 동남쪽 언덕에 하관하여 문신공(文愼公)의 무덤 곁에 부장하였다. 유언에 따른 것이다.
공은 책읽기를 좋아하여 전고(典故)를 많이 알아, 사람들이 물으면 대답하는데 의심이 없었다. 종족(宗族)과 인척에게는 인후하고 친구에게는 신의가 있었으며, 그들이 찾아오면 반드시 술자리를 마련하여 종일토록 즐겼다. 병이 들었다는 말을 들으면 그때마다 약을 사가지고 찾아가 보았다. 진실하고 정성스럽기는 한나라의 관리와 같았으나 악을 미워하고 선을 가상히 여기는 데에는 공정하여 친소를 가리지 않았고, 도량이 넓고 활달하기는 진(晉)나라의 선비와 같았다. 임금을 사랑하고 백성을 걱정하기를 간절히 하여 평시에나 위태로울 때나 변함이 없었다. 어진 사람은 그의 행실을 사모하고 불초한 사람은 그의 의로움을 두려워하였다. 거리의 아동과 부녀들도 죽헌(竹軒)이라 칭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가 공이라는 사실을 알 정도였다.
부인은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최서(崔瑞)의 딸이다. 공보다 1년 먼저 죽었으며,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으로 추증되었다. 7남 2녀를 낳았다. 가기(可器)는 판도총랑 김해부사(判圖摠郞 金海府使)로 먼저 죽었다. 경직(敬直)은 중대광 양성군(重大匡 陽城君)이다. 종훤(宗煊)은 출가하여 화엄의 승려(華嚴師)가 되었고, 달잠(達岑) 역시 출가하여 선사(禪師)가 되었다. 숙명(淑明)은 개성판관이고, 희조(希祖)는 전리판서 예문제학이고, 승구(承矩)는 통예문부사(通禮文副使)이다. 딸 하나는 여흥군(驪興君) 민사평(閔思平)에게 출가하였고, 하나는 종부령(宗簿令) 김휘남(金輝南)에게 출가하였으나 먼저 죽었다. (둘째 사위) 휘남은 화평(化平 : 현재의 광주광역시 광산지역임)사람으로 공과 같은 김씨가 아니다. 서출(庶出)의 아들은 예적(穢迹)이고 두 딸은 출가하지 않았다.
공이 나를 알아주어서 공과 시를 짓는 벗(詩友)이 되었고, (여섯째 아들) 희조는 나의 사위이다. 그가 공의 묘지명을 청하였다. 의리를 저버릴 수 없어, 집의(執義) 이달충(李達衷)이 지은 행장에 근거하여 바로잡아 서문을 쓰고 이어 사(辭)를 지었다.
아! 풍속과 교화(風敎)가 세속을 아름답게 함이여!
강한 것을 부드럽게 하고 모난 것을 원만하게 하였도다.
솥으로 수레를 괼지언정 솥에 고기를 삶는 일을 숭상하지 않았고2)
해진 관(冠)으로 신창을 만들지언정 해짐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3)
진실하구나. 정렬공이여,
온화하면서도 힘쓰며 의젓하면서도 화합하구나.
추운 겨울의 송백(松栢)과 같고,4) 거센 물결의 돌기둥(砥柱)5) 같도다.
영달하면 따르려 하고 어려우면 물리침이여
혼자만은 신의를 두터이 하였다.
손해가 있으면 피하고 이익이 있으면 따름이여
혼자만은 충성을 온전히 하였도다.
백성이 교화되기를 바람이여
내 몸에 있은 다음에 할 뿐만이 아니었다.
어찌 등용되어 백성에게 혜택을 주다가 곧 헌신 벗어 버리듯 하였는가?
비록 일을 사절하고 은거하였으나
어찌 한 술의 밥을 먹을 동안에도 우리 임금을 잊으랴!
진심을 다하여 나라의 부끄러움을 씻어 버리는데 진심을 다하였도다.
백성의 해로움을 제거하는데 분주하였도다.
아! 공과 같은 사람은 마땅히 옛사람 가운데에서 찾아볼지어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