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 僉議中贊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典理司事 世子師) 원공(元公) 묘지
살펴보건대, 예로부터 사대부는 처음 그 지위가 낮았을 때는 마음을 고상하게 가져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면서, 항상 두 명의 소(疎)
1씨를 훌륭하다고 한다. 부귀에 바야흐로 맛들이게 되면 세월이 가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며 관청의 문에 몸을 굽혀 공경하고, 안온함에서 물러날 줄을 모르는 자들이 많은데, 오직 우리 시중(侍中) 원공(元公)만은 이와 다르다. 66세에 옷소매를 떨치고 용감하게 물러나니, 이는 『주역(周易)』에 이르는 바 진퇴와 존망에 그 바름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의 이름은 부(傅)인데, 처음 이름은 공식(公植)이고, 자는 성지(成之)이다. 스스로 호를 족헌수재(足軒秀才)라고 하였으며, 근원은 원주(原州)에서 나왔다. 증조 예(禮)는 상의봉어(尙衣奉御)이고, 조부 승윤(承胤)은 좌사간 지제고(左司諫 知制誥)를 지냈으며, 아버지 진(瑨)은 도재고판관(都齋庫判官)이었는데 공이 귀하게 되자 예빈경(禮賓卿)에 추봉되었다. 어머니 정씨(鄭氏)는 본관이 창령군(昌寧郡)으로, 외조 희(禧)는 대부경 한림시독학사(大府卿 翰林侍讀學士)를 지냈다.
공은 나이 겨우 18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올랐고
2, 22세에 과거[春官試]에 급제하였다.
3 24세에 중원목
4사록(中原牧司錄)에 부임하였고, 33세에 동문원녹사(同文院錄事)에 임명되었다. 여러 차례 옮기면서 잡직령 대관령 겸 직사관 중서주서(雜職令 大官令 兼 直史館 中書注書)가 되었다. 무오년(고종 45, 1258 ) 4월에 의로운 선비들이 모여 권문(權門)을 소탕하고 임금[大內]이 다시 정치하게 할 것을 논의할 때
5 정당(政堂)에 뽑혀 들어오고, 그 해 가을에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에 임명되었다. 비서랑 예부·병부·이부 원외낭중 대부소경 호부시랑 대자사경 내직랑 국학직강 보문각대제 직학사 충사관수찬관 지제고(秘書郞 禮部·兵部·吏部 員外郞中 大府少卿 戶部侍郞 大子司經 內直郞 國學直講 寶文閣待制 直學士 充史館修撰官 知制誥)로부터 추밀원 우부·좌부승선(樞密院 右副·左副承宣)까지가 9년 동안 역임한 맑고 화려한 관직이다. 48세에 예빈경 조청대부 한림시독학사(禮賓卿 朝請大夫 翰林侍讀學士)에 임명되고, 얼마 뒤 한림학사 대자우유덕 중산대부 판예빈성사 지어사대사(翰林學士 大子右諭德 中散大夫 判禮賓省事 知御史臺事)가 되었다.
50세에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우상시 한림학사승지(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 右常侍 翰林學士承旨)가 되고, 그 해에 임금<元宗>이 상국(上國, 元)에 조회하러 거둥할 때 뽑혀서 배행(陪行)하며 특별한 공이 있었다.
6 이듬해 여름에 임금의 행차를 따라 고려로 돌아왔는데, 상부(相府)에 들어가 금자광록대부 정당문학 이부상서 보문각대학사 동수국사 판삼사사 대자소보(金紫光祿大夫 政堂文學 吏部尙書 寶文閣大學士 同修國史 判三司事 大子少保)가 되었다.
신미년(1271, 元宗 12년)에 지금의 임금<忠烈王>이 동궁(東宮)으로 원에 조회할 때 공이 또한 행차를 따라갔다. 수사도 수대보 참지정사 중서·문하시랑 양성평장사 집현·수문 양전대학사 수국사 감국사 대자소사 대보(守司徒 守大保 叅知政事 中書·門下侍郞 兩省平章事 集賢·修文 兩殿大學士 修國史 監國史 大子少師 大保)는 이 4년 동안 역임한 높은 직책이다. 을해년(충렬 1, 1275)에 원 조정의 뜻[旨]에 따라 관직의 명칭을 고치게 되자 광정대부 첨의시랑찬성사 판군부사사 세자부(匡靖大夫 僉議侍郞贊成事 判軍簿司事 世子傅)가 되었다. 무인년(충렬 4, 1278)에 임금을 따라 원의 조정에 가고, 계미년(충렬 9, 1283)에 판전리사사 세자사(判典理司事 世子師)로 총▨(〔冢宰〕)가 되었다. 을유년(충렬 11, 1285 )에 과거[東堂試]의 지공거(知貢擧)가 되었으나 굳게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7
지위가 황각(黃閣, 宰府)에 있으면서 하늘을 대신하여 사물을 다스리기 16년이었다. 나이 66세가 되자 관리로 적을 둔 지 42년
8에 이르렀으므로, 나이를 이유로 물러나기를 청하자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서 나머지는 이전과 같이 하여 은퇴하였다. 전원에서 거문고와 바둑으로 즐기면서 재물을 멀리하며 흡족해 하였다.
공의 글씨는 상대할 자가 없었는데 여청궁(麗淸宮)의 벽에 글씨를 썼다. 무릇 남성시(南省試)를 맡은 것이 한 번이고, 예부시(禮部試)를 맡은 것이 두 번이었는데
9, 뽑은 이들이 모두 일대(一代)의 이름난 사람들이었다. 공이 사임하자 세 번의 과거에 합격한 문생(門生)들이 잔치를 크게 벌여 은퇴하게 된 경사를 위로하였다.
정해년(충렬 13, 1287) 2월 초9일에 홍도정리(紅桃井里)의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68세이다. 그 곳에 빈소를 마련하고, 윤2월 23일 갑신일에 홍화산(弘化山)의 동쪽 기슭에 장례지냈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하여 조회를 사흘 동안 멈추었으며, 문순공(文純公)이라는 시호를 추증하고, 백관들이 장례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공은 예빈경(禮賓卿) 염수장(廉守臧)의 큰딸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관(瓘) 「원관 묘지명」참조.
은 지금 정승대부 판비서시사 보문서학사(正承大夫 判秘書寺事 寶文署學士)이고, 막내아들 경(卿)은 조봉대부 천우위섭대장군(朝奉大夫 千牛衛攝大將軍)이다. 딸은 좌중금지유낭장(左中禁指諭郞將) 김흥예(金興裔)에게 시집갔으니, 내외의 ▨(〔손자〕)들이 뜰에 가득 찼다.
장례 일을 마무리 지으면서 두 아들이 묘지명을 청하였다. 아, 나는 다시는 공과 같이 어진 사람과 군자를 보지 못할 것이다. 눈물과 콧물이 흘러 붓을 적시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명(銘)을 짓는다.
명(銘)하여 이른다.
태성(台星)의 정수를 받고 숭악(嵩岳)이 기이함을 내리니,
임금을 사랑함이 지극히 간절하고, 손님을 대하며 피곤함을 잊었도다.
죽당(竹堂)에서 인재를 양성한 것이 거의 12년[一紀]이나 되고
조정에서 정권을 잡은 지가 16년이 되는도다.
부귀와 공명을 누리면서 평생이 한결 같으니
지금 해동(海東)에서 다시 분양(汾陽)
10을 만나도다.
세 차례 과거에서 문생이 배출되니 복사꽃과 오얏꽃 처럼 향기로운 선비들이고
두 아들이 직무에 능숙하니 난(鸞)새와 봉(鳳)새가 날아 오르듯 훌륭한 관리가 되도다.
호랑이 머리 같이 산이 일어나 있고, 용의 뱃속 같이 강이 길게 흘러가니
만세(萬世)동안 영원할 무덤에 천손(千孫)이 번창하리로다.
명(銘)을 새겨 무덤에 넣었으니 무덤길이 빛나도다.
지원(至元)
11 24년 정해년(충렬 13, 1287) 윤2월 일에 쓰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