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정대부 첨의시랑찬성사 보문서대학사 동수국사 판문한서사(匡靖大夫 簽議侍郞贊成事 寶文署大學士 同修國史 判文翰署事) 김구(金坵) 묘지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본(本)이 없으면 서지 못하고, 문(文)이 없으면 행하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충신(忠信)
1이 ▨(〔本〕)이고, 의리(義理)가 문(文)이다. 충성과 신의의 ▨(〔本〕)이 의리의 문(文)에서 행해지는 것을 내가 문정공(文貞公)에게서 보았다.
공의 이름은 구(坵)이고, 옛 이름은 백일(百鎰)이며, 자는 차산(次山)으로, 부령현(扶寧縣)
2 사람이다. 아버지 정(挺)은 ▨▨ 예전의 이름난 선비인데, 지후(祗侯)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부인 김씨(夫人 金氏)로 ▨▨의 딸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하였고, 자라서는 글을 잘 지었다. 17세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3 22세에 과거[春官]에 응시하여 을과(乙科)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
4 급제할 때의 좌주(座主)는 김정숙공(金貞肅公, 金仁鏡)이었는데, 그 또한 제2인으로 급제하였으므로 이에 의발(衣鉢)을 전해준 옛 일을 말해주면서
5 더욱 총애하였다. ▨계(▨啓)를 바쳐서 사례하니 지금까지 사육변려문(四六騈儷文)의 귀감이 되고 있다.
6 병신년(고종 23, 1236 )에 탐라(耽羅)
7의 수령이 되어 나갔는데, 청렴하고 명민함으로 칭송받았다. 임기가 차자 서울로 돌아와 서장관(書狀官)에 충당되어 북국(北國, 元)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매우 이름을 ▨ 날렸다. 신축년(고종 28, 1241) 가을에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들어갔으며, 6년 동안 세 번을 옮겼지만 귀에 방울끈[鈴索]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8 시문과 상소문[詞疎]은 구름처럼 빼어났는데, ▨이 나면 더욱 훌륭하였다.
정미년(고종 34, 1247) 여름에 임시로 횡반(橫班)에 보임되었다. 이 해부터 해마다 승진하여 3품에 이르렀는데, 역임한 것은 모두 청요직이었다. 일찍이 외관으로 나간 적이 없으니, 진실로 대문장가였으므로 하루라도 잠시 조정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사년(원종 10, 1269) 겨울에 은청광록대부 상서좌복야[銀靑光祿大夫 文昌左相]에 임명되고, ▨년에 추원(樞院)에 들어가 좌상시(左常侍)를 겸하였다. 또 이듬해에 금자(金紫)를 더하면서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고, 참지정사 수대위 중서평장사(叅知政事 守大尉 中書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지금의 임금<忠烈王>이 즉위한 지 2년이 되는 을해년(충렬 1, 1275)에 원(大元國)의 조칙을 받들어 관호(官號)를 개정하자, 지금의 관직을 고쳐 받았다. 그 사이에 사마시(司馬試)를 맡고
9 예부시[春闈]를 주관하였는데,
10 뽑은 사람들이 모두 이름난 선비였으므로 진신(搢紳)들이 서로 축하하였다. ▨에 이르러서는 참되게 행동하며, 용모가 깨끗하고 말을 정중하게 하였으며, 사사로운 일에는 서툴렀으나 관직에 임할 때는 민첩하였다. 재상의 지위에 10년 동안 있으면서 사리(私利)를 도모하지 않고, 사직(社稷)을 염려하며 감히 직언을 피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사랑하였으니, 이것이 공의 바탕[本]이다.
또 신묘년(고종 18, 1231)부터 (원에) 사대(事大)한 이래 농서 문순공(隴西 文順公, 李奎報)이 대학자로서 천자에게 올리는 상서문[章奏]를 오로지 하였는데, 그 뒤 변고가 어지럽게 발생하여 이 임무가 크게 어려워졌다. 공이 일을 맡으면서 붓을 잡게 되자, 어의(語義)가 모두 절묘하고 설명이 지면(紙面)에서 간곡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에 수천 리 밖에서 보는 사람들도 마치 얼굴을 마주 대고 말하는 것과 같아 오늘의 편안함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것이 공의 문(文)이다.아, 충신(忠信)의 본(本)과 의리(義理)의 문(文)이 사람의 눈과 귀에 방울소리 같이 울리며 족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어진 후손인 낭관(郞官)이 또 돌에 묘지명을 새겨 영원토록 황천에 전하고자 하여 은근하게 부탁하였다. 내가 낭관과 일찍이 여러 해 동안 함께 지내면서 정호(情好)가 남과 달라서 의리상 감히 거절할 수 없어서, 억지로 글을 쓰지만 매우 부끄럽다.
공은 춘추 68세인 지원(至元)
11 15년(충렬 4, 1278) 9월 26일에 병이 들어 개경[松京] 광리(廣里)의 집에서 돌아가셨다. 임금이 매우 근심하고 탄식하여 ▨ 부의(賻儀)를 내려 총애를 표하며, 시호를 내리는 뇌서(誄書)를 보내어 애도하였다. 11월 23일 초산(椒山) 기슭에 장례지내니, 공의 일생[哀榮終始]이 여기에 갖추어졌다.
첫 부인 박씨(朴氏)는 내시령동정(內侍令同正) 박 (미기재)의 딸로 공보다 먼저 작고하였다. 딸 한 명을 낳았는데, 지후(祗候) 이 (미기재)에게 시집갔다. 후부인(後夫人) 최씨(崔氏)는 예빈경(禮賓卿)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최 (미기재)<변>의 딸로,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汝盂>은 약관(弱冠)에 과거에 급제하여 완산목부사(完山牧副使)가 되었고, 장녀는 보문서교감랑(寶文署校勘郞) (미기재)<鄭瑎>에게 시집갔으며, 2남<宗盉>은 수창궁녹사(壽昌宮錄事)인데 아직 결혼하지 않고 대부인을 모시고 있다. 막내<冲壯>는 머리를 깎고 조계종의 승려인 안화대선사(安和大禪師)의 제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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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이와 같이 상(喪)을 치르면서 마음을 다하였으되 다만 몸은 상하게 않지 않았으니, 아, 효성스럽도다. 대저 공의 덕행과 문장의 아름다움, 벼슬을 역임하며 보여준 재능의 상세한 내용 및 가세(家世)의 훌륭함은 정적(政籍)과 가첩(家諜)과 시호를 내려주는 뇌서[諡誄]와 사서(史書)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세세하게 적지 않고, 다만 돌아가신 날과 장례를 지낸 때 및 집안의 자녀의 수를 덧붙이기로 한다. 말이 법도에 어긋났다고 꾸짖음이 없기를 바란다.
명(銘)한다.
봉(鳳)새의 깃털과 용의 비늘 같으니,
그 문장을 아름답게 말하자면 청천백일(靑天白日)로도 가히 칭송할 수 없고
그 관작을 서술하고자 한다면 ▨당(〔玉堂〕)과 황각(黃閣, 宰府)으로 일관하였다.
수명이 70세[縱心]도 되지 못하고 꺾였으나 돈독한 의리는 자신도 돌아보지 않았도다.
대개 그 덕을 명(銘)으로 적었으니 무궁토록 전해지리라.
지원(至元) 15년 무인년(충렬 4, 1278) 11월 일 쓰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