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공(文愼公) 묘지명<題額>
광정대부 도첨의참리 집현전대학사 동수국사(匡靖大夫 都僉議叅理 集賢殿大學士 同修國史) 김변(金賆) 묘지
광정대부 정당문학 보문각대학사 동수국사(匡靖大夫 政堂文學 寶文閣大學士 同修國史)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김훤(金晅)이 짓다.
공의 성은 김씨(金氏)이고, 이름은 변(賆)이며, 자는 손지(損之)로, 언양군(彦陽郡) 울산광역시 울주군(蔚州郡)
1사람이다. 아버지는 금자광록대부 수대부 문하시랑평장사 상장군 판이부사(金紫光祿大夫 守大傅 門下侍郞平章事 上將軍 判吏部事)이자 추증된 시호가 익대공(翊戴公)인 전(전)이고, 조부는 금자광록대부 수대사 특진 개부의동삼사 문하시랑평장사 상주국 판이부사 대자대사(金紫光祿大夫 守大師 特進 開府儀同三司 門下侍郞平章事 上柱國 判吏部事 大子大師)이자 추증된 시호가 위열공(威烈公)인 취려(就礪)이며, 증조는 조의대부 금오위대장군(朝議大夫 金吾衛大將軍)인 부(富)이다. 어머니는 창원군대부인 최씨(昌原郡大夫人 崔氏)이다. 외조부는 은청광록대부 상서우복야 한림학사승지(銀靑光祿大夫 尙書右僕射 翰林學士承旨) 종재(宗梓)인데, 특진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수대사 중서시랑평장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 판이부사(特進 三重大匡 開府儀同三司 守大師 中書侍郞平章事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判吏部事) 선(詵)의 아들이고, 중서평장 집현전대학사(中書平章 集賢殿大學士) 유청(惟淸)의 손자이다.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 세자사(匡靖大夫 僉議中贊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典理事 世子師)이고 추증된 시호가 문경공(文敬公)인 허공(許珙)이 공의 장인이다. 이상이 공의 세계[家世]이다.
공은 무신년(고종 35, 1248)에 태어났다. 16세에 문음(門蔭)으로 동면판관(東面判官)이 되고, 21세가 되는 무진년(원종 9, 1268)에 과거[春場]에 급제하였다.
2 다음해에 국자박사(國子博士)에 오르고, 경오년(원종 11, 1270)에 각문지후(閣門祗候)가 되었다. 신미년(원종 12, 1271)에 지금의 임금<忠烈王>이 세자로서 황제의 궁정에 입시(入侍)하게 되자, 공을 예부낭중(禮部郎中)으로 삼아 수종(隨從)하게 하였는데, 원의 조정에서 4년 동안 힘써 일하면서 보좌하고 이끈 공이 많았다. 왕실에서 글[表]을 올려 공주를 청하자, 공과 일행은 공주가 시집오는 경사를 도와 이루게 하였는데, 이 분이 안평공주(安平公主)
3이다. 갑술년(충렬 즉위, 1274)에 양주(兩主, 세자와 안평공주)를 받들고 귀국하고, 우리 임금이 즉위하는 경사까지 만나 두루 태평하게 하였으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삼한(三韓)이 복을 받고 있는 것은 이 일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공은 2등 공신이 되어 녹권(錄券)을 받고, 상(賞)이 자손에까지 미쳤다.
이후 청요직(淸要職)을 거쳤으나, 젊은 나이에 중요한 직위를 맡았으므로 분수를 지키고 승진을 늦추고자 하여 외직에 보임해 주기를 거듭 청하였다. 인주(仁州)
4, 개성(開城), 안서(安西)
5등 세 곳의 ▨을 거쳤다. 느릿느릿 걷는 걸음이 오히려 먼 길을 빨리 가게 하나니 ‘하늘이 내려주지 않으면 더욱 어렵다’는 바와 같은 것이다. 정축년(충렬 3, 1277)에 중도(中道)의 안찰사(按察使)가 되어 나가고, 38세인 을유년(충렬 11, 1285)에 3품이 되어 이경(吏卿)을 거쳐 지위가 판제조(判諸曹)에 이르렀는데, 고원(誥院)을 떠나지 않았다. 경인년(충렬 16, 1290)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6을미년(충렬왕 21, 1295)에 우승지(右承旨)가 되었으며, 무술년(충렬 24, 1298)에 봉익대부 부지밀직(奉翊大夫 副知密直)이 되었다. 이 해에 서북면 도지휘사(西北面 都指揮使)가 되어 나갔다가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어 들어왔다. 기해년(충렬 25, 1299)에 광정대부 판삼사사 보문각대학사(匡靖大夫 判三司事 寶文閣大學士)가 되었다가, 곧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로 옮겼다. 경자년(충렬 26, 1300)에 참리 집현전대학사 동수국사(叅理 集賢殿大學士 同修國史)로 올랐다. 이것이 공이 거친 관품의 대략이다.
공의 동복(同腹)으로는 누이 세 명과 형 네 명이 있다. 큰 누이는 어견룡행수 낭장(御牽龍行首 郎將) 이분양(李汾陽)에게 시집갔으나, 이공이 일찍 작고하여 홀로 되었다. 큰 형은 조봉대부 위위윤(朝奉大夫 衛尉尹)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저(貯)로, 일찍 작고하였으나 그 딸이 궁중에 들어가 숙창원비(淑昌院妃, 忠烈王妃)가 되었다. 둘째 누이는 중대광 도첨의시랑 찬성사 상장군(重大匡 都僉議侍郞 贊成事 上將軍) 김혼(金琿)공에게 시집갔는데, 무인년(충렬왕 4, 1278)에 작고하였다. 둘째 형은 광정대부 도첨의참리(匡靖大夫 都僉議叅理)로 은퇴한 군(頵)으로 기해년(충렬왕 25, 1299) 11월에 작고하였다. 셋째 형은 봉익대부 밀직부사 판도판서(奉翊大夫 密直副使 版圖判書)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중보(仲甫)로 지금 건강하게 생존해 있고, 네째 형은 화엄업(華嚴業)의 승통(僧統) 탄여(坦如)로 기해년(충렬왕 25, 1299) 8월에 입적(入寂)하였다. 셋째 누이는 소부소윤(小府少尹) 김유지(金由祉)에게 시집갔다.
공의 후사(後嗣)는 모두 4남 3녀이다. 장남 견룡행수 낭장(牽龍行首 郎將) 윤(倫)은 봉익대부 밀직부사 문한학사(奉翊大夫 密直副使 文翰學士)로 은퇴한 최서(崔瑞) 공의 딸과 결혼하였고, 차남 근시별장(近侍別將) 우(禑)는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판도판서 문한학사승지(奉翊大夫 知密直司事 版圖判書 文翰學士承旨) 전승(全昇)공의 딸과 결혼하였다. 3남은 유가업(瑜伽業)의 삼중대사(三重大師) 현변(玄抃)이고, 4남은 어리다. 장녀는 근시 전 조봉대부(近侍 前 朝奉大夫) 이계감(李季瑊)에게 시집갔으나 경자년(충렬 26, 1300) 5월에 먼저 작고하였다. 차녀는 무자년(충렬 14, 1288)에 의관(衣冠)의 동녀(童女)로 뽑혀 원(元)으로 갔고, 3녀는 어리다. 이들이 공의 형제와 자손들인데, 손자와 조카들은 글이 번거로워 적지 않는다.
공은 성품이 순박하고 온후하며 꾸밈이 없었다. 대대로 이어온 명문의 후예로서 약관(弱冠)의 나이에 벼슬하였으나 정도(正道)를 밟아 공사(公事)를 받들고, 지위가 높아 재상[黃扉]에 이르렀으나 끝까지 견책(譴責)을 받을 만한 조그마한 잘못도 없었으니, 참으로 신중하고 은근한 군자이다. 대덕(大德)5년 신축년(충렬 27, 1301) 3월 11일에 병들어 누웠다가 4월 초2일에 돌아가셨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추도하여 담당 관리에게 뒷일을 돕도록 명하고, ▨조(▨弔)와 뇌서(誄書)를 내려 그 공덕을 나타내고 자손들에게 총애를 보였다. 이 해 5월 22일에 대덕산(大德山) 남쪽 기슭에 장례지내니, 예(禮)에 따른 것이다.
나는 인친(姻親)으로서 특별히 보살핌을 두텁게 받았으므로 비통함이 더욱 깊다. 공의 아들과 사위들이 와서 묘지명을 청하니, 늙고 어리석다고 사양할 수 없어서 억지로 시말(始末)을 적는다.
대덕(大德)
7 5년 신축년 5월 일에 족헌노인(足軒老人) 김훤(金晅)이 짓다.
명(銘)하여 이른다.
덕망과 작위와 공훈과 명성은 하늘이 이미 내려주었지만하늘이 돕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다만 그 수(壽)를 주는 일에 인색하였기 때문이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