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은청광록대부 추밀원사 예부상서 보문각대학사(銀靑光祿大夫 樞密院使 禮部尙書 寶文閣大學士) 한공(韓公) 묘지명
공의 이름은 광연(光衍)이고, 자는 평일(平一)이며, 단주(湍州)
1 사람이다. 증조 규(圭)는 상서형부시랑(尙書刑部侍郞)이고, 조부 안중(安中)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이며, 아버지 약(約)은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판공부사(金紫光祿大夫 叅知政事 判工部事)이고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공은 약관(弱冠)의 나이에 근관(近官)으로서 수궁승(守宮丞)에 임명되었다. ▨ 강화도(江華道)의 마정(馬政)을 잘 감독하여 중상승(中尙丞)으로 옮기고, 다음해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2 조서를 내려 조계종(曹溪宗)의 승선(僧選)을 감독하게 하니, 뽑힌 이들이 모두 뛰어난 인물로, 사검(思儉), 혜문(惠文) 같은 이들이 ▨ 바로 이러한 사람이다. 대창령(大倉令)을 거쳐 합문지후(閤門祗候)로 옮겼다. 임금이 바야흐로 급하게 어진 이를 발탁하고자 하여 공을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로 삼았는데, ▨ 대하는 것이 매우 곧았으므로 조정의 신하들이 두려워하였다. 우사간 기거사인(右司諫 起居舍人)에 오르고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았으며, 얼마 뒤 자어대(紫魚袋)를 하사받았다. 이에 공을 염안사(廉按使)로 천거하니 서해도(西海道)
3를 순시하면서, 백성에 해가 되는 모든 불필요한 정책을 보고하여 없애도록 하였다.
마침 금(金)의 사신이 왔는데, 임금이 궁궐 안의 승평문(昇平門)과 좌우의 낭무(廊廡)가 모두 기울어지고 무너져서 마땅하지 않았으므로, 이에 바로 공에게 명하여 공정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공을 그 힘을 고르게 하여 한 달을 넘기지 않고 완성하였다. 예부낭중(禮部郎中)에 오르고, 교주도(交州道)
4로 다시 나가 풍속을 관찰하기를 서해도(西海道)에서와 같이 하였다. 또 호부시랑(戶部侍郞)으로서 청주목(淸州牧)의 수령이 되자, 법규는 많지 않게 하고 폐해를 없애는 것으로 다스림의 근본을 삼으니, 백성이 크게 화합하여 길가에서 그 치적을 칭송하였다. 병부낭중(兵部郞中)으로 불려왔으며 이전과 같이 자어대(紫魚袋)를 하사하였다.
금의 사신이 다시 오자 공이 맞이하였는데, 행동거지가 반드시 예법과 맞았으므로 사신들로 하여금 낯빛을 고치게 하였다. 예빈소경(禮賓少卿)으로 승진하고, 국자사업 사관수찬(國子司業 史館修撰)으로 옮겼다. 일찍이 명을 받들어 금(大金)에 사신으로 갔으나 마침 달단(韃靼)이 군사를 일으키므로 바로 돌아왔다. 제(制)하여 조산대부 중서사인(朝散大夫 中書舍人)이 더하여지고, 소부감 호·예조시랑 대자찬선대부(少府監 戶·禮曹侍郞 大子贊善大夫)로 옮겼다. 임금이 더욱 칭찬하고 추천하여 “뒷날 크게 등용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품계가 중대부 시대복경(中大夫 試大僕卿)으로 오르고 국자제주(國子察酒)로 고쳤다.
조정이 지방을 중시하게 되자 모두 공을 천거하여 서경유수(西京留守)로 삼았다. 부임하니 신뢰와 성실로써 사람들이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여지게 하였다. 문무의 관직을 제수하면서 공(功)이 있는 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서열대로 하였으며, 역(徭役)을 없애고 어렵고 가난한 자들을 구휼하였다. 이는 모두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었으므로 ▨ 찰방사(察訪使)가 글[狀]을 올려 보고하였다.
요(遼)의 군사가 처음 쳐들어오자
5 공은 지병마사(知兵馬事)로서 좌군(左軍)을 맡았는데, 가는 곳마다 실책이 없었으며 병사들도 패배하지 않았다. 이듬해 적의 선봉이 남쪽에 이르니 공을 전라주도 방호사(全羅州道 防護使)로 삼았다. 도내의 관문(關門)을 닫도록 하고 때때로 또 복병을 매설하여 죽인 자가 많았다. 중군(中軍)을 보좌하게 되었는데, 달단이 가까이 왔다는 소문을 듣자 삼군(三軍)이 모두 기가 꺾이는 모습을 보였다. 원수(元帥) 조충(趙沖)공이 막료들을 모아 의논하면서 “도적은 하나의 계략만으로는 대할 수 없으므로 화친하는 것보다 낳은 것이 없습니다. 그대들도 나라를 위해서 죽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공이 말을 달려 오랑캐 군영으로 가서 시비를 가려가며 나라 일을 논하는데,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하니 오랑캐의 장수들이 감동하였다. 이에 곧 병사를 합쳐 요의 군사들을 죽였다.
거듭하여 공이 있었으므로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예부상서 한림학사승지(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 禮部尙書 翰林學士承旨)로 승진하였다. 이 해 봄에 과거[禮闈]를 주관하고
6 겨울에 서경재제사(西京齋祭使)로 나갔다. 북쪽 변방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서경도 같이 반역하였으나, 공이 예전에 끼친 사랑으로써 가서 다스리니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환영하여 맞아들여서, 마침내 다른 마음이 없어지게 하였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동지추밀원사 어사대부(同知樞密院事 御史大夫)가 되고, 추밀원사 보문각대학사(樞密院使 寶文閣大學士)에 임명되었다. 다시 과거[禮闈]를 주관하여 전후하여 뽑은 이가 여러 명 되는데,
7 난(鸞)새와 봉(鳳)새처럼 우뚝 솟아 있으므로 당시의 여론이 훌륭하다고 하였다.
갑신년(고종 11, 1224)에 물러나기를 원하는 글[章]을 세 번이나 올리니 임금이 조서를 내려 허락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지낸 지가 지금까지 14년이 되었다. 갑자기 병이 들어 눕게 되자 장례일 가운데 번거로운 일여덟 조목을 줄이게 하면서 “내 뜻을 빼앗지 말라.”고 하였다. 정유년(고종 24, 1237) 3월 30일에 마을의 집에서 돌아가시니, 춘추 83세이다. 임금이 매우 슬퍼하며 곡식과 비단을 등급을 높여 부의하였다. 4월 28일 강화군 청포산(江華郡 靑浦山)의 남쪽 기슭에 장례지냈다.
첫 부인은 상당군 김씨(上黨郡 金氏)로 병부낭중(兵部郎中) 공석(公奭)의 딸이다. 딸 한 명을 낳았는데, 작고한 기거사인(起居舍人) 김정(金程)에게 시집갔으나, 부인과 딸은 모두 공보다 먼저 죽었다. 계부인(繼夫人)은 정안군 임씨(定安郡 任氏)로, 예부시랑(禮部侍郞) 충(冲)의 딸인데 자녀가 없다. 공을 잘 받들었으므로 공이 오래 산 것은 비록 천명이 그러한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부인의 내조로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공은 평소 꾸밈이 없고 너그러웠으며, 부모를 효도로서 모셨고,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슬퍼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보다 지나쳤다. 임금을 섬기면서 충성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나라 일을 보면서는 잠시라도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능히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오면 재상이 되었으며, 오래도록 수를 누리고 임종을 맞게 되니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공의 공덕으로는 복을 무궁하게 누리는 것이 마땅하나 대를 이을 아들이 한 명도 없으니, 아, 슬프다. 하늘이 그를 빼앗아 간 것인가, 아니면 세대의 수[世數]가 그러한 것인가.
명(銘)하여 이른다.
훌륭하도다, 우리 공은 조정에 들어가 우뚝 서서
공명과 부귀를 누리며 83세가 되었네.
한 평생에 모자란 것이 없으나
다만 이 가문의 복을 어디로 전할 데가 없도다.
단단한 돌에 명(銘)을 새겼으니 저승에서도 길이 빛나리라.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