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묘지명은 원석이 현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고, 이제현의 문집인 『익재난고』 7과 『동문선』 124에도 글이 실려 있다. 이 글들은 거의 비슷한데, 원석의 명문을 위주로 하여 번역하되 서로 차이가 나는 곳은 각주로 설명하기로 한다.)
최 양경공(崔 良敬公) 묘명(墓銘)<題額>
원 고려국 광정대부 도첨의참리 상호군(有元 高麗國 匡靖大夫 都僉議叅理 上護軍) 춘헌선생(春軒先生) 최양경공(崔良敬公) 묘지명 및 서문
추성양절좌리공신 삼중대광 김해부원군 영예문관 효사관사((推誠亮節佐理功臣 三重大匡 金海府院君 領藝文館 孝思觀事) 이제현(李齊賢)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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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헌 최양경공의 이름은 문도(文度)이고, 자는 희민(羲民)이다. 54세인 지정(至正)
2 5년(충목 1, 1345) 6월 계축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날을 가려 8월 임신일에 옥금산(玉金山) 기슭의 선영(先塋)에 함께 묻으니[祔葬], 예(禮)에 따른 것이다. 아들은 사검(思儉)인데 먼저 죽었고, 손자들은 모두 어리다. 큰 사위인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정포(鄭誧)가 (원의) 서울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둘째 사위인 판도정랑(版圖正郞) 민선(閔璿)이 나부인(羅夫人)
3의 분부를 받고 나에게 글을 부탁하여 돌에 새겨 무덤에 넣으려 하였다.
나는 늙어서 글쓰는 것이 게으르지만 스스로 평생 동안 서로 참된 벗으로 지냈으니 의리로 사양할 수 없어, 붓을 잡고 그 첫머리에 ‘춘헌선생 묘명(春軒先生 墓銘)’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이것을 보고) 어떤 이가 캐어물어 “춘헌은 젊어서 무관(武官)이었고
4 또 나이도 그대보다 여섯 살이나 적습니다. 그대는 그러한데도 선생이라고 하니, 어찌 설명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춘헌은 광양군(光陽君) 성지(誠之)의 아들로, 찬성사 대제학(贊成事 大堤學)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비일(毗一)이 그의 할아버지이고, 호부시랑 지제고(戶部侍郞 知制誥)
5 우(佑)가 그의 증조부이며, 찬성사 대사학(贊成事 大司學)으로 은퇴한 김훤(金晅)은 그의 외조부가 되니, 진실로 훌륭한 선비이고 벼슬한 집안[搢紳]의 후손입니다. 그러하니 광양군은 덕릉(德陵, 忠宣王)의 신임을 얻어 기밀을 장악하고 관리의 인사를 전담한 것이 20여 년이 되어 명망과 권세가 대단하였습니다. 춘헌은 원의 조정에 숙위(宿衛)하여 몽고(蒙古)의 문자와 말을 익혀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며, 가죽으로 만든 화살통과 새의 솜털로 만든 모자를 쓴 사람들과 더불어 교유하니, 마땅히 부귀하고 교만할 만하였습니다.
그러나 격물(格物)과 치지(致知), 수기(修己)와 이인(理人)의 도(道)는 그 문을 찾아 들어가지 않음이 없었으니, 생각해보건대 능히 나가면 손에 활과 칼을 잡고, 들어오면 눈에 책을 붙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염계(濂溪, 周敦頤)와 2정(二程, 程顥와 程頤), 회암(晦庵, 朱熹)의 책을 모두 모아 보느라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고 닭이 울면 일어났으니, 반드시 절목(節目)을 자세히 하여 깊은 뜻을 다 알아 마음속으로 깨닫고 몸소 실천한 뒤에야 그친 것입니다.
따사롭기가 봄볕과 같고 고요하기는 가을의 물결과 같아서, 비록 종이나 첩이라도 일찍이 한 번도 그가 급하게 화를 내거나 갑자기 기뻐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덕릉이 서번(西蕃)으로 유배가게 되었을 때 춘헌은 광양군을 모시고 조(洮, 臨洮)와 농(瀧, 隴西)까지 가서 문안을 드렸습니다.
6 왕복 만 리나 되는 길이었지만 유순하고 즐거운 얼굴빛으로 게으르지 않고 더욱 삼가니,
7 광양군이 마치 집안의 안방 한 가운데 있는 것처럼 편안하였습니다. 충숙왕(忠肅王)이 원의 조정에 들어갔을 때 심왕부(瀋王府)에서 일을 벌이려는 자들이 형제간의 싸움을 선동하며 참소하는 말이 번갈아 끓어올라 온전한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춘헌은 몸은 머무는 곳을 따르고 뜻은 의리에 맞게 하여 정직하면서도 능히 공경하여 피차 간에 아무 유감이 없게 하였습니다.
양친이 돌아가시자 3년상을 치르고 가묘(家廟)를 세워 돌아간 분을 살아 계신 것처럼 잘 섬겼습니다. 자녀로 아들과 딸은 모두 첫 부인 김씨(金氏)가 낳았으나, 나부인(羅夫人)을 잘 대하여 또한 그가 계모인 것을 알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가 전법사(典法司)의 판사(判書)를 맡자 폐행(嬖幸)들이 능히 간사함을 이루지 못하였고, 평양(平壤)과 쌍성(雙城)에 명을 받아 갔을 때에는 욕심 많고 사나운 무리들이 함부로 속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어서 밀직사(密直司)에 들어오게 되고 첨의(僉議)로 승진하자 온 나라의 선비들이 (그가) 중용되어 정권을 잡은 것을 기뻐하였고 백성들은 그 혜택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수명을 더 주지 않아 문득 세상을 떠나니 세월의 빠름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고 혹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아, 춘헌은 자신의 도리를 다하여 사람들을 미쁘게 하였고, 집에서 행하여 나라에 미치게 하였으며, 살아서는 백성들의 기대를 받았고 죽어서는 다함없는 슬픔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이제 (이런 사람을) 찾으려고 하여도 대개 절대로 찾을 수가 없고, 어쩌다 있을 것입니다. 내가 나이가 많다고 자부하고 선비[儒]라고 자만하면서 춘헌을 선생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마땅한 일이겠습니까. 마땅한 일이겠습니까.”
명(銘)하여 이른다.
선비[儒]이면서 선비가 아닌 사람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으나
선비가 아니면서 선비인 사람은 오직 우리 춘헌(春軒)뿐이리.
지정 5년 8월 일 쓰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