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자광록대부 수대사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상장군 판이부사(金紫光祿大夫 守大師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上將軍 判吏部事)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고 추증된 시호가 정평공(靖平公)인 김중구(金仲龜) 묘지
공의 이름은 중구(仲龜)이고, 안동부(安東府)
1 사람이다. 수사도 중서시랑평장사 상주국 상장군 판호부사 대자소사 경렬공(守司徒 中書侍郞平章事 上柱國 上將軍 判戶部事 大子少師 景烈公) 준(俊)의 아들이고, 어머니 경씨(慶氏)는 상당군부인(上黨郡夫人)에 봉해졌는데 참지정사 상장군(叅知政事 上將軍) 진(珎)의 딸이다.
공은 어려서 풍채가 좋고 도량이 커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모두 그 사람됨을 흠모하며 재상감이라고 칭송하였다. 나이가 아직 어릴 때인 금(大金) 명창(明昌)
2 5년 갑인년(명종 24, 1194)에 벼슬하여 강릉직(康陵直)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겨울에 서리직을 버리고[投筆] 금오위사령(金吾衛使領)이 되었는데, 산직(散職)에 이어 실직[眞]을 받았다. 신종(神宗)이 특별하게 여겨 내시(內侍)로 불러들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별장(別將)으로 옮기고, 장군(將軍) 순영(純永)의 휘하에서 낭장(郞將)으로 승진하였다.
공은 행동거지가 우아하고 여유가 있었으며, 기량과 식견이 매우 깊었다. 말은 느렸지만 행동은 재빨랐고, 아이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엄하였으므로, 군사의 계책과 조정의 지략은 날로 더하여 두루 통달하였다.
태화(泰和)
3 4년 갑자년(1204)에 정종(貞宗, 熙宗)
4이 왕위를 잇자 공이 백성을 보살피고 편안하게 하는 덕이 있는 것을 알고 영주(永州)
5의 수령으로 임명하였다. 영주는 큰 고을인데 공은 청렴하고 훌륭하게 다스렸다. 임기가 차자 경상진안동도 안찰부사(慶尙晉安東道 按察副使)가 되고, 이듬해에 조서를 내려 서해도(西海道)
6로 관직을 옮겼다. 대안(大安)
7 3년 신미년(희종 7, 1211)에 강종(康宗)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조서를 내려 전라주도 안찰사(全羅州道 按察使)로 삼았다. 전후하여 재임한 곳에서 모두 그의 신명(神明)에 탄복하니, 임금이 그를 더욱 그릇으로 생각하고 불러들여 신호위보승장군 상서형부시랑 지합문사(神虎衛保勝將軍 尙書刑部侍郞 知閤門事)에 임명하였다.
병자년(고종 3, 1216) 겨울에 권지우부승선(權知右副承宣)이 되었다. 공은 마음을 다하여 임금의 명령을 출납하였으므로 임금이 믿고 후설(喉舌)로 삼아 크고 작은 일 가림이 없이 모두 자문한 뒤에 시행하였다. 이어 감문위섭대장군(監門衛攝大將軍)에 임명되었다가 좌승선(左承宣)으로 승진하였다. 이 때 금(金)나라 사람들이 국경을 범하였는데
8 임금의 군대가 변방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그 세력이 같지 않으므로 서로 버티면서 오랫동안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 여파가 거의 서해도(西海道)까지 미치게 되자 임금이 이를 근심하여 조서를 내려 공을 서해도 가발병마사(西海道 加發兵馬使)로 삼았다. 얼마 되지 않아 들어와 정의대부 좌우위섭상장군 추밀원지주사 지도성사(正議大夫 左右衛攝上將軍 樞密院知奏事 知都省事)가 되었다.
숭경(崇慶)
9 2년 계유년(1213)에 지금의 임금<高宗>이 즉위하였는데 평소에 공이 어질다는 것을 듣고 특별히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상서좌복야 상장군 판삼사사(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 尙書左僕射 上將軍 判三司事)에 임명하였다. 정해년(고종 14, 1227) 겨울에 지서경유수사(知西京留守事)로 나갔으나 임금의 본뜻은 아니었으므로, 이듬해에 불러들여 다시 지추밀원사 상서좌복야 상장군 판삼사사(知樞密院事 尙書左僕射 上將軍 判三司事)가 되고, 또 이듬해에 지문하성사 수사공 좌복야(知門下省事 守司空 左僕射)가 되었다. 이 해부터 참지정사 판어사대사 대자대보(叅知政事 判御史臺事 大子大保)를 거치고 몇 년 되지 않아 수대위 동중서문하시랑평장사 판병부사 대자대부(守大尉 同中書門下侍郞平章事 判兵部事 大子大傅)에 올랐으니, 공의 관직이 현달한 일을 어찌 평범하다고 논할 수 있겠는가.
공이 어려서[結髮] 조정에 올라 노인이 될 때까지[斑鬢] 충의(忠義)로 보답하면서 백에 하나도 부끄러움이 없었다. 병신년(고종 23, 1236) 봄에 불행하게도 병이 들자, 이에 글[章]을 올려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으나 공이 더욱 간절히 청하므로, 경자년(고종 27, 1240) 겨울에 수대사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부사(守大師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判吏部事)에 임명하고 이에 은퇴하도록 하였다.
공은 한가로이 보내게 된 것을 기뻐하여, 겨울에는 따뜻한 방과 여름에는 서늘한 누각에서 거문고를 품고 책을 읽으며 갖가지 차(茶)와 약(藥)을 즐겼다. 이러한 일들로 부귀한 가운데 노년을 보내는 즐거움으로 삼았지만, 군국(軍國)의 큰 일이 있으면 공이 반드시 함께 하였다.
공의 집 서쪽에 봉고사(鳳顧寺)라는 오래된 절이 있었는데, 공이 이를 새로 지었다. 올해 임인년(고종 29, 1242) 춘정월 그믐에 공이 그 절로 가서 향탕(香湯)을 준비하고 100명의 선승(禪僧)을 모셔다가 함께 목욕하면서, “선가(禪家)에서 받드는 일 중에 ‘굶주린 이가 오면 먹이고, 피곤한 이가 오면 재워준다’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며, 승려들을 공양하고 휴식을 취하기를 권하였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베푸는 것이 더 정성스럽고 매우 충실하였다. 그 날로부터 공의 침식(寢食)이 전과 같지 않았는데, 머문 지 나흘 뒤에 말하고 웃는 것이 태연한 가운데 가부좌를 하고 서거하였으니, 나이가 67세이다. 임금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여 조회를 보지 않고, 등급을 올려 부의를 내렸으며, 시호를 정평공(靖平公)이라 추증하였다. 3월 10일에 강화군(江華郡) 남쪽의 청동사 동유점(靑桐寺 東楡岾)에 장례지내니, 예(禮)에 따른 것이다.
공은 생전에 한 개 군(郡)을 다스리고 세 지방을 제▨(提察)하였는데, 모두 채방사(採訪使)에게 으뜸으로 평가되었다. 다섯 임금을 두루 섬기고 관직은 상상(上相, 判吏部事)에 이르면서, 털끝만한 어긋남이 없었으니 공이 마음을 써서 일을 행하는 것을 여기서도 가히 볼 수 있다. 아, 그 행동이 이와 같고 때를 만난 것은 그와 같은데, 나이가 일흔[耆壽]에 미치지 못하였음은 어찌된 일인가. 조정과 시중에서 애통해 함이 그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공은 이씨(李氏)와 결혼하였는데 참지정사 정숙공(叅知政事 貞肅公) 춘로(椿老)의 딸로서 공보다 먼저 작고하였다. 아들이 한 명 있으니 이름은 해(胲)이며, 관직이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이르렀으나 ▨ 일찍 죽었다. 딸은 세 명 있는데, 장녀는 중서령 진강공(中書令 晉康公) 최충헌(崔忠獻)의 아들인 공부시랑(工部侍郞) 구(球)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수사공 좌복야(守司空 左僕射) ▨▨▨(田元均)의 ▨(아들인) 조산대부 흥위위보승장군(朝散大夫 興威衛保勝將軍) 보린(甫麟)에게 시집갔으며, 3녀는 문하시랑평장사 판병부사(門下侍郞平章事 判兵部事) 박문성(朴文成)의 아들인 금오위장령별장(金吾衛仗領別將) 이온(李溫)에게 시집갔다. 공의 사위인 장군(將軍) 보린(甫麟)이 나와 매우 가깝게 사귀고 있으므로 묘지명을 지어주기를 부탁하였다.
명(銘)하여 이른다.
공은 부귀에 있어서 하나도 부족함이 없고
덕도 이미 많이 베풀었는데 신명(神明)은 나이를 빌려주지 않도다.
모습은 지금도 남아 있는 듯하여 오랑캐는 변방을 엿보지 못하는데
나라의 기둥이 이제 부러졌으니, 아, 누가 쓰러지는 것을 받쳐주겠는가.
임인년(고종 29, 1242) 3월 일 정의대부 판합문사 삼사사 동궁시독사(正議大夫 判閤門事 三司使 東宮侍讀事) 손변(孫抃)이 쓰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