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大德)
1 9년 을사년(충렬 31, 1305) 2월 30일에 도첨의찬성사(都簽議贊成事) 김훤(金晅)이 스스로 지은 묘지<題額>
광정대부 정당문학 보문각대학사 동수국사(匡靖大夫 政堂文學 寶文閣大學士 同修國史)로 벼슬을 물러나 은퇴한 김훤이 스스로 지음
김훤(金晅)의 자는 용회(用晦)이고, 의성현(義城縣)
2 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굉(閎)인데 비서랑(秘書郞)이고, 어머니는 토산군부인(兔山郡夫人) 몽씨(蒙氏)로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양정(養正)의 딸이다. 훤은 갑오년(고종 21, 1234) 6월 30일에 태어나 20세에 벼슬길[士板]에 오르고, 무오년(고종 45, 1258)에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이방균(李方均)공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그 해에 무안
3 감무(務安監務)로 부임하고, 경신년(원종 1, 1260) 6월에 첫 근무지에서의 치적에 대한 고과에 따라 중부녹사(中部錄事)가 되었으며 8월에 원(院, 〔內侍院〕)에 소속되었다. 9월에 을과(乙科)에 올라 제3인으로 급제하였다.
4 병인년(원종 7, 1266)에 관한(館翰)으로서 추천을 받아 직사관(直史館)에 임명되었다. 무진년(원종 9, 1268)에 7품으로 승진하며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겸하였다.
기사년(원종 10, 1269)에 하절서장관(賀節書狀官)으로 중국의 조정에 갔다가 경오년(원종 10, 1270)에 돌아왔고, 9월에 참직(叅職)에 임명되었으며, 금주
5부사(金州副使)로 부임하였다. 신미년(원종 12, 1271) 5월에 근무지에 있으면서 예부낭중(禮部郞中)으로 승진하고
6, 계유년(원종 14, 1273) 봄에 합문사(閤門使)로 복명(復命)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시어사(侍御史)로 옮겼다가 그 해 겨울에 전라주도 안찰사(全羅州道 按察使)가 되었다. 을해년(충렬 1, 1275)에 4품에 임명되었다. 그 해 가을에 전라주도 부부사(全羅州道 部夫使)가 되었는데, 길에서 그 도(道)의 안렴(按廉)이 사사로이 선물을 주자 그것을 몰수하였다.
7 이 때문에 권세가의 참소를 입어 병자년에 양주
8부사(襄州副使)로 좌천되어 1년을 지내다가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그 해 가을에 동계 안집사(東界 安集使)가 되고, 조산대부 전법총랑(朝散大夫 典法摠郞)으로 옮겼다. 무인년(충렬 4, 1278)에 다시 전라주도 찰방사(全羅州道 察訪使)가 되었으나 임금의 뜻을 거슬러 기묘년(충렬 5, 1279)에 파직되었다. 또 말에서 떨어져 병을 얻었으므로 8년 동안 산직[散]에 있다가, 끝내 다시 벼슬하기를 구하지 않았다. 병술년(충렬 12, 1286) 6월에 이르자 일을 담당하는 이가 딱하게 여겨 임금에게 아뢰어 영월
9감무(寧越監務)로 임명하였다. 부임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훤을 위해 애써준 이가 꾸짖고 재촉해서 보내므로, 할 수 없이 다만 종 한 명만 데리고 홀로 부임하였다. 조정에서 의논하여 그 고을의 안집별감(安集別監)으로 삼았으나 직함에 얽매어 ▨ 오래 머무르기를 싫어하였으므로, 정해년(충렬 13, 1287) 겨울에 이웃 관리를 방문하는 척하면서 홀로 말을 타고 현(縣)을 떠나 바로 서울로 와서는 사직하고 가지 않았다.
무자년(충렬 14, 1288) 정월에 장사(長史)로 차출한다는 명이 내려왔고, 그 해에 이전의 관직으로 복직되었다. 그 뒤로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면서 대각(臺閣)을 떠나지 않고 항상 연고(演誥)를 맡았다. 계사년(충렬 19, 1293)에 조의대부 좌간의대부 한림시강학사 지제고(朝議大夫 左諫議大夫 翰林侍講學士 知制誥)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원의 조정에 들어갔다. 마침 전왕전하(前王殿下, 忠宣王)가 세자로서 궁궐에 들어와 임금을 만나고 인명대후(仁明大后)
10를 모시고 있었는데, 원의 조정에서 훤에게 조칙을 내려 세자를 수종하게 하였다.
을미년(충렬 21, 1295)에 성균시(成均試)를 맡게 되어 2월에 귀국하자, 9월에 ▨▨ 시험을 관여하여 이관(李琯) 등 74명을 얻었다.
11 그 달에 봉익대부 밀직학사 국자감대사성 문한학사(奉翊大夫 密直學士 國子監大司成 文翰學士)로 뛰어 올랐다. 그 해 12월에 또 억지로 세자를 호종하게 하니, 늙고 병든 몸으로 원의 조정에 들어갔다. 병신년(충렬 22, 1296)에 연경(燕京)에 있으면서 광정대부 정당문학 보문각대학사 동수국사(匡靖大夫 政堂文學 寶文閣大學士 同修國史)에 임명되고, 정유년(충렬 23, 1297) 2월에 귀국하였는데 병을 구실로 근무하지 않다가, 무술년(충렬 24, 1298)에 본관(本官)으로 물러나 은퇴하였다. 이것이 훤이 역임한 벼슬의 전부이다.
훤은 사람됨이 어리석고 못나서 나라에 도움을 준 것이 없으나 벼슬과 수명이 이 만큼에 이르면서 끝내 재난이나 화가 없었던 것은, 반드시 남 모르는 가호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찍이 사는 곳으로써 (호를) 둔촌(鈍村)이라 하였으며, 또 족헌거사(足軒居士)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경자년(충렬 26, 1300) 4월에 아내 이씨(李氏)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딸 한 명과 아들 두 명을 두었는데 분수에 따르면서 효도로 봉양하고 있다. 평생의 행적을 적지 않을 수가 없으므로, 생애의 대략을 스스로 써서 두 아들에게 남겨주어 보도록 하였다. 필경 세상을 떠난 날짜와 묻힐 곳은 마땅히 이어 써서 무덤에 지(誌)로 남겨줄 것이다.
명(銘)하여 이른다.하나 : 이 파리한 몸을 돌아보니 하류 선비[下士]의 군더더기 살덩어리일 뿐,
바탕은 미약하고 성질은 우직하네.
학문은 이룬 것이 없으나 억지로 이름하여 선비라고 하니
조정의 반열에 참여하여 외람되게 높은 벼슬에 오르도다.
둘 : 오랫동안 연고(演誥)를 ▨(〔주관하고〕), 추요(樞要)에 올랐으나
겨우 창틀을 깎아냄[斲窓]
12을 면하고 조정의 일을 보았네.
정당(政堂)에 뛰어 올랐지만 모함에 빠져 물러나 노년을 보냈으니
현달하지 않았다고 할 수가 없고, 또한 장수했다 이를 만하네.
셋 : 아내의 인연으로 도움 받았는데도 한 개 어리석은 덩어리가 되었으니
이것은 어떠한 물건이고, 끝내 어디로 가는가.
부르면 오고 밀어내면 가니, 여기에 자리잡을 수도 없어서
스스로 시말(始末)을 쓰고 자식에게 맡겨 남기네.
넷 : 하늘과 땅이 조화를 부리니 초목(草木)이 어찌 시드랴만
서툴고 완고하게 자라났으되 조물주가 나를 사사로이 생각하였네.
1녀 2남을 주니 적지도 않고 ▨(〔많지도〕) 않고
복사꽃과 오얏꽃 같은 인재가 문하에 있으니 이 또한 ▨(〔훌륭하지 아니한가〕).
<뒷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김공(金公) 묘지에 이어 쓰는 글
봉익대부 밀직사사 문한사학승지(奉翊大夫 密直司事 文翰司學承旨)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이진(李瑱)이 짓다.
상국(相國) 둔촌(鈍村) 김공은 생전에 천성이 지조가 굳고 덕망이 있었으며 청렴하였다. 무릇 탐욕스럽고 비루하며 아부하는 간사한 사람들이 공석(公席)에 있으면 반드시 힘써 스스로 물리치려 하였고, 한가하게 담소하는 곳일지라도 또한 그러한 일을 말하는 것을 배척하였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비록 (공의) 재능과 행실을 우러러 사모하면서도, 오히려 혹은 꺼리며 즐겨 따르지 못하였으나, 공 또한 구차하게 관대한 척하지 않고 허락하는 것을 늘 신중하게 하였다.
글을 지으면서 두 가지 ▨(〔뛰어남〕)이 있으니 산문[文]과 시이고, 글씨를 쓰며 뛰어난 것이 세 가지가 있으니 진서(眞書, 楷書)와 행서(行書)와 초서(草書)이다. 또 불교[三寶]를 공경스럽게 믿으면서 불경(佛經)을 외는 일도 자못 많았고 때로는 간혹 선미(禪味)를 맛보았다. 그러므로 (공은)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고 이를 만할 것이다.
만년에는 가까운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항상 좋은 술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주 잔치를 베풀어 때로는 글을 지으면서 즐기고, 때로는 거문고[絲桐]를 타며 노래하는 소리가 해가 지고 밤이 밝은 뒤에야 끝났으니, 대개 애오라지 다시 회포를 풀었을 뿐이다. 대덕(大德) 7년(충렬 29, 1303)에 문지(文地)의 재추(宰樞)가 상서하여 이전의 녹봉을 회복시켜줄 것을 청하니, 12월 29일에 글[批]을 내려 광정대부 도첨의찬성사 연영전대사학 판판도사사(匡靖大夫 都僉議贊成事 延英殿大司學 判版啚司事)가 되어 물러나 은퇴하도록 하였다. 8년(충렬 30, 1304) 정월에 글을 올려 사면(辭免)해 줄 것을 청하였다. 8월에 갑자기 풍질(風疾)을 얻게 되자 음양가(陰陽家)의 말을 따라 좌경리(左京里)에 있는 친척집으로 방위를 피하였다[避方]. 9년(충렬 31, 1305) 정월 14일에 세상을 떠나니, 빈소를 집으로 옮기고, 2월 30일 구룡산(九龍山)의 동쪽 기슭에 장례지냈다.
아들이 두 명이 있으니, 서경(瑞卿)과 서정(瑞廷)으로 모두 벼슬하여 이미 7품을 지냈다. 하나 있는 딸은 동부부령(東部副令) 최실(崔實)에게 시집갔다.하루는 아들이 공이 스스로 지은 묘지(墓誌)를 가지고 와서 “아버지가 묘지명을 지으면서 사망한 연월일과 장례지낸 곳은 뒷날 마땅히 이어서 쓰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청하건대 그대가 이어주었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그것을 보니, 집안 및 벼슬한 내력이 자세하고도 정확하였다.
기사년(원종 10, 1269)에 나라에 권세를 가진 신하가 마음대로 임금을 폐위시키거나 즉위시켰다.
13 그 때에 지금의 임금<忠烈王>이 원(元)에 들어가 있었는데, (원의) 조정에서 논의하여 (충렬왕을) 동안공(東安公)으로 봉하고 대군(大軍)과 함께 보내려고 하였다. 이 일이 만일 이루어졌다면 권신은 이에 사람들의 기대를 꾀어 말하기를 “임금의 호칭이 없어졌는데 나라의 이름이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반드시 한 마음으로 거역하였을 것이다. 공이 서장관(書狀官)으로 임금의 명을 받들어, 나라만 생각하고 집은 잊은 채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곧 글[啓]을 써서 도당(都堂)에 바친 뒤에야 논의가 가라앉아 행해지지 않았다. 임금이 글[詔]을 내려 공신이라 칭하고 특별한 포상을 더하여 주었다. 그 글이 지금까지 여전히 이 곳에 있으니, 실로 삼▨(〔三韓〕)이 영원히 의지할 것이다.
금주(金州)에 부임하였을 때, 이웃 고을 퇴화군(推火郡) 경상남도 밀양시(密陽市)의 고려시대 이름.
에서 나라를 배반하고 난을 일으켜 관리를 함부로 죽이며 사방에서 크게 들고 일어나자, 부락(部落)에서 병사를 이끌고 (그들에게) 갔다. 공이 이에 많지 않은 정예병(精銳兵)과 죽음을 무릅쓴 사람들을 급히 훈련시켜 적을 향해 바로 나가니 흉악한 무리들이 무너졌다. 또 도적이 탄 배 세 척이 주(州)의 남쪽에 크게 이르자 공이 앞장 서 성에 올라 죽음으로 지켜 막았으므로, 도적이 이에 일이 그르친 줄 알고 물러갔다.
14 아, 한낱 유관(儒冠)으로 용감하게 남녘을 막아서 능히 온 도(道)가 모두 의지하게 하고 나라에 근심을 끼치지 않게 하였으니, 그 지략과 용기와 뛰어난 공훈은 무엇과 같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크고 아름다운 일은 공이 모두 겸손하게 적지 않았으니 하물며 작은 일에 있어서이겠는가.
내가 외람되게 보살핌을 받아 스승으로 모시고 형으로 모신 지가 오래 되었다. 그러한데 (묘지명을) 모두 생략하고 뒤를 보충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디에 쓰이겠는가. 잠시 한 두 가지 일을 적고, 이에 명(銘)하여 이른다.
임종[大期]이 닥쳐오려 하니 스스로 묘지명을 지으면서
수 많은 공로는 적지 않고 오직 벼슬을 옮긴 것만 써놓았으니
그 겸양과 그 지혜를 여기에서도 알 수 있으리.
가려잡은 묘소는 산세가 고요하고 뛰어나므로
영원히 유익함을 (자손들이) 입게 하여 편안하게 하리로다.
대덕(大德) 9年 을사년(충렬 31, 1305) 2월 29일 문생(門生)으로 급제한 고문계(高門啓)가 글씨를 쓰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