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성양절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첨의정승 판선부사(端誠亮節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 僉議政丞 判選部事)이며 추증된 시호가 문청공(文淸公)인 권공(權公) 묘지명 및 서문
광정대부 첨의찬성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판민부사(匡靖大夫 僉議贊成事 進賢館大提學 知春秋館事 判民部事)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이진(李瑱)이 짓다.
대저 사람은 한 가지씩 능한 장점을 가지고 있으니, 능한 것으로 그 임무를 맡게 되면 세상의 사대부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문학(文學)을 하는 사람은 행정[吏]에 능하지 않은 것으로 책망하지 않고, 행정에 능한 이들은 문학에 뛰어나지 않는 것으로 책망받지 않는다. 더구나 그것들을 겸하여 모든 행동을 온전하게 하고, 생을 끝내면서 세상에서 중하게 여기는 세 가지[達尊之三者 : 덕(德)·나이·관작(官爵)]를 갖춘 이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많지 않으니, 다만 공이 그러할 것이다.
권씨(權氏) 일족은 영가군(永嘉郡)
1의 손꼽히는 가문으로, 공의 이름은 단(㫜)이고, 자는 회지(晦之)이다. 증조부 중시(仲時)는 정헌대부 호부상서(正獻大夫 戶部尙書)에 추증되었고, 조부 수평(守平)은 은청광록대부 상서좌복야 상장군(銀靑光祿大夫 尙書左僕射 上將軍)으로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위(韙)는 통의대부 판대복시사 한림학사 충사관수찬관 지제고(通議大夫 判大僕寺事 翰林學士 充史館修撰官 知制誥)를 지냈으며, 어머니 이씨(李氏)는 잡직서령(雜織署令) 영(榮)의 딸이다.
공은 장단현
2위(長湍縣尉)로 시작하여 인주
3판관(仁州判官)으로 옮겼으며, 임기가 차자 처음으로 북면도감판관(北面都監判官)이 되었다. 일찍이 세상 밖[物外, 佛敎]에 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버지가 여러 방면으로 남아 있도록 힘쓰고 집안을 일으키는 책임을 맡기고자 하여 갑인년(고종 41, 1254)에 문하녹사(門下錄事)직을 구해 오니 공은 어쩔 수 없이 부임하였다. 그 전에 이 관직은 높은 관리[衣冠] 중에서 재산이 많은 사람의 아들과 사위가 맡게 하였는데, 대개 경비가 많이 들었으므로 서질(犀秩)
4로 뛰어 올려 승진시켜 주었으나 물고기를 꼬치에 꿰듯이 줄지어 서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 해 6월에 과거시험[東堂]이 있게 되자, 유문정공(柳文正公, 柳璥)이 사람을 알아보는 것으로 이름이 나있는데, 타일러 말하기를 “그대는 글재주가 있으니 다만 행정관리[吏路]로만 벼슬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소.”라고 하며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니 과연 합격하였다.
5
윤6월에 권지각문지후(權知閣門祗候)로 옮기고, 곧 이어 예주(禮州)
6와 승주(昇州)
7의 부사(副使)가 되어 나갔으며, 또한 맹주(猛州)
8와 개주(价州)
9의 부사(副使)를 겸하였는데, 간 곳마다 은혜와 위엄이 있었다. 무릇 여러 관청으로 옮기고 명을 받들어 사신으로 출입한 것은 집안의 사첩[家史]에 쓰여있는 것과 같으니 여기에 적지는 않겠다.
공이 푸른 말을 타고 어사대[栢署]의 관직을 거친 뒤 밖으로는 안찰사(按察使)를, 안으로는 선군별감(選軍別監) 등의 크고 작은 행정에 관한 일을 맡으면서, 크게 붓[刃]을 놀려 신명을 드러내었으니 이것이 행정관리로서의 재능이 뛰어난 점이 아니겠는가. 또한 일찍이 내시[鳳藥]가 되고, 품계가 한림학사 사관수찬 제주 대사성(翰林學士 史館修撰 祭酒 大司成)과 양제(兩制)의 지제고(知制誥)[三字]에 이르러, 저술하고 가르쳐 깨우치게 한 것이 모두 세상에서 칭찬하고 있으니 이것은 문학의 재능이 풍부한 점이 아니겠는가. 갑신년(충렬 10, 1284)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뽑은 이들이 모두 이름난 선비로 지금 당대의 이름난 재상이 된 이도 서너 명이니
10, 이 또한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본래 비굴하게 남의 비위를 맞추면서 승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3품에 오른 지 10년 동안 재상이 되지 못하였다. 정해년(충렬 13, 1287)에 용후(龍喉, 承旨)에 오르고, 무자년(충렬 14, 1288)에 봉익대부 밀직학사 판도판서 문한학사승지(奉翊大夫 密直學士 版圖判書 文翰學士承旨)에 임명되었다가 승진하여 전리판서(典理判書)로 옮겼다. 그가 재상의 지위[台階]에 들어가 있던 날은 당연히 오래되지 않았지만, 조화롭게 다스린 날은 오히려 길었다.
공은 스스로 가득 참을 꺼리고 도리를 밝혀 자신을 지키는 것을 신념으로 삼았으므로, 기축년(충렬 15, 1289)에 연로함을 이유로 글[表]을 올려 물러날 것을 간곡하게 청하였다. 이에 글[批]를 내려 광정대부 지첨의부사 보문각대학사 동수국사(匡靖大夫 知僉議府事 寶文閣大學士 同修國史)로 삼고 물러나 은퇴하도록 하였다. 갑오년(충렬 20, 1294)에 도첨의시랑찬성사 집현전대학사 수국사 판판도사사(都僉議侍郞贊成事 集賢殿大學士 修國史 判版啚司事)를 더하여 주고, 무술년(충렬 24, 1298)에 특별히 판(判)하여 재신(宰臣)이라 써서 내려주었으며, 신축년(충렬 27, 1301)에 수문전대사학 판군부사사(修文殿大司學 判軍簿司事)를 제수하였다. 은퇴한 뒤에 이와 같이 비(批)를 더하고 또한 글을 써서 겸하여 내려준 것은 예로부터 드문 일이다. 임금이 처음에는 때를 알고 물러나려고 청하는 것을 어기기 어려워 짐짓 그것을 따랐을 뿐이고, 소중하게 의지하려는 마음이 오래되어 그치지 않은 것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동경(東京, 慶州)에는 예전부터 갑방(甲坊)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어서, 나라의 세금을 거두면서 그 나머지는 수령[專城者]이 사사로이 썼다. 공이 유수(留守)로 있으면서 즉시 없애버리니 1년의 수입으로 3년을 쓸 수 있었다. 또한 사호(司戶)가 탐욕스러워 조부(租賦)를 훔쳐 쓰는 자를 징계하니, 백성이 지금까지 이 일을 칭찬하고 있다. 전라도(全羅道)와 경상도(慶尙道)를 다스린 일과 같이 널리 사람들의 입으로 퍼져나가는 것도 참으로 많다. 충청도(忠淸道)에 근무할 때, 내가 광주목
11사록(廣州牧司錄)으로 있어 눈으로 보았는데, 오로지 백성들의 어려움을 묻고 관리의 어짐과 그렇지 않음을 살피는 일 밖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주(州)나 부(府)에 국가의 일을 알리고 맡기면서 일체 문서를 가진 사자(使者)를 보내는 일을 금지하고, 단지 가죽과 뿔[皮角]로 싸서 (역마를 통해) 알렸는데도 오히려 명령이 위반되지 않았다. 또한 비록 한가한 틈이 나도 음악과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니, 이러한 일은 어찌 사람이 능히 할 수 있는 일일 것인가.
내가 시를 지어바쳤는데 그 대략을 말하면
비구름이 몰아쳐 냉(冷)함을 베개 삼았으나 꽃 핀 정자에 달이 비추고
유성이 방울처럼 날아가니 버드나무 무성한 역(驛)에 바람이 부누나
.라고 하니, 공이 웃으면서 턱을 끄덕였다.
공은 여러 해 동안 선업[白業]을 닦고 술과 고기를 끊었으며, 비록 속세에 있었지만 이미 하늘이 도와준 운명으로 부처가 되었다. 그 무렵 남악(南嶽)의 철산화상(鐵山和尙)이 배를 타고 오자
12 공이 그가 견성(見性)하였음을 알고, 머리를 깎고 스승으로 섬겼다. 도호(道號)를 야운(野雲)이라 하였으며 이름난 산을 유람하며 선미(禪味)를 가득 맛보기를 힘쓴 지 7년이 되었다. 신해년(충선 3, 1311) 11월 23일 병이 들어 12월 초하루에 단정하게 앉아서 돌아가시니, 향년 84세이다.
공은 평소 성품이 정결하고 신중하였으며, 부드러우나 기개가 있고, 온화하나 분별할 줄 알아서 세 임금을 섬기면서 한 점의 어려움도 겪지 않았다. 조심스레 처신하여 세상 사람들의 의표를 훨씬 뛰어넘었으니, 진실로 해동(海東)의 위인이다.
조의대부 우간의대부 동궁시독학사 지제고(朝議大夫 右諫議大夫 東宮侍讀學士 知制誥) 노연(盧演)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한 명을 낳았는데, 이름은 부(溥)로 지금 중대광 첨의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판총부사(重大匡 僉議贊成事 右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上護軍 判摠部事)가 되었고 그 손자는 매우 많다. (溥는) 이미 홍추(鴻樞, 密直司)가 되어 상국(上國, 元)으로부터 삼주만호패(三珠萬戶牌)를 받았고, 아버지와 더불어 나라의 일을 논하는 영화를 누렸으니, 눈앞에서 효를 한 것이다.
찬성공이 마침 행궁(行宮, 〔忠宣王〕)의 명을 받아 대장경(大藏經)을 받들고 원에 들어 갔는데, 부음을 듣고 쓰러지며 귀국을 신청하였다. 임금도 또한 매우 애도하여, 황경(皇慶) 원년 임자년(충선 4, 1312) 정월 12일에 황제의 명령[鈞首]으로 단성양절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첨의정승 판선부사(端誠亮節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 僉議政丞 判選部事)를 더하고 시호를 문청공(文淸公)이라고 추증하였으며, 아울러 먼저 작고한 부인 노씨(盧氏)를 한국대부인(韓國大夫人)이라 하였다.
이는 모든 행동을 온전하게 하고 죽음에 이르러 세상에서 중하게 여기는 달존(達尊)의 세 가지를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찬성공과 겹겹이 인연이 있는데, 묘지명을 청해왔으므로 삼가 절하면서 명을 짓는다.
명(銘)하여 이른다.
공은 조정에 벼슬하며 행정[吏]에 능하고 문학[文]에 재주가 있도다.
공은 세상을 떠나며 장수하며 선종하였다.
영험한 언덕에 묘자리를 잡았으니 편안할 것이고,
대대로 복을 받아 자손이 창성하리로다.
황경(皇慶)
13 원년 임자년(충선 4, 1312) 2월 일에 짓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