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공(閔公) 묘지<題額>
돌아가신 광정대부 밀직사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匡靖大夫 密直司使 進賢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 민공(閔公) 묘지명 및 서문
전 광정대부 정당문학 우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前 匡靖大夫 政堂文學 右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이제현(李齊賢)이 짓다.
원(有元) 후지원(後至元)
1 병자년(충숙 복위 5, 1336) 정월 기사일에 고려국(高麗國)의 옛 밀직재상(密直宰相)인 민공(閔公)이 세상을 떠나니, 점을 쳐서 2월 갑신일에 송림현(松林縣)
2의 초원(椒原)에 장례지냈다.
공의 이름은 적(頔)이고, 자는 낙전(樂全)이며, 성은 민씨(閔氏)이니, 충주(忠州) 황려군(黃驪郡)
3 사람이다. 명종(明宗) 때의 재상인 태사(太師) 문경공(文景公) 영모(令謨)의 6세손으로, 증조부 인균(仁鈞)은 고(故) 한림학사(翰林學士)이고, 조부 황(滉)은 고(故) 호부시랑(戶部侍郞)이며, 아버지 종유(宗儒)는 고(故) 중대광(重大匡)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였는데 시호는 충순공(忠順公)이다. 어머니는 평장사(平章事)인 문도공(文度公) 유천우(兪千遇)의 딸이다.
공은 성품이 일찍부터 아름다웠으며 풍채가 다른 사람을 감동시켰다. 상투를 틀 나이에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도(道)를 매우 넓게 섭렵하였다. 경릉(慶陵, 忠烈王) 때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4 권교비서(權校秘書)가 되자 육관(六官)
5의 숙위[宿儒]들이 비로소 귀족의 자제[紈袴]로 대접하였고, 사한(詞翰)을 살펴보게 되니 재빠르고 또한 아름다워서 모두들 부끄러워하며 탄복하였다. 무릇 네 차례 옮겨서 시군부정랑(試軍簿正郞)이 되었다가 판도(版圖)로 바뀌었으며 금자복(金紫服)을 하사받았다.
덕릉(德陵, 忠宣王) 때에는 이전의 조산<대부>(朝散大夫) 소윤(少尹) 지제고(知制誥)로 나주목(羅州牧)에 나가 부임하였으며 오래되지 않아 ▨ 옮겨서 버금가는 자와 자리를 바꾸게 되었다. 사람들이 공에게 말하기를, “반드시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공은 즐겁게 여기고 개의하지 않다가 소환되어 선부의랑(選部議郞)을 거쳐 봉순대부 밀직사우승지 전의령 겸 사헌집의 지선부사(奉順大夫 密直司右承旨 典儀令 兼 司憲執義 知選部事)에 제수되었으며, 곧 이어통헌대부(通憲大夫)로서 평양윤(平壤尹)이 되어 나갔다.
지금의 임금<忠肅王>이 즉위하자 선부(選部)와 언부전서(讞部典書)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보문각제학 상호군(寶文閣提學 上護軍)을 겸대하였다. 밀직(密直)에 들어가서 부사(副使)가 되었다가 민부전서 대사헌(民部典書 大司憲)으로 바뀌었으며 모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겸하였다. 정묘년(충숙 14, 1327)에는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지고, 품계는 중대광(重大匡)이 되었다. 신미년(충혜 1, 1331)에는 다시 밀직사 대진현(密直使 大進賢)이 되고 품계는 광정대부(匡靖大夫)가 되었다. 매번 나아가 알현할 때에는 임금과 공주가 반드시 예를 갖추어 공경하였다. 집에서 쉴 때에는 스스로 운재거사(芸齋居士)라고 부르면서, 손님들에게 거문고를 타고 술을 대접하는 것을 즐기며 서로 기뻐함을 다하고, ▨ 한 번도 말과 안색을 낮추어 권귀(權貴)들을 따르지 아니하였으므로, 선비들이 이로써 더욱 중하게 여겼다.
공은 지원(至元)
6 경오년(원종 11, 1270)에 태어나 올해까지 67세의 수를 누렸다. 처음 만호 상락군(萬戶 上洛君) 김흔(金忻)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이름은 자이(子夷)이고 현재 봉선대부 위위소윤 지제교(奉善大夫 衛尉少尹 知製敎)이다. 뒤에 원씨(元氏)와 결혼하였는데 찬성사(贊成事) 관(瓘)의 딸로서 아들 셋을 두었으니, 이름이 유(愉), 변(抃), 환(渙)이다. 유와 변은 같은 해에 급제하였고, 환은 아직 벼슬하지 않았다. 딸 셋은 모두 명문집안[世家]의 아들에게 시집갔다.
제현(齊賢)은 덕릉(德陵, 忠宣王)을 따라가 ▨ (원의) 관저에서 섬겼는데, 덕릉은 매번 옛 관료들을 논하면서 오히려 공을 칭찬하여 “민교서(閔校書)는 장중하여 세세한 일에 까다롭지 않고, 오래된 가문의 풍류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원의 서울로 새해를 축하하는 사절로 오자, 불러서 만나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리를 앞으로 당겨 무릎을 마주하여 마치 포의지교(布衣之交)와 같았으니, 임금과 신하의 만남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덕릉이 이미 세상을 떠나자, 공은 비록 우부(右府)에 다시 등용되었으나 끝내 크게 쓰이지 못하고 작고하니, 아, 명(命)이로다.
대저 명(銘)하여 이른다
옛날의 세신(世臣)들은 너그럽고 삼가하여 백성에게 성실하였으나
지금의 세신들은 방자함과 인색함으로 그 몸에 원망을 사고 있는데
옛날을 좇아서 이웃으로 삼고 지금을 부끄러워하니 오직 공이 그러한 사람이로다.
의젓하고 정성스러워 속은 굳세고 밖은 강인하여 보배로운 자리를 차지하였으나
도(道)는 더욱 펼쳐지지 않았고 수명도 더욱 길지 못하였으니
하늘의 뜻에 어긋나고 인자(仁者)에 대한 도리도 아니로다.
남은 복이 모여들어 쌓이고 떨쳐질 것이니, 그 보람은 천 년 동안 있으리라.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