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상(崔首相) 묘지
▨▨의 물은 하늘가에 닿아 있어 그 샘이 먼 곳으로부터 나오고, 숭악(崇岳)의 봉우리는 땅바닥에 기둥을 대고 있어 그 뿌리가 깊숙하게 박혀 있다. 대개 영(靈)들이 이 곳에 모이는데, 성씨를 가지게 되고 이름이 지어진 것은 오직 우리 공뿐인가.
공의 성은 최씨(崔氏)이고, 이름은 보순(甫淳)이며, 자는 청로(淸老)이며, 유화부(流化府) 사람이다.
1 아버지 균(鈞)
2은 벼슬하여 상서예부낭중(尙書禮部郞中)이 되었다. 대정(大定)
3 14년 갑오년(명종 4, 1174)에 동번(東蕃)의 20여 성이 제멋대로 날뛰자, 만사(萬死) 중에서도 생사를 돌보지 않고 왕명을 받들어 단기로 홀로 가서 화복(禍福)으로서 설득하여 각기 귀순하게 하였다. 난을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른 적에게 살해당하였으니,
4 슬프다,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이로다. 우리 조정에서 공훈을 추록하여 ▨도(司徒)로 추봉하였다. 대개 임금을 섬기다 돌아가신 이는 그 후손이 반드시 창성하게 되니, 공은 그 분의 적자(嫡子)이다.
공은 성품과 생김새가 뛰어나게 훌륭하고 가슴에 품은 뜻이 넓고 컸다. 해박하고 통달한 지식으로 널리 화합하면서도 때를 만나면 반드시 행하였으며, 자유분방하며 얽매이지 않았으나 기회를 만나면 능히 결단하였다. 집에서는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자애로와 종족들을 흡족하게 하니 집안에서의 행실이 뛰어났고, 나라에는 인의(仁義)와 예지(禮智)가 조정에 스며들게 하니 밖으로도 훌륭함이 뚜렷하였다. 이것이 그 대략이다.
처음 옷을 입기 시작할 때부터 약관(弱冠)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부지런하고 용맹하게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와 같은 성인의 책을 마음에 새기고 반고(班固)와 양웅(楊雄)
5과 같은 문장가의 행적을 몸으로 본받으니ㅂ, 문필의 바다에서 자라를 희롱하는 듯하고 문장의 경연장에서 호랑이를 놀라게 하는 듯하였다. 명종(明宗)이 재위하던 태정(泰定)
6 22년 임인년(명종 12, 1182 )에 을제(乙第)에 합격하게 되자,
7 이로 말미암아 천리마가 해를 좇는 발굽을 내닫고 붕(鵬)새가 하늘을 어루만지는 깃촉을 펴게 되었다.
정미년(명종 17, 1187)에 제안
8서기(齊安書記)에 임명되니, 절의를 지키는 것이 얼음보다 맑고 물보다 깨끗하였다. 농사를 장려하여 우거진 풀숲을 불사르고 메마른 땅에 물을 대게 하니 쓸모 없는 땅 천 리가 양전(良田)으로 바뀌었다. 첫 해 가을에 곡식이 크게 익어 만 호(戶)의 백성들이 모두 풍족하게 되었으므로, 당시의 출척사(黜陟使)가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청렴하고 공정한 수령이 백성을 편안하게 구휼하고, 이로운 것은 늘리고 해로운 것은 없앴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정에 알리자, 이 때문에 발탁되어 국학(國學)에 들어갔다. 차례대로 승진해 가니 6관(六管)
9의 여러 생도들이 듣고 즐거워하여, 말하는 것이 종과 북보다 심하였다. ▨▨ 우경승(于承慶)은 사람을 볼 줄 아는 이었는데, 한 번 보고는 크게 놀라 “참으로 재상감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바로 중서주의(中書注意)로 뛰어 올랐다가, 얼마 되지 않아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임명되니, 산과 같이 꼿꼿이 서서 중심에 자리 잡고, 서리같이 맑게 세상 밖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신종(神宗)이 재위하던 승안(承安)
10 5년 경신년(신종 3, 1200)에 비로소 봉지(鳳池, 中書門下省)에 들어가 좌우(左右) 정언(正言)과 사간(司諫)을 두루 역임하고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는데, 모두 지제고(知制誥)[三字]를 겸하였다. 낭랑하게 간(諫)하는 목소리는 임금의 허물을 바르게 다듬었고, 아름다운 꽃과 같은 글을 올려 임금의 은택을 크게 하니, 천자의 직책을 ▨ 도와주어 ▨▨ 윤이 나게 하였다.
태화(泰和)
11 2년 임술년(신종 5, 1202 ) 가을에 남쪽 지방에서 도둑 떼들이 고슴도치의 털처럼 일어나자,
12 공을 중군병마판관(中軍兵馬判官)으로 기용하였다. 방패 머리에서 먹을 갈고 말을 탄 채 격문을 지으니 온갖 계책이 모두 그 손에서 ▨(나왔는데), 3년에 적을 평정하였다.
대상왕(大上王, 熙宗)이 즉위한 대화(大和)
13 4년 갑자년(1204)에 공훈으로 기거랑 직보문각(起居郞 直寶文閣)에 임명되고, 이전처럼 지제고(知制誥)와 태자문학사경(太子文學司經)을 겸하였다. 을축년(희종 1, 1205) 겨울에 거란(契丹)에 들어가는 사절의 우두머리가 되니, 추장들이 모여 바라보며 말하기를, “동국(東國)에 현인(賢人)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돌아와 예부낭중 기거주 전고(禮部郞中 起居注 典誥)가 되었다. 임금이 바야흐로 지방을 중시하여 칙령으로 낭관(郞官)들을 백 리(里)에 보내어 다스리게 하였다. 공은 관례에 따라 안남대도호부사(安南大都護副使)가 되었는데, 뚝을 높게 쌓고 고랑을 터서 사람들의 수화(水禍)를 제거하니, 그 자애롭게 다스린 것이 제안(齊安)에 있을 때보다 만의 만 배나 더하였다. 반 년 만에 들어와 예빈소경(禮賓少卿)에 임명되고, 국자사업 겸 어사잡단(國子司業 兼 御史雜端)에 오르고, 또 소부감(少府監)으로 승진하였는데 모두 제고(制誥)를 겸하였다. 모두 두 번 염안사(廉按使)가 되었는데, 처음은 경상도(慶尙道)이고 나중은 전라도(全羅道)였다. 나라를 걱정하기를 집안처럼 하고, 백성을 사랑하기를 자식처럼 하니, 모두 현인[德星]이 남방(南方)에 나왔다고 ▨ 하였다. 찰방(察訪)이 절의를 지키며 나라를 위하여 힘을 다하여 백성들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고 포상하기를 아뢰었다.
강종(康宗)이 즉위한 대안(大安)
14 3년 신미년(1211)에 이부시랑 우간의대부(吏部侍郞 右諫議大夫)로 승진하여 임명되고, 이듬해 임신년(강종 1, 1212)에 상서좌승(尙書左丞)에 올랐는데, 이전처럼 제고(制誥)를 겸하였다. 이 해 봄에 감시(監試)의 좌주(座主)가 되어 꼼꼼하고 분명하게 살펴서 무소의 뿔이나 코끼리의 어금니와 같이 귀하고 훌륭한 이들을 뽑으니,
15 당시 방(榜)이 거꾸로 걸렸다는 비방이 없었다.
숭경(崇慶)
16 2년 계유년(고종 즉위, 1213)에 태복경(太僕卿)에 임명되고, 이어 간의 제고 한림시강학사(諫議 制誥 翰林侍講學士)를 겸하였다. 을해년(고종 2, 1215) 봄에 동계도통(東界都統)이 되어 나가자 곤궁한 백성들을 돌보는 것을 작은 물고기를 굽듯이 하고, 간악한 적을 제어하기를 포악한 호랑이를 잡듯이 하니, 이에 온 고을이 모두 편안하게 베개를 베게 되었다. 정축년(고종 4, 1217) 봄에 판비서성(判秘書省)이 되고, 이전과 같이 제고(制誥)를 겸하였다.
지금의 임금<高宗>이 다스리는 정우(貞祐)
17 6년 무인년(고종 5, 1218)에 조서를 내려 추밀원우승선 한림학사(樞密院右承宣 翰林學士)가 되고, 또 좌산기상시 충사관수찬관 지병부사(左散騎常侍 充史館修撰官 知兵部事)를 겸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청탁하는 것을 듣기 싫어하여 문을 닫아걸고 깊숙하게 들어앉아 손님을 만나지 않았으나, 공은 홀로 그 문을 활짝 열고 백관이 올리는 글을 받아들이면서 흐르는 물과 같이 판결하니, 임금의 은택이 위에서 막히지 않고 백성들이 마음이 아래에서 막히지 않게 되었다. 거의 3년이 되자 은청광록대부 상서우복야(銀靑光錄大夫 尙書右僕射)가 되었는데, 앉은 자리가 채 더워지기도 전인 정우(貞祐) 8년 경진년(고종 7, 1220)에 갑자기 중서(中書)에 들어가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집현전대학사 동수국사 판예부사(金紫光錄大夫 叅知政事 集賢殿大學士 同修國史 判禮部事)에 임명되었다.
그 동안 과거[春場]를 네 차례 맡았다. 한 번은 동제거(同提擧)가 되고 세 번은 상제거(上提擧)가 되었는데,
18 방(牓)에 붙은 자들이 모두 뛰어나서 수후(隋侯)
19의 구럭에 물고기 눈알이 없고, 변화(卞和)
20의 바구니에 쥐고기 포가 없듯이 쓸모 없는 이가 없었다.
21
임오년(고종 9, 1222) 겨울에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 수문전대학사(中書侍郞平章事 判兵部事 修文殿大學士)에 임명되자, 덕을 여유롭게 베풀면서 너그러움으로 사나움을 다스리고, 넓고 후덕한 마음으로 임시로 합당하게 다스렸다. 갑신년(고종 11, 1224) 겨울에 수대위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守大尉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가 수대부 감수국사 주국(守大傅 監修國史 柱國)을 더하였다.
일찍이 한인(閑人)의 선발을 담당하였는데, 세 번 빠진 자가 있으면 관사(官司)에서 마땅히 전정(田丁)을 거두었다. ▨(〔공은〕) 그와 같이 하는 것을 딱하게 여겨 한 번 더 시험을 치르게 하니, 이에 ▨우(于)▨하여 한 사람도 빠지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 감복하였다. ▨▨ 과부와 고아 등이 억울한 일을 호소하고자 하면 이졸(吏卒)들이 막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으나, 공은 불러서 당하(堂下)로 오게 하고 ▨▨▨ 끝까지 옳고 그른 것을 분명하게 하면서 마치 귀신 같이 판결하니, 듣는 자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와 같은 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다.
무자년(고종 15, 1228) 겨울에 삼한벽상(三韓壁上) 정(正)▨▨▨▨▨▨▨이부사(吏部事)가 되고, ▨ 나머지는 이전과 같았다. 이 해 4월[夏初]에 밤에 중서성(中書省)에 숙직하다가 갑자기 병이 들었다. 임금이 놀라 상방의(上方醫, 御醫)에게 명하여 만금(萬金)의 양약(良藥)으로 치료하게 하니, 잠시 뒤에 바로 나았다. 그러나 때때로 다시 발병하니, 곧 글[表]을 갖추어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대신이 자리를 비우면 정사를 함께 돌보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사신을 보내어 간곡하게 타이르며 떠나지 말도록 만류하였다. 공이 할 수 없이 나와서 업무를 보았으나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12월[冬末]에 정사당(政事堂)에 들어가 관리의 인사에 관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물러나 쉬다가, 이듬해 기축년(고종 16, 1229) 정월 초2일 새벽에 시각을 묻고는 벽을 향해 누웠는데 잠을 자듯이 돌아가시니, 향년 68세이다.
공은 모두 다섯 임금을 섬기면서 두 차례 헌대(憲臺)에 들어가고, 네 번 간액(諫掖)에 올랐으며, 한 번 납언(納言)이 되었다. ▨▨ 복야(僕射)[文昌]가 되어 상(相)으로 재임한 것이 10년이고, 2재(二宰)로 있던 것은 6년이며, 총재(冢宰)가 된 것은 2년 동안이었다. 이 때 달단(達旦) 우가(于加)가 서북에, 만노(萬奴)가 동쪽에, 일본(日本)이 남쪽에 있으면서 호랑이가 침을 흘리듯이 우리 나라를 엿보았으나, 끝내 삼키지 못한 것은 우리 공이 조정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즉 음공(陰功)과 은덕(隱德)으로 삼한(三韓)을 안정시킨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의 부인은 용구현부인 진씨(龍駒縣夫人 秦氏)로 합문지후(閤門祗候) 중기(仲基)의 딸이다. 아들은 두 명인데, 장남은 내시 합문지후(內侍 閤門祗候)이고, 막내는 국자박사 겸 직한림원(國子博士 兼 直翰林院)이다.
22 딸은 세 명인데, 장녀는 예부원외랑 최씨(禮部員外郞 崔氏)에게 시집갔고, 두 명 역시 관인(官人)의 아내가 되었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하고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장례도구를 갖추게 하고 부의를 더하였으며, 예를 갖추어 책명(冊命)하고 시호를 문정공(文定公)이라 하였다. 이어 백관으로 하여금 전송하게 하여 이 해 2월 초7일에 백구산(白駒山) 기슭에 장례지내니, 예(禮)에 따른 것이다. 아, 공명과 부귀와 장수와 영화를 갖추어 인신(人臣)의 도리에 하나도 빠진 것이 없도다. 문생(門生) 이부원외랑 전고(吏部員外郞 典誥) 성산 수지(星山 綏之)가 외람되게도 가장 두텁게 보살핌을 받았으므로, 덕망과 작위와 연치(年齒)의 만 분의 일을 겨우 거두어 굳은 돌에 새긴다.
명(銘)하여 이른다.
하늘에서 정령이 내려와 공이 태어나고
북두(北斗)의 정기가 쌓여서 공이 출세하였으니,
공의 용모는 오악(五嶽)과 같이 빼어나고
공의 마음은 사해[四溟]와 같이 깊도다.
학식이 풍부한 것은 갈비뼈가 아홉 개인 거북
23과 같고
문장이 뛰어난 것은 오색(五色)의 봉(鳳)새와 같아서,
처음에는 하루에 천 리를 가더니
대성하게 되자 백 일동안 지극히 먼 곳까지 이르도다.
서쪽 담장
24에서 천자가 내려주신 약(藥)을 마셨고
북쪽 문에서 풀을 보았으니,
25
큰 손을 바쁘게 놀리자 훌륭한 글이 나오고
바른 의견을 베푸니 강직하고 굽히지 않는 말[言]이었도다.
두 번 안찰사(按察使)가 되어 남쪽 백성을 보살피고
잠시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동번(東藩)을 진압하였으며,
▨▨가 한 번 열리니 ▨가 공평해지고
과거[春場]를 네 번 담당하니 거울(鏡)이 맑아지도다.
용후(龍喉)가 되어 귀한 곳을 날아다니고
26
계설(鷄舌)
27을 머금어 일을 아뢰니,
유리 병에 이름을 남기고
28
금 솥
29을 길들여 조화롭게 하도다.
세 번 과거를 여니 다섯 용이 하늘을 날고
한 번 큰 물결을 막으니 여섯 자라가 산을 이었으며[戴],
30
아상(亞相)이 되니 조정이 세 발 달린 솥과 같이 무거워지고
총재(冢宰)가 되니 사직이 반석과 같이 편안하도다.
두루 다섯 임금을 섬기고
영원히 삼한(三韓)을 다스리니
훌륭한 장성(長城)이 만리(萬里)에 걸쳐 있고
큰 가마[大爐]에 불을 지펴서 수많은 사람이 다듬어지도다.
한(漢)의 안위(安危)가 양 손에 달려 있고
당(唐)의 경중(輕重)이 한 몸에 걸려 있는 듯하였네.
어찌하여 흰 닭은 꿈에 나타나고
31
붉은 용
32을 부렸으나 돌아오지 않는가.
천자가 통곡하니 비오듯 눈물이 흐르고
나라 사람들이 울부짖으니 그 소리 우레가 치는 듯하도다.
아,
용이 큰 연못에서 죽으니 미꾸라지와 두렁허리[鰌鱓]가 춤을 추고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죽으니 여우와 너구리가 노래하는데,
나라에 사람이 없으니
끝내 어찌하겠는가.
백 사람의 몸으로도 그 공적을 잇기 어려운데
만 사람이 나와 전송하였으니,
오직 나머지 진한 향기는
길이 사서(史書)[竹素]에 남으리로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