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증된 시호가 문정공(文正公)인 권씨(權氏) 묘명(墓銘)
추성익조동덕보리공신 삼중대광 수문전대제학 영도첨의사사사 영가부원군(推誠翊祚同德輔理功臣 三重大匡 脩文殿大提學 領都僉議使司事 永嘉府院君)이며 추증된 시호가 문정공(文正公)인 권공(權公) 묘지명 및 서문
사위 추성양절좌리공신 삼중대광 김해부원군 영예문춘추관사(推誠良節佐理功臣 三重大匡 金海府院君 領藝文春秋館事) 이제현(李齊賢)이 짓고, 증손 선무장군 합포등처 진변만호부만호 중대광 현성군(宣武將軍 合浦等處 鎭邊萬戶府萬戶 重大匡 玄成君) 권용(權鏞)이 글씨와 전액(篆額)을 씀.
대덕(大德)
1 신축년(충렬 27, 1301)에 국재(菊齋) 권문정공(權文正公)이 과거[春官]를 맡았을 때에 제현(齊賢)이 다행히 병제(丙第)에 합격하였다.
2 공이 딸을 나의 처로 삼게 하였는데, 스승으로 섬긴 것이 47년이나 되었다. 지정(至正)
3 병술년(충목 2, 1346)에 공의 나이 85세이었다. 그 해 가을에 병이 들어 겨울 10월 기사일에 좌우에 명하여 안아 일으키게 하고, 단정히 앉아서 세상을 떠나니 제현이 가서 조문하고 통곡하였다. 그 뒤 며칠이 지나자 여러 아들들이 울면서 말하였다. “앞서 그대가 우리 대부인(大夫人)을 위해 묘지명을 지었습니다. 이제 대인(大人)이 세상을 떠났으니 오는 10월 정유일에 덕수현(德水縣)
4 발송(鉢松) 언덕에 합장(合葬)하려고 하는데, 유택[幽堂]을 빛내려는 일을 또 그대가 아니면 누구에게 부탁하겠습니까” 이에 물러나 다음과 같이 적는다.
공은 길창
5 권씨(吉昌 權氏)로 이름은 영(永)이고, 자는 기경(耆卿)인데, 뒤에 이름은 부(溥)로, 자는 제만(齊萬)으로 고쳤다. 증조 수평(守平)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이고, 조부 위(韙)는 한림학사(翰林學士)이다. 아버지 단(㫜)은 찬성사 판전리(贊成事 判典理)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였는데 시호는 문청공(文淸公)이며, 어머니 노씨(盧氏)는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연(演)의 딸이다.
공은 15세에 진사(進士)에 뽑히고
6, 기묘년(충렬 5, 1279)의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7, 염전시(簾前試)에 합격하였다.
8 첨사부녹사(詹事府錄事)가 되었다가 국학학유(國學學諭)로 옮기고, 박사(博士)로 바뀌었다가 우정언(右正言)에 임명되었다. 여러 차례 옮겨 첨의사인(僉議舍人)에 이르고, 또 여러 차례 바뀌어 사림학사 비서감(詞林學士 秘書監)에 이르렀다. 우부승지 판예빈시사(右副承旨 判禮賓寺事)로 옮겼다가 밀직(密直)에 들어와 학사(學士)가 되었으며, 판사사(判司事)에 이르렀다. 도첨의(都僉議)로 옮기고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가 드디어 정승인 판선부사(判選部事)에 임명되고, 수문전대제학 영도첨의사사사(脩文殿大提學 領都僉議使司事)를 더하였다. 품계는 승사랑(升仕郞)으로부터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고, 관직(館職)은 지제고(知制誥)로부터 대우문 감춘추(大右文 監春秋)에 이르렀으며, 작(爵)은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이고, 호는 추성익조동덕보리공신(推誠翊祚同德輔理功臣)이라고 하였다. 또 일찍이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원외랑(員外郞)과 낭중(郎中), 왕부단사관(王府斷事官)이 되었는데, 한 번도 외직에 보임되거나 한 차례도 탄핵(彈劾)을 당한 일이 없으니, 이것이 무릇 공의 경력이다.
<뒷면>
부인은 정신공(貞愼公) 유승(柳陞)의 맏딸인데, 변국(卞國, 卞韓國大夫人)에 봉해졌다. 아들 다섯을 낳으니, 준(準), 종정(宗頂), 고(皐), 후(煦), 겸(謙)이다. 준은 길창(吉昌), 후는 계림(鷄林), 겸은 복안(福安)으로 봉해졌으니, 모두 부원군(府院君)이다. 고는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 문화군(文化君)이며, 종정은 출가하여 양가도총섭(兩街都摠攝)이 되었는데 역시 광복군(廣福君)에 봉해졌다. 맏딸은 대언(代言) 안유충(安惟忠)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딸은 부원군(府院君) 이제현(李齊賢)에게 출가하였다. 셋째 딸은 순정대군(順正大君) 숙(璹)에게 출가하였으며, 넷째 딸은 회안대군(淮安大君) 순(珣)에게 출가하였는데, 모두 왕씨(王氏)이다. 한 집안에 군(君)으로 봉해진 사람이 아홉 명이나 되니, 옛날에도 없던 일이다.
문청공(文淸公, 權㫜)은 나이가 많으면서도 건강하였다. 공은 과거[貢擧]를 맡았는데
9, 공이 총재(冢宰)로 은퇴할 때는 길창(吉昌)이 문생(門生)을 데리고 와서 장수를 빌었다. 공의 두 문생과 문생의 세 번째 문생이 서로 잇달아 과거를 주관하였으니, 또한 훌륭한 일이라고 이를 만하다.
먼 조상인 태사(太師) 김행(金幸)이 태조(太祖)를 도와 공이 있어서 성(姓)을 권(權)으로 정해주었는데,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전하여 문청에 이르렀다. (공이) 복령사(福靈寺)의 수월보살상(水月菩薩像)에게 빌어서 중통(中統) 원(元) 세조(世祖)의 연호(1260~1263).
3년(원종 3, 1262, 임술년) 11월[仲冬] 11일 해가 저녁[晡]이 될 무렵에 공을 낳았는데, 무자(戊子)와 기미(己未)는 임사(壬巳)의 복[祿]을 뒤에서 밀어주면서 서로 부딪치며 일어나니, 천기(天機)의 묘함이 이와 같았다.
10
공은 따사롭기가 봄바람 같고 고요하기가 갠 하늘과 같았다. 공경으로 임금을 섬기고, 정성으로 부모를 모셨으며, 동료와 벗에게 화목하고 친척에게 자혜로웠다. 여색[粉黛]을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재물은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나이가 들었어도 비록 아들과 조카뻘일지라도 귀한 손님처럼 대하였고, 벼슬이 높아졌으나 비록 하인일지라도 높은 사람처럼 대해 주었다. 항상 글 읽기를 좋아하여 늙도록 쉬지 않았으며, 『은대시(銀臺詩)』20권
11에 주석을 달았는데 본 사람들이 그 해박함에 탄복하였다. 시문(詩文)을 짓는 데에도 간결하면서도 깨우치는 뜻이 있으므로, 묵헌(黙軒) 민지(閔漬)와 신재(信齋) 홍혁(洪革)이 항상 무릎을 치며 탄복하여 칭찬하였으나, 이러한 일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았다. 정방(政房)의 임무에 종사한 것이 13년이고, 재상의 지위에 22년이나 있었지만, 이 일로 스스로 만족해하지 않았다. 대개 순박하고 인정이 많으며, 신중하기가 만석군(萬石君)
12과 같고 공의 청렴하기는 노회신(盧懷愼)
13과 같았으니, 오복(五福)
14을 누리는 것은 또한 당연하지 않겠는가.
명(銘)하여 이른다.
권씨의 계보는 김씨에서 나왔으니 실로 계림(鷄林)에서 비롯되고, 대대로 덕스러운 명성을 이어 오도다. (첫째)
장인(丈人)이 이어 받으니 도의가 넉넉하고, 하늘은 부귀와 수(壽)를 주었도다. (둘째)
늘 마음을 공정하게 생각하고 늘 행동을 공정하게 실천하니, 남겨진 복도 더욱 많으리. (셋째)
끊이지 않고 구름같이 많은 자손이 모두 복록(福祿)을 다하리니, 무엇이 의심스러워 점을 쳐 볼 것인가. (넷째)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