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의 묘지명은 原石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고, 이규보의 문집인 『東國李相國集』에도 수록되어 있다. 원석의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아 글자가 깨어져 읽지 못하는 부분이 여러 곳이 있으므로 문집 소재의 묘지명을 위주로 번역하되, 필요한 경우 보충하는 설명을 붙여둔다. >
수태보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대보(守太保 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平章事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禮部事 翰林院事 太子大保)로 은퇴하고 추증된 시호 문순공(文順公)의 묘지명 및 서문
공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이름은 규보(奎報)이며, 자는 춘경(春卿)으로 황려현(黃驪縣)
1 사람이다. <증조의 이름은 은백(殷伯)으로 중윤(中尹)을 지냈고, 조부의 이름은 화(和)로 검교대▨▨▨교위(檢校大▨▨▨校尉)였으며>
2 아버지의 이름은 윤수(允綏)로 호부낭중(戶部郞中)이고, 어머니 김씨는 금양현(金壤縣)
3 사람으로 공이 귀하게 됨에 따라 금란군군(金蘭郡君)에 봉하여졌는데, 울진현위(蔚珍縣尉) 시정(施政)의 딸이다.
공은 아홉 살 때에 능히 글을 지을 줄 알았으며, 열대여섯 살이 되자 견문이 넓고 기억을 잘 하였다. 무릇 글을 지을 때 옛 사람의 묵은 말을 모방하지 않았으며, 평생 스스로 당백(唐白)
4이라고 하지 않았으나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를 가리켜 주필 이당백(走筆 李唐白)이라고 하였다.
기유년(명종 19, 1189 )에 명재상 유공권(柳公權)을 좌주(座主)로 하여 사마시(司馬試)에 일등으로 합격하였고,
5 이듬해에 예부시(禮部試)의 삼장(三場)에 응시하였다.
6 시험날 과거를 담당하는 관리가 그 명성을 중하게 여겨 임금이 내린 술 너댓 잔을 마시게 하였는데, 조금 취하여 글이 정취하게 지어지지 않았으므로 과거의 성적이 좋지 못하였다. 사퇴하고 다시 응시하려 하자 아버지가 엄하게 나무랐다. 또한 전례가 없으므로 사퇴하지 못하였으나, 하객들에게 말하였다. “과거의 성적은 비록 아래이지만, 어찌 서너 번 문생(門生)을 단련시키지 않겠습니까.”
정사년(명종 27, 1197)에 총재(冢宰) 조영인(趙永仁) 공 등 문유(文儒)인 네 명의 재상이 연명으로 글[箚子]를 올려 조정에 공을 천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불만을 품은 자에게 글[箚子]을 도둑 당하여 마침내 이루지 못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지 10년 만에 지방으로 나가 전주관기(全州管記)가 되었는데 여러 차례 통판(通判)의 불법을 막다가 그 때문에 피소되고 해직되었다. 뒤에 관한(館翰) 등의 유관(儒官)들이 사람을 천거할 때는 늘 공을 첫머리에 두었으므로, 정묘년(희종 3, 1207)에 권한림원(權翰林院)으로 보임되었다가 이듬해에 진(眞)이 되었다.
임신년(강종 1, 1212) 정월에 천우위녹사참군사(千牛衛錄事叅軍事)에 제수되어 한림원에서 나왔으며 6월에 직원(直院)으로 복직하였다. 12월에는 7품직을 거치지 않고 사재승(司宰丞)이 되었으며 직원을 겸하였다. 을해년(고종 2, 1215)에 바로 우정언(右正言)에 제배되고 좌우사간(左右司諫)을 역임하였으며, 기묘년(고종 6, 1219)에 계양부
7부사(桂陽府副使)가 되어 나갔다가 1년 뒤 시예부낭중
8 기거주(試禮部郞中 起居注)로 불려왔다. 이로부터 시대복소경
9 보문각대제 장작감 국자제주 한림시강학사 판위위사(試大僕少卿 寶文閣待制 將作監 國子祭酒 翰林侍講學士 判衛尉事)를 지냈는데, 9년 동안 관직을 옮긴 것이 이와 같다.
경인년(고종 17, 1230)에 잘못한 일도 없이 위도(猬島)
10에 유배되었다. 그 때 같은 죄로 유배된 사람이 세 명인데 모두 정직하여 거리낌없이 말하며 사리에 밝은 관리[達官]였다. 신묘년(고종 18, 1231)에 사면을 받아 서울로 돌아왔다. 이 때 달단(㺚狚)
11이 침략하여 오니 공이 산관(散官)으로 무릇 강화(講和)에 관한 모든 문서를 담당하였다. 임진년(고종 19, 1232) 4월에 정의대부 판비서성사 보문각학사 경성부첨사(正議大夫 判秘書省事 寶文閣學士 慶成府詹事)로 기용되었는데, 참직(叅職)을 받으면서부터 이에 이르기까지 외직(外職)을 맡았던 1년을 제하고는 모두 전고(典誥)를 겸하였다.
계사년(고종 20, 1233) 6월에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우산기상시 보문각학사(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 右散騎常侍 寶文閣學士)에 제수되었고, 12월에 상부(相府)에 들어가서 금자광록대부 지문하성사 호부상서 집현전대학사 판예부사(金紫光祿大夫 知門下省事 戶部尙書 集賢殿大學士 判禮部事)가 되었다. 을미년(고종 22, 1235) 12월에는 참지정사 수문전대학사 판호부사 태자대보(叅知政事 修文殿大學士 判戶部事 太子大保)가 되었다. 10월에 글[表]를 올려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근신을 보내 간곡하게 설득하며 다시 업무를 보게 하니, 공은 부득이 일을 보았다. 다시 물러나기를 확고하고 간절하게 원하였으므로 임금이 그 뜻을 어기기 어려워 수대보 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대보(守大保 門下侍郞平章事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禮部事 翰林院事 太子大保)로 은퇴하게 하였다.
일찍이 한 차례 성균시(成均試)를 주재하고,
12 세 차례 예부시(禮部試)를 주관하였는데
13 뽑힌 이들 중 운사(韻士)가 많았다. 벼슬에서 물러난 이래 시와 술로 스스로 즐기며 항상 『능엄경(楞嚴經)』을 읽었는데 그 송(頌)이 (문집) 제9권에 실려 있다.
14 또한 국가에서 큰 책봉이 있을 때나 외국에 보내는 서(書)와 표(表)를 짓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신축년(고종 28, 1241) 7월에 병을 앓게 되자 당시의 나라의 대신들이 연이어 이름난 의원을 보내어 치료하게 하고, 공이 지은 문집을 모아서 기술자에게 명하여 판(版)에 새기게 하였다. 공의 눈으로 보게 하려 한 것이었으나, 일이 방대하여 채 끝나기 전에 9월 초이틀에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74세이다. 임금이 애도하고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백관들이 장례에 참여하도록 하였으며, 시호를 문순공(文順公)이라 하였다. 아, 공의 관작의 차례는 이미 앞에서 열거하였으니, 그 상서에 감응하여 일어난 일의 자취를 감히 뒤에 적으려고 한다.
공은 태어난 지 몇 달 만에 심한 종기가 온 몸에 나고 얼굴이 모두 짓물러서 유모가 문밖으로 내다 놓았다. 한 노인이 지나가다 보고 “이 아이는 만금(萬金)의 값보다 더하니, 마땅히 잘 보호하여 기르시오.”라고 하니, 유모가 달려가 아버지에게 알렸다. 아버지가 그가 신인(神人)인가 생각하여 여러 갈래로 뒤쫓아 보았으나 찾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신령스러운 것이 공을 강보 중에서 보호한 것이다.
공이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려 할 때, 꿈에 다듬이질이 잘 된 검은 베옷을 입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집안에서 술을 마시는데 곁에 있던 사람이 말하였다. “이분들은 바로 28수(宿)입니다.” 공이 놀라고 두려워 두 번 절하고 올해의 시험에서 급제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물어보자,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저 분은 바로 규성(奎星)입니다. 마땅히 가서 물어 보십시오.” 공이 가서 물었으나 그의 말을 듣기 전에 깨었다. 조금 뒤 다시 꿈을 꾸자 그 사람이 와서 알려주었다. “그대가 반드시 장원을 차지할 것이나, 이는 하늘의 비밀이니 누설하시 마시오.” 그 전의 이름이 인저(仁氐)였으나 이로 인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과연 일등으로 합격하였다. 이것은 신령한 별이 인륜(人倫)의 명분을 밝히는 가르침으로 공을 돌보아 준 것이다.
임술년(신종 5, 1202 )에 동경(東京)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삼군(三軍)을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는데
15 군막(軍幕)에서 산관(散官)으로써 급제한 사람을 수제원(修制員)에 충당하려 하였으나, 전쟁은 위태로운 일이라 모두 계교를 써서 피하려고 하였다. 공이 홀로 개탄하여 “나는 비록 나약하고 겁이 많으나 나라의 어려움을 피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오.”라고 하면서, 마침내 종군하였다. 이는 공이 의(義)에 용감한 것이다.
무인년(고종 5, 1218)에 팔관회(八關會)에서 임금을 모시고 연회가 열렸는데 예식이 아직 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한 재상이 서둘러 파하게 하였다. 공은 “임금이 내린 것이니, 되는대로 처리해서는 안됩니다.”라고 하였다. 비록 이로 인해 유배를 가게 되었으나, 이것은 공이 법을 지키면서 굽히지 않은 것이다.
소위 달단(㺚狚)이라는 자들은 미련하기가 짐승과 같아서 천상의 음악[鈞天廣樂]을 들려주어도 그 가슴을 열기에는 부족하며, 수후(隋侯)와 화씨(和氏)의 구슬
16을 주더라도 그들의 얼굴을 펴게 하는데는 부족하다. 그러나 공이 지은 문장의 뜻을 듣게 되자 측은하게 감동하여 타이르는 대로 모두 따르니, 이것은 공의 지극한 정성이 능히 감정이 없는 자를 감동시킨 것이다.
대부경(大府卿) 진승(晋昇)의 둘째 딸과 결혼하여 아들 4명과 딸 2명을 낳았다. 장남 관(灌)은 공보다 먼저 죽었고,
17 차남 함(涵)은 지금 지홍주사부사 상식봉어(知洪州事副使 尙食奉御)이며,
18 셋째 징(澄)은 경선점녹사(慶仙店錄事)이고 4남 제(濟)는 서대비원녹사(西大悲院錄事)이다. 장녀는 내시 액정내알자감(內侍 掖庭內謁者監) 이유신(李惟信)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내시 경희궁녹사(內侍 慶禧宮錄事)인 고백정(高伯挺)에게 출가하였다.
아, 묘지에 명이 만들어진 지는 오래되었다. 그 공명(功名)이 뛰어나 세상이 받드는 인물이 된 이후에야 묘지명을 짓게 되는데, 대개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에 드물게 특별하게 뛰어난 사람이 있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비록 그 사람이 특별하게 뛰어났다고 하더라도 명(銘)을 제대로 지을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없는 것이 차라리 더욱 낫다. 나는 문장을 짓는 것이 졸렬하지만 공이 평소 조용할 때면 늘 “내가 죽으면 그대가 명을 써주시오.”라고 하였는데, 그 아들 함(涵)
19이 공의 뜻을 적은 글을 가져와 명을 청하니, 어쩔 수 없이 명을 짓는다.
명에 이른다.
강좌(江左)의 분양(汾陽)
20이요, 해동의 공자(孔子)이니
온화하고 양순하며 공경하고 검소하여 평생의 처음과 끝이 같았다.
칠십이 되기 전에는 세상에서 현자(賢者)가 되니
궁궐[玉樓]에서 글을 짓는 것은 공에게 사소한 일이었다.
원기(元氣)를 새롭게 하는 것이 바로 공의 직책이나
칠십 이후에는 하늘이 차지하였다.
사람들이 우러러보면서도 만족하지 않았는데
하늘은 살피지 않고 빼앗아 갔다.
하늘은 그 넋을 빼앗고 땅은 그 육신을 가졌으니
어찌 둘이 되어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는가.
그 분은 아득히 멀어졌으나 남은 것은 문장인데
그 또한 육정(六丁)이 천둥 번개를 쳐서 가져갈까 염려하노라.
21
공인(工人)들을 불러모아 금석(金石)에다 새기었으나
거울 하나가 사라지니 천자도 슬퍼한다.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명산의 기슭에 자리를 정하니
들판은 질펀하고 봉우리들은 날아갈 듯 솟아 있다.
산이 이미 신령스러우니 자손은 억만으로 불어나리라.
때는 대세(大歲) 신축년 11월 일에 내시 조산대부 상서예부시랑 직보문각 대자문학(內侍 朝散大夫 尙書禮部侍郞 直寶文閣 大子文學) 이수(李需)가 적다.
22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