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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변처허씨묘지(金賆妻許氏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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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묘지명은 안정복(安鼎福)이 편찬한 『잡동산이(雜同散異)』제 4책(아세아문화사)에 수록되어 있다. 1324년(충숙 11)에 김개물(金開物)이 작성하였다.부인 허씨(許氏 : 1255~1324)는 김변(金賆)의 처이며, 안남(安南) 양천(陽川;지금의 서울 강서구 일대)사람이다. 부인의 증조는 경(京), 조부는 수(遂), 아버지는 공(珙)이다. 외조(外祖)는 이유실(李惟實)로 이자연(李子淵)의 현손(玄孫)이다.묘지명에 따르면 부인은 남편이 죽자 명복을 빌기 위해 감응사(感應寺)를 창건하고 『원둔경전(圓頓經典)』을 사경(寫經)했다. 1304년(충렬 30) 철산화상(鐵山和尙)으로부터 대승계(大乘戒)를 받았다. 1315년(충숙 2)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법명은 성효(性曉)다. 부인이 죽자 국왕은 변한국대부인 진혜대사(卞韓國大夫人 眞慧大師)로 추봉하였다. 묘지명은 이같이 남편의 사후 행했던 각종 불사(佛事)와 승려가 된 후 부인의 승력(僧歷)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 여성으로서 승려가 되어 국왕으로부터 법호(法號)를 받은 경우는 허씨 부인이 유일한 경우일 것이다. 묘지명의 자료적 가치는 이 점에서 매우 크다.부인의 남녀 형제는 9명으로 같은 어머니의 형제가 5명, 배다른 형제가 4명이다. 부인은 그 중 맏이다. 셋째 동생 양천군(陽川君) 숭(嵩)의 아들 종(琮)은 수춘옹주(壽春翁主)에게 장가들어 정안군(定安君)에 봉해졌다. 여섯째 동생은 원종(元宗)의 조카인 평양공(平陽公) 현(胘)에게 시집갔으며, 다시 충선왕비인 순비(順妃)가 되었다.부인은 아들 4명과 딸 3명을 낳았다. 장남은 륜(倫), 차남은 우(禑), 3남은 청오대사(淸悟大師)로 감은사(感恩寺)의 주지이다. 4남 역시 선사(禪師)이다. 장녀는 이계감(李季瑊)에게 시집갔다. 차녀는 동녀(童女)로 선출되어 원나라에 들어갔다. 막내딸은 원선지(元善之)에게 시집갔다.참고로 남편 김변(金賆)과 여동생 충선왕비 순비(順妃)의 묘지명이 있다.
추봉 변한국부인 진혜대사 행양천군부인 허씨묘지명 병서(追封 卞韓國夫人 眞慧大師 行陽川郡夫人 許氏墓誌銘 幷序)
우계만진 김개물 술(愚溪晩進 金開物 述)
세상은 넓고 커서 만물이 어울리고 암말과 같은 유순한 덕도 행해진다. 여성의 행실과 모범이 점차 쇠퇴하여 오랜 세월 훌륭한 여인의 나타남에 귀를 기울였다. 간혹 그러한 소문이 뚜렷이 드러난 뒤에는 마땅히 글을 지어 알려야 할 것이다.
대부인(大夫人)의 성은 허씨(許氏)이며, 나라의 풍속에 따라 이름은 적지 않는다. 안남(安南)의 양천(陽川;지금의 서울 강서구 일대)사람이다. 허씨는 평장사(平章事) 허재(許載)때 비로소 큰 가문이 되었다. 증조 경(京)은 예빈소경 지제교(禮賓少卿 知製誥)였다. 조부 수(遂)는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예부상서 한림학사승지(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 禮部尙書 翰林學士承旨)로 벼슬에서 은퇴하였다. 학사(學士;遂)의 외조(外祖)는 합문사인(閤門舍人) 이유실(李惟實)인데, 중서령(中書令) 이자연(李子淵)의 현손(玄孫)이다. 아버지 공(珙)은 충렬왕의 배향공신(配享功臣)으로,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 僉議中贊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典理司事 世子師)이며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를 추증받았다.
공은 검약하고 스스로를 잘 지켜 덕망이 당대의 제일이었다. 어머니는 영평군부인(鈴平郡夫人) 윤씨(尹氏)이다. 금자광록대부 정당문학 예부상서 수문전대학사(金紫光祿大夫 政堂文學 禮部尙書 修文殿大學士)이며 문평공(文平公)으로 시호를 추증받은 극민(克敏)의 딸이다. 문평공은 시중 관(瓘)의 후손이다. 1등 공신으로 광정대부 도첨의참리 집현전대학사 동수국사 상장군(匡靖大夫 都僉議參理 集賢殿大學士 同修國史 上將軍)이며 문신공(文愼公)으로 시호를 추증받은 변(賆)은 남편이다. 공은 봄날의 구름과 같은 기상이 있었고 조상이 서로 돌보아 주고 계승하여준 덕으로 시호를 얻어 공이 되었다.
부인의 남녀 형제는 9인다. 같은 어머니의 형제가 5명, 배다른 형제가 4명이다. 부인은 그 중 맏이다. 셋째 동생 양천군(陽川君) 숭(嵩)은 죽었는데, 아들 종(琮)은 수춘옹주(壽春翁主)에게 장가들어 정안군(定安君)에 봉해졌다. 여섯째 동생은 처음에 평양공(平陽公) 현(胘)에게 시집갔는데, 평양공은 원종(元宗)의 친 조카이다. 지금은 순비(順妃)가 되었으며 건강하다. 그 나머지는 적지 않는다. 이것이 부인의 집안과 친척에 관한 전부이다.
씩씩한 아들 4명과 딸 3명을 낳았다. 장남인 전밀직부사(前密直副使) 윤(倫)은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로 벼슬에서 은퇴한 최서(崔瑞)의 딸에게 장가갔다. 차남인 전원윤(前元尹) 우(禑)는 밀직사사 보문각대학사(密直司使 寶文閣大學士) 전승(全昇)의 딸에게 장가갔다. 3남은 어려서 출가하였다. 현변(玄抃)이라 하는데 청오대사(淸悟大師)가 되어 지금 감은사(感恩寺)의 주지이다. 4남 역시 어려서 출가하였다. 여찬(如璨)이라 하는데 가지산문(迦智山門)에 투신한 후 수좌(首座)에 네 번이나 뽑혔다.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하여 명성을 떨쳤다. 남쪽지역을 순례하여 천목산(天目山)에 갔다 오자 선사(禪師)로 임명한다는 비답(批答)이 있었다. 장녀는 이계감(李季瑊)에게 시집갔으나 일찍 죽었다. 차녀는 동녀(童女)로 선출되어 원나라에 들어갔다. 막내딸은 밀직부사 상호군(密直副使 上護軍) 원선지(元善之)에게 시집갔다. 여러 손(孫)과 사위는 쟁쟁하여 번성한 집이라 할 것이다.
부인은 을묘년(1255, 고종42)에 태어났는데 성품이 정숙하고 신의가 있으며 아름답고 절조와 신중함이 있었다. 어렸을 적에 특이함을 보였으며 비녀를 꼽기 전에 품격이 완성되어 밖으로 드러나 여러 번 놀라게 했다. 14세에 혼인했는데 능히 남편을 섬김에 합당하여 먹을 것을 넉넉히 하고 길쌈을 힘썼으며 부도를 다하여 섬겼다. 집안에서 제사를 드리려하면 법도를 조금 알아 돕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안에서는 자녀들의 어미가 되어, 자식이 태어나 어려 생각이 없을 때 각기 마땅한 업을 가르쳤다. 일찍이 “남자는 삼가 힘쓰지 않으면 음흉하여 부정하게 되고, 여자가 삼가 힘쓰지 않으면 잘못되어 편벽하게 되어 스스로 쓰러지게 된다”고 하였다. 부인의 절조와 힘씀이 이와 같아 온 가문의 모범이 되어 집안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공은 신축년(1301, 충렬27)에 먼저 죽었다. 부인은 몹시 슬퍼하여 나라의 의식을 거절하고 스스로 장구(葬具)를 마련하여 대덕산(大德山)의 남쪽 언덕에 묘소를 마련하였다. 장례가 끝나자 이 산의 서남쪽 가까운 곳에 가히 서로 볼 수 있는 곳에 집을 짓고, 이곳에서 1 리도 못 되는 곳에 절을 지어 고인의 명복을 비는 곳으로 하였다. 이름을 감응사(感應寺)라 하였다. 집안의 재화와 보물을 기울여 승려를 청하여 『원둔경전(圓頓經典)』을 사경(寫經)했는데, 금과 은을 섞어 글자를 꾸몄다. 그 나머지 불사(佛事)에 대해서는 적지 않는다.
임인년(1302, 충렬28) 무선사(無禪師)가 강회(江淮)로부터 배를 타고 오자 부인은 사모하여 뵙고 처음으로 법요(法要)를 들었다. 갑진년(1304, 충렬30) 철산화상(鐵山和尙)이 남쪽으로 와 교화를 하자 대승계(大乘戒)를 받았다. 신해년(1311, 충선3) 미륵대원(彌勒大院)에 올라 장육석(丈六石)에 예를 올리고 여러 산천을 순례하여 열반산(涅槃山)과 청량산(淸凉山)의 성지까지 갔다. 을묘년(1315, 충숙2)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법명은 성효(性曉)이며 계단주(戒壇主) 백수(白修)는 그 스승이다.
47세에 과부가 되었는데 초하루와 보름의 제사 때 반드시 묘소에 몸소 갔다. 삼년상을 치르면서 춥거나 덥거나 해이함이 없었다. 그 뒤 명절의 제사 때에 바깥 나들이를 하지 않고 처음과 같이 직접 묘소에 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출가한 후에야 그만두었다.
병진년(1316, 충숙3) 통도사(通度寺)에 가서 사리 12과를 얻었고, 동쪽 경주에 갔다. 경주는 볼 만한 곳이 많은 까닭에 여기서 그 뜻을 다하고 돌아왔다. 거쳐 간 산천은 수 없이 많지만 이에 대해서는 여기서 마친다.
경신년(1320, 충숙7) 서울 남산의 남쪽에 자리를 보아 초당을 짓고 머물렀다. 장남의 집이 그 서쪽에 있었다. 뜻은 지아비가 죽으면 맏아들을 따르는 교훈을 본받는 것이었다. 태정(泰定) 원년(1324, 충숙11) 2월 11일 병들어 누웠으니 향년 70세이다. 이해 3월 4일 초당에서 죽었다. 임종 때 말이 어지럽지 않고 동작이 살아있는 것과 같았다. 관청에서 임금께 보고하자 그 절의가 시종일관 왕제(王制)를 따른데 대해 찬탄하였다. 왕의 명령을 따라 변한국대부인 진혜대사(卞韓國大夫人 眞慧大師)에 추봉되었으니, 드문 일이었다. 이해 4월 4일에 선영에 합장하려 하는데 선영으로부터 서쪽으로 약간 보 떨어져 있다. 남편을 따르는 부인의 뜻이었다.
상주가 동생에게 상의하고 슬픈 모습으로 와서 나에게 부탁하기를 “돌아가신 아버님의 묘지명은 둔촌(鈍村;金喧)선생이 작성했습니다. 지금은 우계(愚溪;金開物)가 써주셔야 하겠습니다” 하고, “후손은 집안끼리 잘 지내며, 다시 족속(族屬)이 되었습니다. 행장을 대충 갖고 있으니 사양하지 마십시요” 라고 하였다. 그 말은 어머니의 덕을 기리려는 절실한 것이었다. 상주의 말이 아니더라도 어려서 가까이 살면서 부인의 행실이 아름다움을 들었다. 입으로 표현하지 못하면서 감히 사양하면 사사로이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 될 것이다. 또 상주와의 정이 두터우니 죽은 대부인(大夫人)에게 수치를 끼칠 수야 있겠는가.
『예기(禮記)』에 “묘지명은 조상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다. 조상의 아름다움이 없으면서 이를 칭찬하면 무(誣)가 된다. 조상이 선한 일을 했는데도 알지 못하면 불명(不明)이다. 알고도 전하지 않으면 불인(不仁)이다. 이 세 가지는 군자의 부끄러움이다” 라고 했다. 대부인은 행실이 아름답고, 여러 아들이 밝고 어질다. 이 세 가지 수치와는 거리가 먼 것은 의심할 나위 없다. 그러므로 부인의 공과 행실을 다 적어 무덤에 넣는다.
명(銘)에 이르기를,
귀하면 현명하지 못한데, 현명하고 또 귀했네.
오래 살면 어질지 못한데, 오래 살면서 어질었네.
부인의 행실은 장부의 기운.
많은 아들 사위 모두가 뛰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