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증된 시호가 위열공(威烈公)이고 수대사 개부의동삼사 문하시랑평장사 상장군 판이부사(守大師 開府儀同三司 門下侍郞平章事 上將軍 判吏部事)인 김공(金公) 묘지명
취려(就呂)
1공의 성은 김씨(金氏)이고, 이름은 취려(就呂)이며, 언양현(彦陽縣)
2 사람이다. 조부 언량(彦良)은 금오위섭낭장(金吾衛攝郞將)이고, 아버지 부(富)는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이다. 어머니 대부인 송씨(大夫人 宋氏)는 ▨ 검교장군 행낭장(檢校將軍 行郞將) 세명(世明)의 딸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재능과 학식이 넓고 깊었으며, 풍채가 ▨ 훌륭하였다. 어려서 부▨(〔父蔭〕)으로 벼슬하여, ▨ 병오년(명종 16, 1186)에 대오(隊伍)의 장(長)<〔隊正〕>으로 충원되었다가 태자부견룡(太子府牽龍)으로 옮겼다. 대▨(〔隊正〕)으로부터 품계가 장급(將級)으로 올랐으며, 몇 년 되지 않아 다시 바로 ▨ 견룡행수(牽龍行首)가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어견룡행수(御牽龍行首)로 옮겼다. 지유(指諭)가 되어 1,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게 되자 곧 변방을 막고 나라를 지키는 일에 모두 공적이 있었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대장군(大將軍)이 되고, ▨ 서북면 지병마사(西北面 知兵馬事)가 되어 장월(杖鉞)의 위엄으로 ▨▨ 적의 예봉을 꺾었으므로 명성이 당시 우레와 같았다.
병자년(고종 3, 1216) 가을에 거란적이 변경을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임금이 듣고 곧 삼군(三軍)에 명하여 토벌하도록 하였다. 공은 후군사(後軍使)가 되어 양군(兩軍)과 함께 부대를 정비하고 나아가 적을 만나 ▨ 싸워 ▨▨ 이기니 공훈이 많았다. 조양
3·개평
4·묵장
5·향산
6(朝陽·開平·墨匠·香山)의 싸움에서 홀로 아군의 선봉이 되어 크게 격파하자, 그 적들이 아군을 피하여 서해▨(西海道)
7로 ▨(〔퇴각하였다〕).
정축년(고종 4, 1217) 1월에 임금이 행영원수(行營元帥)에게 오군(五軍)을 거느리게 하고 공을 금오위 상장군(金吾衛 上將軍)에 임명하였다. 이에 후군을 이끌고 공이 ▨▨행영(行營)하여 안주(安州)
8 부근에 ▨주둔하였으나, 행영이 패하여 도망하였다. 공이 홀로 힘써 마주 싸워 창과 화살이 몸을 뚫는 것도 알지 못하였으니, 거의 죽을 뻔하였다. 명을 내려 (〔개경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나, 임금이 다시 오군에 명하여 ▨남로(南路)를 막게 하고, 또 공을 다른 장수에 대신하여 전군사(前軍使)로 삼았다. 공이 이에 고통을 참고 명에 따라 행군하면서 적과 맥곡(麥谷)
9에서 싸워 이겼다. 박달▨(〔朴達嶺〕)
10에서 크게 승리한 이래로 적들은 세력을 잃자 ▨ 마침내 남쪽 방면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하여 그들의 나라로 돌아갔다.
11월에 공이 ▨ 병이 들자 장수와 군사들이 모두 서울로 돌아가 병을 다스릴 것을 청하였으나, 공은 “차라리 죽어서 변경을 지키는 귀신이 될지언정 어찌 ▨ 서울에서 편안하게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곧 조서가 내려와 공에게 서울로 돌아가도록 하니, 가마를 타고 서울로 오게 되었다. 거듭 ▨ 한 뒤에 병이 나았다.
무인년(고종 5, 1218) 정월에 신호위 판예빈성사(神虎衛 判禮賓省事)로 옮기고, 9월에는 임금이 명하여 학사(學士) 조충(趙冲)을 중군원수(中軍元帥)로 삼고, 공을 부원수로 삼아 ▨ 돕게 하였다. 원수와 함께 동주
11·성주
12·은주
13(洞州·成州·殷州)로 행군하면서 곳곳마다 적과 만나 모두 이겼다. 자주성(慈州城)
14에 웅거하게 되자 군사를 훈련시키면서 적의 동태를 살피고자 하였다.
12월에 몽고가 동쪽 변방으로부터 국경을 침입해 들어와 몇 군데의 성을 잇달아 함락시키면서, 양국이 강화함으로써 함께 거란적을 물리치고자 하여 글[文句]을 ▨(〔보내어〕) 아군의 병사를 내어주기를 청하였다. 여러 장수들은 용감하게 나서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였으나 ▨(공이) 홀로 수염을 휘날리면서 소리내어 말하였다. “일이 어렵더라도 사양하지 않아야 하는 법이니, 내가 곧 그 임무를 맡겠습니다.” 이에 일만 명을 거느리고 ▨ 막하에 도착하였다. 몽고의 장수<哈眞及扎剌>가 “공의 나이가 몇 살이나 됩니까.”라고 물은 뒤 ▨ 형이라고 부르기로 하고, 동쪽에 앉게 하였다. 몽고가 우리 공을 공경하는 것이 이와 같다는 소식을 우리 원수가 듣고, 모든 군대를 동원하여 ▨에 이르니 적들이 두려워하며 나와서 항복하였다. 몽고는 기뻐하여 우리 군사와 더불어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고〕) 돌아가게 되니 공이 이에 조양(朝陽)까지 ▨▨ 가서 송별하였다. 이 때에 ▨이 있었으므로 공을 서경재제사(西京齋祭使)로 ▨(삼았는데), 재제(齋祭)를 마친 뒤 영주(寧州)
15로 ▨ 돌아와 원수와 함께 개선하였으며, 기묘년(고종 6, 1219) 3월에 임금께 복명(復命)하였다. 또 그 해 10월에 의주(義州)
16의 반역민을 처치하기 위해 공을 우군사(右軍使)▨중(中)▨▨▨▨▨▨로 삼았다.
17 경진년(고종 7, 1220) 정월에 임금이 공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임명하면서 다른 장수를 대신하여 중군사(中軍使)로 삼았다. 이 때에 북쪽 변경에서 우가하(亏加下)가 ▨▨▨▨에 응하여 의주(義州)에 이르렀으나, 아군의 ▨ 소문을 듣고 도리어 반역민들을 베어 죽이고 아군에게 ▨▨(〔귀부해 왔다〕).
18 그런 연후에 우리의 경내로 돌아왔으나, ▨ 군대를 ▨주(〔義州〕)에 주둔시키고 군사들로 하여금 백성들을 ▨▨▨▨하지 않게 하고 ▨▨ 반역민들을 처치하였다. 신사년(고종 8, 1221) 5월에 ▨▨ 서울로 왔다.
▨ 공이 군사를 ▨▨한 것이 모두 ▨5년이었다. ▨ 이로 말미암아 ▨▨2월에 ▨지추밀사(知樞密事)로 승진하고, 임오년(고종 9, 1222) ▨▨월에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판호부사(金紫光祿大夫 叅知政事 判戶部事)로 옮겼다. 을유년(고종 12, 1225) 12월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고, 무자년(고종 15, 1228) 12월에 수대위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守大尉 中書侍郞平章事 判兵部事)에 임명되었다. 경인년(고종 17, 1230) 정월에 판이부사(判吏部事)가 되고 12월에는 수대보(守大保)가 되었으며, 임진년(고종 19, 1232) 3월에 수대부 개부의동삼사 문하시랑평장사(守大傅開府儀同三司 門下侍郞平章事)에 임명되었다. 계사년(고종 20, 1233)년 6월에 장대(將大)를 더하고, 이해 12월에 특진 주국(特進 柱國)을 더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 여러 ▨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의로우면서 용감하고 겸손하면서 강직하여서, 나가면 장수가 되고 들어오면 재상이 되니 나라와 가문에 도움을 준 것이 오래되었다. 갑자기 갑오년(고종 21, 1234) 2월 ▨4일에 병이 들었는데 21일이 되자 급하게 돌아가시니, 향년 63세이다. 천자(天子)가 매우 슬퍼하고 조문하니, ▨가 있었다.
공은 복야(僕射) 조언▨(趙彦▨)의 딸을 취하여 부인으로 삼았는데, 3남 1녀를 낳았으며, ▨ 뒷일을 맡아서 7월 12일에 진강현
19 대곡동(鎭江縣 大谷洞) 서쪽 기슭에서 장례지냈다.
20
명(銘)하여 이른다.
장(將)▨▨중(重) ▨한 이는 누구인가,
오직 공을 일러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하도다.
나가서 장수가 되면 위엄이 ▨ 벼락이 치는 듯하고
들어와 재상이 되면 덕망이 비가 내리는 듯 하였다.
▨을 물리치자 무리들이 ▨▨ 모두 엎드려 절을 하였으니
가히 공로와 업적을 논하게 되면 마땅히 수와 복을 누려야 할 것이나
어찌 환화(幻化)를 좇아 급하게 신선이 되었는가.
이제 그 ▨(묘소를) 점쳐 정하고 묘지명을 기록하여 적으니
후손들에게 복이 이어지고 음덕이 ▨ 이에 있으리라.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