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공(文敬公) 묘지<題額>
돌아가신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 僉議中贊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典理司事 世子師)이고 추증된 시호가 문경(文敬)인 허공(許公) 묘지공의 이름은 공(珙)이고, 자는 산휘(山輝)이며, 공암현(孔嵒縣)
1 사람이다. 증조 이섭(利涉)은 전구서승(典廐署丞)이고, 조부 경(京)은 예빈소경 지제고(禮賓少卿 知制誥)이며, 아버지 수(遂)는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한림학사승지(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 翰林學士丞旨)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였는데, 현종대왕(顯宗大王)의 왕자인 대사(大師) 왕충(王冲)의 6대 외손이다. 어머니는 신정군부인 장씨(新定郡夫人 張氏)로 합문지후(閤門祗候) ▨우(▨友)의 딸이다. 시조[鼻祖]로부터 공에 이르는 무릇 11대의 세계(世系)에 벼슬아치가 잇달아 배출되고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서로 이어져 내려 왔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하였고, 재능과 도량이 뛰어났다. 19세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2 23세에 문음(門蔭)으로 바로 복두점녹사(幞頭店錄事)에 임명되었다. 무오년(고종 45, 1258 )에 권신(權臣)들이 제거되고 정치가 왕실로 돌아가게 되자,
3 문사(文士)를 간택하게 되어 정당(政堂)에 들어갔다.
4 공은 그 때 아직 급제하지 않았으나 학문의 재능과 행정 능력에 있어서 능히 따를 만한 자가 없었으므로, 이에 선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곧 이어 내시(內侍)로 들어가고 대악서승(大樂署丞)에 임명되었다. 그 해에 제2생(第二生)으로 바로 과거에 응시하여 제5인으로 급제하고,
5 대학박사(大學博士)로 옮겨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에 제수되고, 이후 비서랑 호부원외랑 국학직강 이부낭중 직보문각 국자사업 충사관수찬관 조산대부 호부시랑 보문각대제 지제고 동궁시강학사(秘書郞 戶部員外郞 國學直講 吏部郎中 直寶文閣 國子司業 充史館修撰官 朝散大夫 戶部侍郞 寶文閣待制 知制誥 東宮侍講學士)를 거쳤다.
37세인 기사년(원종 10, 1269)에 추밀원우부승선 이부시랑 한림시독학사 태자우찬선대부(樞密院右副承宣 吏部侍郞 翰林侍讀學士 太子右贊善大夫)에 임명되고, 조청대부 대복경 지어사대사 국자감대사성 한림학사(朝請大夫 大僕卿 知御史臺事 國子監大司成 翰林學士)에 이르렀는데, 모두 지제고(知制誥)[三字]를 겸하면서 덕화(德化)를 이루는 데 참여하였다. 40세인 임신년(원종 13, 1272)에는 은청광록대부 첨서추밀원사 한림학사승지(銀靑光祿大夫 簽書樞密院事 翰林學士承旨)에 임명되고, 곧 이어 추밀원부사 우산기상시 동지원사(樞密院副使 右散騎常侍 同知院事)에 올랐다. 조정이 원의 관제(官制)를 피하게 되자
6 중의대부 밀직사사 감찰제헌 세자원빈 판밀직(中議大夫 密直司使 監察提憲 世子元賓 判密直)에 임명되었다. 47세인 기묘년(충렬 5, 1279)에는 광정대부 지첨의사 보문서대학사 동수국사 참문학사 판판도사 집현전대학사 수국사 판군부사사(匡靖大夫 知僉議事 寶文署大學士 同修國史 叅文學事 判版圖事 集賢殿大學士 修國史 判軍簿司事)가 되고, 54세인 병술년(충렬 12, 1286)에는 첨의시랑찬성사 수문전대학사 판전리사사(僉議侍郞贊成事 修文殿大學士 判典理司事)가 되었다.
정해년(충렬 13, 1287) 여름 상국(上國, 元)의 변방에 일이 생기자, 7월에 임금이 군사를 거느리고 전투를 돕게 되었다. 공이 임금을 호종하기를 청하였으나, 남아서 우리 조정을 지킬 사람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다시 글[奏]을 올려 “신이 비록 용기가 없으나 지금 임금께서 외국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터에 신이 어찌 마음 편안하게 앉아서 밥을 먹고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 말이 지극히 간절하였으므로 임금이 허락하였다. 임금이 돌아오게 되자, 그 공을 가상하게 여겨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승진하여 임명하였다.
신묘년(충렬 17, 1291) 6월 하순에 처음 가벼운 병이 들었는데, 오래 되면서 점차 위독해져서 8월 초8일 인시(寅時)에 집에서 돌아가셨다. 향년 59세이다. 임금이 부음을 듣자 슬퍼하고 추모하여 곧 셋째 아들 관(冠)에게 8품의 관직을 내려주고, 담당 관리에게 일을 도와주도록 명하였다. 보현원(普賢院)의 서산 기슭에 장례지내고, 시호를 문경공(文敬公)이라고 하였다.
공은 성품이 본래 지조가 굳건하며 순박하고 신중하고 검소하였으며, 그럴싸하게 꾸미며 자랑하거나 아첨하지 않았다. 중요한 지위에 있던 15년 동안 사람을 평가하면서 항상 잘못된 일이 없는지 다시 살펴 구제하도록 하였으며, 재상의 지위에 있던 20년 동안 더욱 충성스럽고 조심을 다하여 끝까지 신하의 절조를 드러내었다.
약관의 나이에 벼슬하여 시중으로 임명되기까지 항상 총애와 영예를 누리면서 한 번도 견책을 받거나 탄핵된 일이 없었다. 세 차례 과거[禮闈]를 주관하여 밝고 강한 이를 가려 뽑았는데,
7 문하의 훌륭한 인재들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중의 반은 대각(臺閣)에 있다.
기축년(충렬 15, 1289) 11월에 임금과 세자가 천자의 궁정에 조회하러 갔을 때 공은 권행상서성사(權行尙書省事)로 있었다. 경인년(충렬 16, 1290) 정월에 삭방도(朔方道)
8를 지키는 장수가 “구적(寇賊, 哈丹賊)이 우리의 강토를 쳐들어오려고 하여 인심이 흉흉하니 어떻게 하여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종실과 재보(宰輔)와 은퇴한 원로 재상들이 대궐에 모여서 난리를 피할 일을 논의하였는데, 모두들 “인민을 거느리고 섬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홀로 단정하여 말하기를 “사람을 보내 다시 구적들을 살피게 하여 그들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한다면, 그 때 섬으로 들어가 사직을 편안하게 하여도 오히려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임금이 원[王庭]을 방문하고 있는데, 조정의 대신들이 어찌 함부로 도읍과 백성을 옮기는 일을 가볍게 거론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여러 논의가 이에 잠잠해졌다. 적의 동향을 살펴보니 과연 구적이 여진(女眞) 땅에 머물고 있다고 하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조정에서 상당히 우러러보았다.
공은 처음 정당문학(政堂文學) 윤극민(尹克敏)공의 큰딸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근시낭장(近侍郎將) 정(정)으로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기(奇)▨▨공의 딸과 결혼하였고, 2남은 조현대부 장군 감찰시사(朝顯大夫 將軍 監察侍史) 평(評)으로 찬성사 상장군(贊成事 上將軍)인 염(廉)▨▨공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3남은 대창서승(大倉署丞) 관(冠)이다. 장녀는 정승대부 판비서시사 문한시강학사 지제고(正丞大夫 判秘書寺事 文翰侍講學士 知制誥) 김변(金賆)에게 시집갔고, 2녀는 승사랑 비서소윤 지제고(升仕郞 秘書少尹 知制誥) 김순(金恂)에게 시집갔다.
(공은) 뒤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최징(崔澄)공의 여섯째 딸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낳았다.
9 장남은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 총(寵)이고, 2남은 동면도감판관(東面都監判官) 부(富)이며, 장녀는 수태위 상주국 평양후(守太尉 上柱國 平陽侯) 현(昡)
10에게 시집갔으며, 2녀는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조연(趙璉)에게 시집갔다.
조정에 등용된 인사들이 (공의) 한 가문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니, 아, 공의 평생은 이미 온전한 아름다움을 갖추었다. 그러나 하늘은 어찌하여 홀로 그의 장수를 아까워하는가.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는 일이 조물주가 명을 주고 빼앗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잠시 (공의) 보살핌을 받았고, 또 묘지명을 청하여 왔으니, 서툴게나마 서술하여 글을 짓는다.
명(銘)하여 이른다.
우리 공은 조용하고 검소하고 겸손하였으며
총명하여 약관의 나이에 성균관[泮宮]에 높이 올라갔다.
기약한 대로 과거에 급제하여 정당(政堂)의 동쪽에 들어가
오로지 각각의 인물을 가려 뽑고 임금을 도우며 충성을 다하였다.
일찍이 재상의 지위에 오르니 복과 녹이 모두 풍족하였고
56세에 우뚝하게 시중(侍中)이 되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 뜻을 두니 음공(陰功)이 많이 있으며
세 차례나 과거[棘院]를 주관하여 영웅을 다 뽑았다.
▨ 허물을 보이지 않고 한결같이 잘 지켰으나
하늘은 어찌 수(壽)를 내리지 않아 죽음이 급하게 다가왔는가.
5남 4녀를 두었으니 자손이 창성하고
왕손(王孫)이 사위가 되어서 가풍(家風)을 다시금 떨치게 되었으니
가계가 10세를 연이어 오면서 선을 행한 것이 모여진 것이로다.
나는 오직 오래된 인척(姻戚)으로 슬픔과 기쁨을 다하여 애통해 하며
좋은 돌에 명(銘)을 새겨 말갈기 같은 무덤에 봉하여 넣는다.
지원(至元)
11 28년 신묘년(충렬 17, 1291) 9월 일 쓰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