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원(大元)의 정동도진무(征東都鎭撫)이자 고려국(高麗國)의 광정대부 검교첨의평리 겸 판내부시사(匡靖大夫 檢校僉議評理 兼 判內府寺事)인 원공(元公) 묘지
칙수 장사랑 전 요양로 개주판관(勅授 將仕郞 前 遼陽路 盖州判官) 계림(雞林) 최해(崔瀣)가 짓다.
지순(至順)
1 원년(충혜왕 즉위, 1330) 윤7월 병술일에 정동도진무(征東都鎭撫) 원소신(元昭信)이 50세에 병으로 돌아가셨다. 9월 갑신일에 장례를 지내면서, 장례에는 묘지명이 없을 수 없으므로 아들과 사위 등이 부인의 부탁으로 계림(雞林, 崔瀣)
2에게 글을 청하였다. 아, 우리 나라의 옛 습관에 지위가 이부(二府, 僉議府와 密直司)에 오른 사람은 장례를 지낼 때에 모두 명(銘)을 지었는데, 하물며 공은 행실이 단정하여 무리들의 칭송을 받았으니, 해(瀣)
3가 감히 누구의 묘라고 사양하고 허락하지 아니하겠는가.
원씨(元氏)의 적(籍)은 북원(北原)
4에서 나왔다.
5 극유(克猷)라는 분이 있어 신성왕(神聖王)
6이 삼한(三韓)을 평정하는 것을 도와 공신(功臣)의 칭호를 얻고 관품이 정의대부 병부령(正議大夫 兵部令)에 이르렀다. 그 뒤 대대로 더욱 칭송되는 인물이 있었으니
7, 병부는 좌복야(左僕射) 징연(徵演)을 낳고, 복야는 병부상서(兵部尙書) 영(穎)을 낳고, 상서는 각문지후(閣門祗侯) 우경(禹卿)을 낳고, 각문은 검교소보(檢校少保) 덕(德)을 낳고, 소보는 감찰어사(監察御史) 심부(深夫)를 낳고, 어사는 상의봉어(尙衣奉御) 예(禮)를 낳고, 봉어는 좌사간(左司諫) 승윤(承胤)을 낳고, 사간(司諫)은 좌복야(左僕射)에 추증된 진(瑨)을 낳고, 복야는 첨의중찬(僉議中贊) 문순공(文純公) 부(傅)를 낳고, 문순은 동지밀직(同知密直) 경(卿)을 낳으니, (卿은) 처음으로 황제의 명을 받아 금부(金符)를 띠고 무략장군 정동행중서성도진무(武略將軍 征東行中書省都鎭撫)가 되었다. 무략공(武略公)이 지첨의부(知僉議府) 홍녹준(洪祿遵)공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인은) 개령군부인(開寧郡夫人)에 봉해졌으니, 이들이 공의 아버지와 어머니이다.
공의 이름은 선지(善之)이다. 7세에 부임(父任)으로 서면도감판관(西面都監判官)이 되고, 17세에 무직[虎職]으로 바꾸어 산원(散員)이 되었다. 27세에 낭장(郞將)에 임명되고, 28세에 섭좌우위호군(攝左右衛護軍)이 되어 봉선대부(奉善大夫)를 대유하였다. 다음해에 덕릉(德陵, 충선왕)이 불러 대도(大都)에 이르자 크게 총애하고 대우하여 중현대부 밀직사우부대언 사복정 지삼사사(中顯大夫 密直司右副代言 司僕正 知三司事)로 뛰어오르고, 또한 아버지의 직책을 계승하여 선수 소신교위 정동도진무(宣授 昭信校尉 征東都鎭撫)가 되었다.
이 때에 덕릉이 원의 조정에 머무른 지 오래 되었으나 귀국하려는 뜻이 그다지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하였다. 황경(皇慶)
8 계축년(충선 5, 1313)에 공이 지금의 정승인 화평군(化平君, 金深)과 함께 원의 조정에 고하여 덕릉을 모시고 본국으로 오려 하였으나, 이 때문에 덕릉의 뜻에 거슬려 화평은 임조(臨洮)
9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공은 파직되어 돌아왔다. 연우(延祐)
10 갑인년(충숙 1, 1314)에 좌천되어 통직랑(通直郞)으로 지면주
11사(知沔州事)로 나갔다가 얼마 되지 않아 돌아왔다.
지치(至治)
12 신유년(충숙 8, 1321)에 기용되어 판선공시(判繕工寺)가 되고 통헌대부(通憲大夫)에 제수되었다가 곧 대사헌(大司憲)으로 바꾸고 판전의시(判典儀寺)로 옮겼다. 이 해에 덕릉이 서쪽의 토번(吐蕃)으로 가게 되고 상왕(上王, 忠肅王)이 원의 조정에 들어갔다가 억류당하였는데, 고려 사람들이 파당을 나누어 근거 없는 말을 퍼뜨리니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공은 바른 태도를 지키고 흔들리지 않았으므로, 선비들의 의논이 옳다고 하였다. 태정(泰定)
13 갑자년(충숙 11, 1324)에 밀직(密直)에 들어와 부사(副使)가 되었다가 동지사사(同知司事)로 옮겼으나, 겨우 1년 만에 파직되었다. 광정대부 검교첨의평리 상호군(匡靖大夫 檢校僉議評理 上護軍)으로 집에 머물러 있은 지 6년 만에 돌아가셨다.
공은 많은 것에 통달하고 재능이 많았으며 일을 처리하면서도 침착함과 섬세함을 갖추지 않는 적이 없었다. 거문고와 바둑도 절묘함이 당시에 최고였으며, 일찍이 의(醫)로써 사람을 이롭게 할 만하다고 하여 널리 좋은 약재를 사들여 법에 따라 알맞게 조제하였다. 약을 구하는 사람이 날마다 문 앞에서 기다렸으나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 많은 사람들이 이에 힘입어 살아나게 되었다.
부인은 언양군부인 김씨(彦陽郡夫人 金氏)로 작고한 재상인 문신공(文愼公) 변(賆)의 딸이다. 자녀를 두었으니, 아들 구수(龜壽)는 복두점녹사(幞頭店錄事)이고, 송수(松壽)는 아직 어리다. 딸은 신호위낭장(神虎衛郞將) 유보발(柳寶鉢)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제위보판관(濟危寶判官) 안정계(安靖系)에게 시집갔다.
명(銘)하여 이른다.
14
아, 착한 일을 한 사람은 복을 받고 어진 사람은 수를 누리는데
누구는 복을 받아야 하나 후하지 아니하고, 수를 누려야 하나 오래 살지 못하는가.
저 푸른 하늘은 이 일로 어찌하여 우리 뜻을 저버리는가.
앞서 굽혀졌던 것은 뒤에 펴지며
하늘은 끝까지 인색하지 않고, 사람은 함부로 받는 일이 없으니
자손에게 알려서 오직 선인(先人)의 업(業)을 지키도록 하노라.
원[大元] 지순(至順) 원년 경오년 9월 일, 전 통직랑 도관직랑(前 通直郞 都官直郞) 송한(宋翰)이 쓰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