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헌거사(笑軒居士) 묘지<題額>
봉익대부 부지밀직사사 판도판서 문한학사(奉翊大夫 副知密直司事 版圖判書 文翰學士)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최서(崔瑞) 묘지
대덕(大德)
1 9년 을사년(충렬 31, 1305) 2월 10일 병술일에 공이 세상을 떠났다. 28일에 송림현(松林縣)
2 땅의 대덕산(大德山) 남쪽 기슭에 장례지내니, 예(禮)에 따른 것이다. 공의 이름은 서(瑞)이고, 자는 몽기(夢其)이며, 안서(安西)
3 사람이다. 아버지 순(淳)은 관직이 조산대부 상서호부시랑(朝散大夫 尙書戶部侍郞)에 이르러 작고하였다. 조부 홍윤(洪胤)은 지위가 금자광록대부 수태보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병부사(金紫光祿大夫 守太保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兵部事)에 이르러 사망하고, 추증된 시호는 경문공(景文公)이다. 증조부는 금자광록대부 검교태부 수사공 중서문하시랑평장사 상주국(金紫光祿大夫 檢校太傅 守司空 中書門下侍郞平章事 上柱國)으로 사망하고 추증된 시호가 정순공(靖順公)인 관(灌)이다. 어머니 임씨(任氏)는 정안군부인(定安君夫人)에 봉해졌는데, 그 아버지는 상서도관낭중 국학직강(尙書都官郞中 國學直講)으로 작고한 인수(絪壽)이다. 이것이 공의 가세(家世)이다.
공은 부귀[綺紈]에 마음을 두지 않고, 얼음과 같이 맑고 물과 같이 깨끗하였으며, 담백하고 강직하고 총명하였다. 갑인년(고종 41, 1254 ) 봄에 처음으로 강화판관(江華判官)의 벼슬을 얻었는데, 그 해 과거에 급제하였다.
4 을묘년(고종 42, 1255) 겨울에 연릉직(延陵直)에 임명되고, 병진년(고종 43, 1256) 가을에 비서교감(秘書校勘)이 되었다.
중통(中統)
5 원년(원종 1, 1260)에 처인현
6령(處仁縣令)이 되어 나가고, 4년(원종 4, 1263) 12월에 들어와 대관승(大官丞)이 되면서 이에 식목녹사(式目錄事)를 겸대하였다. 지원(至元)
7 6년(원종 10, 1269) 북계(北界)의 좌막(佐幕)이 되었는데 변고가 있을 것을 미리 알고, 바다를 건너 서울로 가서 연도(燕都, 北京)로 가는 임금의 행차를 호위하였다. 7년(원종 11, 1270)에 귀국하여 서▨(犀 〔帶〕)를 받고 오부(烏府, 御史臺)에 들어갔다. 8년(원종 12, 1271)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로 옮기고, 9년(원종 13, 1272)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서 보주
8부사(甫州副使)가 되었다가 충주판관(忠州判官)으로 옮겼다. 임기가 차자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이 되었다.
12년(충렬 1, 1275) 가을에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으로서 교주도(交州道)
9 안찰사(按察使)로 나갔으며, 판도좌랑(版啚佐郞)으로 옮겼다. 13년(충렬 2, 1276)에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되고, 15년(충렬 4, 1278) 가을에 전리좌랑(典理佐郞)으로서 전라도 안찰사(全羅道 按察使)로 나갔다가 10월에 비서승(秘書丞)이 되었다. 16년(충렬 5, 1279) 봄에 중사랑 지제고(中舍郞 知制誥)가 되고, 경상도 안찰사(慶尙道 按察使)로 나갔다. 18년(충렬 7, 1281)에 첨의전서 지제고(僉議典書 知制誥)가 되었다. 19년(충렬 8, 1282) 봄에 동계 안집사(東界 安集使)가 되어 나가고, 8월에는 조산대부 판도총랑(朝散大夫 版啚摠郞)이 되었으며,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의 수령으로 나갔다. 23년(충렬 12, 1286)에 조현대부 시전법총랑 지제고(朝顯大夫 試典法摠郞 知制誥)로서 복명(復命)하였다. 24년(충렬 13, 1287) 봄에 전리총랑 지제고(典理摠郞 知制誥)로서 충청도 안찰사(忠淸道 按察使)가 되고, 6월에 조봉대부(朝奉大夫) 대부(大府)▨▨▨▨▨▨에 임명되었다. 9월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옮기고, 12월에 충사관수찬관(充史館修撰官)이 되었다. 25년(충렬 14, 1288)에 좌사의(左司議)로 보문서직학사(寶文署直學士)를 겸대하였다. 27년(충렬 16, 1290 )에 궁핍한 도적이 국경을 쳐들어오자
10 중렬대부 좌사의 보문학사 지제고(中烈大夫 左司議 宝文學士 知制誥)로 ▨▨▨▨▨휘사(揮使)가 되어 나갔다. 28년(충렬 17, 1291) 영렬대부 판대부사(榮烈大夫 判大府事)가 되고, 29년(충렬 18, 1292) 정헌대부 판비서사 응선부좌첨사(正獻大夫 判秘書事 膺善府左詹事)로 옮겼다. 31년(충렬 20, 1294) 황제가 명하여 탐라(耽羅)가 다시 우리 영토가 되었는데, 처음 부절(符節)을 나눌 때 적임자를 찾기 어려웠으나 공이 명을 받고 가서 능히 옛 모습을 극복하였다.
원정(元貞)
11 2년(충렬 22, 1296) 홍추(鴻樞)로서 벼슬에서 물러났다. 스스로 소헌무착거사(笑軒無著居士)라 부르고, 항상 『금강경(金剛經)』을 읽으면서 날마다 정업(淨業)을 닦다가, 향년 73세로 집에서 돌아가셨다. 무릇 벼슬한 이래 청렴하고 공평한 것을 일로 삼아 중앙과 지방에서 훌륭하게 근무하였고, 고려와 원[東西]에서 오직 왕명에 따르며 시종일관 절조를 한결같이 지키니 업적이 뛰어났다.
처음 비서감(秘書監) 민휘(閔徽)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네 명을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다시 밀직부사 군부판서 상장군(密直副使 軍簿判書 上將軍) 박부(朴琈)의 셋째 딸과 결혼하였는데, 공손하고 삼가며 정숙하여 아내로서의 덕이 있었다. 4남 2녀를 낳으니, 장남 중유(仲濡)는 좌사랑 지내지(左史郞 知內旨)로 재능이 있고 총명하다. 2남 정오(晶悟)는 중이 되었고, 3남 중자(仲滋)는 연덕궁녹사(延德宮錄事)이며, 4남 원귀(元貴)도 중이 되었다. 장녀는 근시호군(近侍護軍) 김륜(金倫)에게 시집갔는데, 도첨의참리 집현대학사 동수국사 상장군 문신공(都僉議叅理 集賢大學士 同修國史 上將軍 文愼公) 김변(金賆)의 아들로 행정 능력이 크게 뛰어나다. 2녀는 광평부전첨(廣平府典僉) 조문근(趙文瑾)에게 시집갔는데, 부지밀직 상장군(副知密直 上將軍) 조변(趙抃)의 아들로 학업을 닦고 있다.
▨▨지위에 올랐으면서도 덕을 갖추지 못한 자도 후손이 있는데, 공의 생애가 이러하니 후손이 없겠는가. 족제(族弟)인 삼사총랑 지내지(三司摠郞 知內旨) 임중▨(林仲▨)이 글을 짓는다.
명(銘)하여 이른다.
최씨는 이름난 성[顯姓]이니, 대대로 학문으로 명성을 떨쳤다.
가지가 나뉘어 족속이 창성하고 가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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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륭한 명성이 이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