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상삼한 삼중대광(壁上三韓 三重大匡) 익성정국 동심좌명 치리우모 일덕안사 제세희재 찬화협보 익량상즙 주번한주당경 광찬우익 복벽재조 격천관일 늑정기상 문경호위 향리조안 선기촉물 전주결승 한광한림 악강천수 평형보아 정전획일 금려갱매 연사득체 선▨명▨ 질진타초 대외소회 반국정세 제뇌인사 보상광구 총관▨사 종덕화민 계옥재성 제천보곤 섭리미륜 촉유정원 공신(翊聖靖國 同心佐命 致理訏謨 逸德安社 濟世熙載 贊化夾輔 翼亮商楫 周藩漢柱唐鏡 光贊羽翼 復辟再造 格天貫日 勒鼎紀常 文經虎緯 嚮理措安 先機燭物 轉籌決勝 寒纊旱霖 嶽降天授 平衡保阿 定典畫一 金礪羹梅 練事得體 先▨明▨ 叱秦吒楚 大畏小懷 磐國鼎世 帝ꜹ人師 輔相匡救 摠管▨事 種德和民 啓沃裁成 濟川補袞 燮理■綸 燭幽定遠 功臣)이고, 특진 금자광록대부 수태사 개부의동삼사 중서령 상주국 상장군 판어사대사 식읍 10,000호 식실봉 3,000호(特進 金紫光祿大夫 守太師 開府儀同三司 中書令 上柱國 上將軍 判御史臺事 食邑 一萬戶 食實封 三千戶)로 진강공(晉康公)이며, 추증된 시호가 경성(景成)인 최공(崔公) 묘지명
금(大金) 정우(貞祐)
1 7년 기묘년(고종 6, 1219) 9월 20일 주석 삼한 중서령 진강공(柱石 三韓 中書令 晉康公)이 안흥리(安興里) 집에서 돌아가셨다. 12월 24일 봉황산(鳳凰山) 서남쪽 기슭에 장례지내려 하면서, 큰아들 부추공(副樞公, 崔怡)
2이 묘지명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내가 사사로이 말하기를 “공이 문사(文士)를 보호하고 길러 ▨▨에 뛰어오른 자가 매우 많습니다. 그러한데도 지금 굳이 나에게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대개 평소에 내가 참으로 고지식하여 헛되게 꾸미지 않고 사실을 잃지 않아서 글이 후세에 믿을 만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이 부귀와 공명을 성대하게 누린 일은 이미 뇌서(誄書)에 적혀 있고 평생의 영화와 힘들었던 일은 또한 애책(哀冊)에 쓰여져 있으므로, 이것은 되풀이하지 아니하고 다만 그 문벌의 원류와 관직에 등용되고 승진한 해 및 한두 가지 큰 업적만을 대략 적기로 한다.
공은 성이 최씨(崔氏)이고, 이름은 충헌(忠獻)인데, 본명은 난(鸞)으로, 우봉군(牛峰郡)
3 사람이다. 벽상 찬덕영렬좌성공신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 수사공 중서령 판호부사(壁上 贊德英烈佐聖功臣 三重大匡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尉 守司空 中書令 判戶部事)이고 추증된 시호가 익정(翊靖)인 ▨원(▨元)
4의 아들이다. 조부 정현(貞現)과 증조부 주행(周幸)은 조정에서 벼슬하면서 신중하고 삼갔으므로 크게 빛나지는 못하였는데, 모두 수태사 개부의동삼사 중서령 상장군(守太師 開府儀同三司 中書令 上將軍)에 추봉되었다. 어머니 진강국대부인 유씨(晉康國大夫人 柳氏)씨는 금자광록대부 중서령 상장군(金紫光祿大夫 中書令 上將軍) 정선(挺先)의 딸이다.
공은 젊어서부터 남에게 얽매이지 않으면서 기상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고, 사람을 포용하는 도량이 있었다. 처음 문음(門蔭)으로 양온령(良醞令)의 산직(散職)에 임명되었으며, 조금 뒤 성릉직(成陵直)이 되고, 위위주부(衛尉注簿)의 산직을 더하였다. 공(功)을 세워 이름을 드날리고자 스스로 다짐하였으나 도필리(刀筆吏)
5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므로, 관직을 바꿔 흥위위 보승산원(興威尉 保勝散員)에 임명되었다. 대정(大定)
6 갑오년(명종 4, 1174 )에 도적이 서도(西都)에서 일어나니,
7 왕명[斧鉞]을 받고 가서 정벌하는 원수(元帥)를 돕게 하고자 용감하고 ▨ 분발하여 목숨을 돌보지 않는 자를 뽑아 전봉별초(戰鋒別抄)를 만들었는데, 공이 천거되어 도령(都令)이 되었다. 한 지역을 맡아서 진(陣)을 함락시켜 적을 물리치고, 성벽에 올라 앞장서 들어가니 드디어 이겨서 난을 평정하였다. 군사들이 돌아오자 공로를 포상하여 본위별장(本衛別將)으로 옮겼다. 임금이 크게 등용하려는 뜻이 있어서 임시로 백성들을 다스리게 하여, 병신년(명종 6, 1176)에 지안동부사부사(知安東府事副使)가 되어 나갔다. 다스리는 것이 엄정하면서도 간결하고, 서리들에게는 엄하였으나 백성들에게는 관대하였는데, 당시 찰방사(察訪使)가 파견되어 두루 다니면서 수령의 치적을 평가하니 공(公)이 으뜸이라고 보고되었다. 임기가 차자 경자년(명종 10, 1180)에 응양부 섭낭장(鷹揚府 攝郞將)에 임명되었는데, 신축년(명종 11, 1181)에 섭(攝)을 떼고 진(眞)이 되었다.
정미년(명종 17, 1187) 봄에 경상진주도(慶尙晉州道)를 안찰(按察)하러 나갔는데,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으니 풍채가 위엄이 있고 엄숙한 것이 옛 사신의 모습과 같았다. 권신의 뜻에 거슬려 법령을 마음대로 적용하여 탄핵을 받으니,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곧 홀로 말을 타고 돌아오게 되었으나 식견이 있는 이들은 공이 그르다고 하지 않았다. 이 해에 용호군 섭중랑장(龍虎軍 攝中郞將)으로 승진하고, 무신년(명종 18, 1188)에 진(眞)이 되었다. 공의 성품은 평소 다른 사람보다 크게 뛰어나고 넓고 커서 두루 도움이 되지 않는 곳이 없었으나, 여러 해 동안 막혀서 뜻을 얻지 못하니 많은 사람이 이를 안타깝게 여겼다. 계축년(명종 23, 1193) 겨울 감문위중랑장 본위차장군(監門衛中郞將 本衛借將軍)으로 바뀌고, 갑인년(명종 24, 1194)에 섭장군(攝將軍)이 되었으며, 을묘년(명종 25, 1195) 여름 ▨▨좌우위정용 섭장군(▨▨左右衛精勇 攝將軍)이 되었다.
명종(明宗) 재위 말년에 권세있고 총애를 받는 신하<李義旼>가 ▨ 조정을 어지럽히자 조정에는 안팎으로 울분이 가득하였다. 병진년(명종 26, 1196) 여름에 공이 분연하게 의를 들어 마음대로 날뛰는 자를 ▨▨▨▨하니 나라의 운명이 이에 힘입어 편안해졌다. 감문위 섭대장군(監門衛 攝大將軍)에 올랐다가 얼마 되지 않아 좌우위(左右衛)로 바뀌고, 특별히 추밀원좌승선 지예부 겸 지어사대사 태자첨사(樞密院左承宣 知禮部 兼 知御史臺事 太子詹事)에 임명되었다.
정사년(명종 27, 1197) 가을에 임금이 나이 들어 정사를 부지런히 돌보지 않고 게으르게 되자 황태제(皇太弟)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바로 신종(神宗)이다. 공은 계책을 세워 임금을 맞아들이고 세운 공로가 있으므로 특별히 대중대부 상장군 ▨▨(大中大夫 上將軍 ▨▨)을 제수하고 나머지 관직은 전과 같이 하였다.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화상(畵像)을 그려 공신각(功臣閣)에 두게 하고 이어 철계(鐵契)를 내려 영원히 변하지 않는 믿음[帶礪之言]을 나타내었다. 겨울에 은청광록대부 추밀원지주사 이부상서(銀靑光祿大夫 樞密院知奏事 吏部尙書)로 옮겼는데, 다른 관직은 전과 같았다. 이 이후로부터 해마다 관직에 임명되고 승진하여 계(階)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이르고, 공(功)은 개부의동삼사 수태위 상주국(開府儀同三司 守太尉 上柱國)에 이르렀으며, 향(鄕, 鄕職)은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고, 관(官)은 항상 지주사 병부상서 지이부 어사대사(知奏事 兵部尙書 知吏部 御史臺事)를 겸대하였다. 우리 나라의 옛 제도에 계·공·향·직(階·功·鄕·職)이 여기에 이르려면 반드시 재상[宰府]에 오르는 것을 기다린 뒤에야 임명되었으나, 지금 특별히 이를 더해준 것은 대개 ▨ 공벌(功閥)이 찬란하고 뛰어나 이와 같게 하지 않으면 포상하기에 충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공은 이미 때를 만나고 임금을 만났으니 스스로 왕명을 출납하는 중책[喉舌之重]을 맡으면서 임금을 도와 꾸려나가면서 재능을 가려서 발탁하여 임명하고, 맡지 않은 일이 없었다. 임금 또한 진심으로 마음 속에 두고 중하게 여겨 좌우를 떠나지 않게 하였다. 그러나 하늘이 공에게 내려준 큰 재능은 근시직(近侍職)에만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게 하여, 신유년(신종 4, 1201) 겨울에 추밀원 이부상서 어사대부(樞密院 吏部尙書 御史大夫)로 크게 발탁하였으며 다른 겸대한 관직은 모두 이전에 임명받은 대로 하였다. 임술년(신종 5, 1202)에 수태부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守太傅 叅知政事 吏兵部尙書 判御史臺事)로 뛰어 오르고, 계해년(신종 6, 1203)에 수태사 중서시랑평장사(守太師 中書侍郞平章事)로 옮겼다.
갑자년(신종 7, 1204) 정월에 임금이 병이 들자 공을 불렀다. 안으로 들어가자 얼굴을 마주보고 직접 후사를 부탁하면서 동심좌명치리공신(同心佐命致理功臣)의 칭호를 내려 총애를 보였다. 대자(大子, 太子)가 내선(內禪)을 받고 공은 정치를 보좌하라는 유명(遺命)을 받으니, 온갖 제도를 바르게 하여 사방이 본받게 하며 정책을 밝혀 널리 구제하는 것에 뜻을 두고 임무로 삼았다. 이 해 겨울에 벽상삼한 삼중대광 문하시랑평장사 판병부사(壁上三韓 三重大匡 門下侍郞平章事 判兵部事)를 더하였다. 을축년(희종 1, 1205)에는 지위를 특진(特進)으로 올리고 우모일덕안사제세공신(訏謨逸德安社濟世功臣)을 더하였으며, 이어 문하시중 진강군개국후(門下侍中 晉康郡開國侯)로 삼고 식읍 1,300호에 봉하면서
8 지절사(持節使)를 보내어 책봉을 받게 하였다. 병인년(희종 2, 1206)에 중서령 상주국 판이부사 진강후(中書令 上柱國 判吏部事 晉康侯)에 오르고, 정묘년(희종 3, 1207)에 진강공(晉康公)을 더하였다. 무진년(희종 4, 1208)에 희재찬화협보익량공신(熙載贊化夾輔翼亮功臣)을 더하고 식읍도 늘려서 13,000호에 이르도록 봉하였다.
신미년(희종 7, 1211) 겨울 말에 관리의 인사[除授]문제로 임금을 뵈러 들어가 일을 아뢰려할 때 불평을 품은 무리들이 (공이) 오랫동안 총애를 받는 것을 시기하여 칼을 빼어들고 난입하여 반드시 공을 해치고자 하였다. 뜻하지 않게 일이 일어나자 비록 임금도 또한 놀라 내침(內寢)으로 피하였는데, 공은 홀로 단신으로 장지[紙障] 사이에 몸을 숨겨 어려움을 면할 수 있었다. 하늘이 공을 특별히 안전하게 하고자 끝까지 보호하려 하였다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강종(康宗)이 즉위하자 공에게 복벽재조 격천관일 늑정기상(復辟再造 格天貫日 勒鼎紀常)의 칭호를 더하였다.
지금의 임금<高宗>이 왕위를 잇자 더욱 더 마음에 두었는데, 관직은 품계의 끝이 있어 다시 더 올리지 못하였으므로 단지 그 보상(輔相)의 뜻을 나타내는 글자를 만들어 해마다 아름다운 칭호를 더할 따름이었다. 공은 은퇴할 나이가 되자 번잡함에서 벗어나고 바쁜 일을 사양하며, 마음을 가다듬으며 한가롭게 지내고자 하여 물러나기를 원하는 글[章]을 올렸다. 임금이 보고 몹시 놀라서 중사(中使)를 보내어 “공에게 계책을 구하여 얻었는데, 나라는 어찌하며 과인은 어떻게 합니까.”라고 간곡하게 타이르면서 그 청을 굳게 거절하였다. 머리에 비둘기를 새긴 지팡이[鳩杖]와 금칠을 한 안석[金几]을 갖추게 하고 사신을 파견하여 특별히 하사하면서 노년에 일을 처리할 때 기대는 도구로 삼게 하니, 공은 이에 어쩔 수 없이 사양하지 못하고 다시 나와서 ▨ 일을 보았다.
병자년(고종 3, 1216) 가을에 거란(契丹)의 도적들이 변방을 침범한 뒤 점점 들어와 서해(西海)
9와 춘주계(春州界)
10를 침입하고, 다시 동북쪽의 성보(城堡)를 잠식하게 되니 형세가 바뀌어 급하게 되었다. 공이 군사들이 호위한 가운데 앉아서 ▨▨▨▨ 군사를 일으키게 하고 장수를 파견하면서, 혹은 3군(三軍)으로 혹은 5군(五軍)으로 혹은 행영(行營)으로 삼게 하였는데 그 움직임이 일의 기세와 부합하여 능히 오랑캐를 탕멸하게 하였다. 임금이 크게 탄복하여 칭찬함이 휴▨(休▨)의 한 몸으로 비기며 국성(國姓, 王氏)을 내리고, 종정시(宗正寺)에 명하여 (왕실의) 족보에 올리게 하여 만세(萬世)의 경사와 신뢰를 보였다. 아, 옛 사람 이 말하기를 ‘공(功)은 세상을 덮을 수 없고 위엄은 군주를 떨게 할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오직 공은 ▨▨발(勃)이 편안하게 한 공로와 이윤(伊尹)
11의 섭정(攝政), 곽광(霍光)
12의 옹립하는 위엄을 갖추었다.
병진년(명종 26, 1196)으로부터 ▨▨ 지금(고종 6, 1219)에 이르는 24년 동안 온화하고 한적하고 우아하게 처신하면서 스스로 태연하였으니, 만물이 의논을 얻음이 없이 하나라도 어찌 성대해졌겠는가. 하늘과 땅이 자리를 정하면서 임금과 신하 간에도 차례가 생겼으니 그 간격이 천 ▨(리나 되나) ▨▨ 신하로서 훌륭함이 우리 공보다 뛰어난 자가 없었다. 공은 잔치를 베풀어 즐기는 것을 좋아하였으므로 세시(歲時)와 복랍(伏臘)
13이나 명절날에는 반드시 주연과 음악을 벌여놓고 거척(巨戚)과 ▨▨▨부(府)의 공(公)과 재상들을 맞이하여 서로 흥겹게 즐겼는데 ▨▨ 힘이 다하고 밤이 이슥할 때까지 이어지는 것을 상례로 삼았다.
올해(고종 6, 1219) 가을이 되자 병이 들었으나 여전히 보름날 저녁이 되면 ▨ 잔치를 베풀었다. 어떤 사람이 공에게 “공의 몸이 ▨ 좋지 않으니, 이와 같이 하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으나, 공은 ▨▨▨▨ 뜻을 굳게 하여 손님을 맞이하였다.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며, 음악소리와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은 가운데 밤을 새우고 새벽이 되어서야 손님들이 갔으니, 사람들에게 극진하게 정을 베푸는 것이 이와 같았다. ▨▨▨(병환이) 더욱 심해져서 다시는 ▨ 손님들과 서로 함께 하지 못하였다. ▨▨▨ 이별할 때가 되어 병이 깊어지자 병권(兵權)과 뒷일을 모두 부추공(副樞公)에게 부탁하고, 금궤(金几)와 구장(鳩杖)을 봉하여 돌려보내고, 글[表]을 올려 나라의 ▨▨▨▨를 사양하였다. ▨▨▨▨ 없어서 장차 ▨▨▨하려 하였다.
특별히 악공[伶官] 수▨▨(〔십 명〕)을 불러 ▨ 생황[笙], 퉁소[簫], 경쇠[磬], 피리[管], 거문고[琴]와 큰 거문고[瑟]를 모두 갖추어 음악을 연주하였는데, 끝나자 ▨ 돌아가시니, 춘추 ▨▨이다. ▨ 급하게 신선이 되어 떠난 것이 아니라면 능히 이와 같겠는가. ▨ 임금이 부음을 듣고 슬퍼하여 ▨▨▨ 좌우의 손을 잃은 것 같았으며 조회를 ▨▨ 동안 그치고 보지 않았다. 장례 일을 한결같이 ▨▨▨의 고사(故事)에 따르되 더함이 있게 하였으며 모두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하게 하였다. 시호를 추증하여 경성(景成)이라 하고, 이어 칙명을 내려 비기(秘器) 우▨(羽▨) ▨▨▨▨를 갖추게 하였다. 모든 관리들이 소복을 입고 ▨▨▨ 기슭에 모였으니 ▨ 평상시의 제도와 같지 않았다.
부인 송씨(宋氏)는 지추밀원사 상서좌복야 상장군(知樞密院事 尙書左僕射 上將軍)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송청(宋淸)의 딸이다. 아녀자로서의 가르침에 본받을 바가 있고 부도(婦道)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2남 1녀를 낳았으나 공보다 먼저 작고하였다. 장남은 지금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병부상서 상장군(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 兵部尙書 上將軍, 崔怡)이고, 차남은 지금 수사도 상주국 보성백(守司徒 上柱國 寶城伯, 崔珦)이다. 딸은 평장사(平章事) 임유(任濡)의 아들<任孝明>에게 시집갔으나 역시 공에 앞서 일찍 죽었다. 공은 예부상서(禮部尙書) 임부(任溥)의 딸과 ▨▨▨(다시 결혼하였는데) 바로 수성택주(綏成宅主)로, 아들 한 명을 낳았으니 수사도 상주국 영가백(守司徒 上柱國 永嘉伯, 崔珹<崔瑼>)이다. 또 강종(康宗)의 서녀(庶女)와 결혼하였는데 바로 정화택주(靜和宅主)로, 아들 두 명을 낳았으니 장남은 수사공 주국(守司空 柱國, 崔球)이고, 차남은 출가하여 조계종(曹溪宗)에서 업을 닦고 있으며 지금 선사(禪師)가 되었다.
충(冲, 趙冲)은 공에게 외람되게 보살핌을 가장 두텁게 받아서 늦게까지 태석(台席)에서 모시게 하고, 여러 차례 ▨▨▨▨을 이어 오르게 하니 영예가 매우 많았다. 이는 공이 추천하고 칭송해 준 덕분이다. 하물며 부추공은 특히 인척이 되어 ▨▨▨▨ 타이르니, 감히 매끄럽지 못한 글과 무딘 붓으로서 변명하고자 한다. 보문각대학사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상서좌복야 정당문학 상장군 판예부사(寶文閣大學士 金紫光祿大夫 守司空 尙書左僕射 政堂文學 上將軍 判禮部事) 조충(趙冲)이 짓는다.
명(銘)하여 이른다.
면면히 이어져온 복 받은 가문이 우봉(牛峰)에서 처음 시작하니
금과 같은 형제와 옥과 같은 친구가 군공(軍功)이 함께 두드러졌네.
훌륭한 명성이 한결 같으나 공이 홀로 쟁쟁하여
사직(社稷)의 심복이 되고 하늘과 땅 사이에서 기세를 드날리도다.
20여 년[二紀]간 재상을 지내고 고문(高門)에서 군주를 보필하니
인신(人臣)의 훌륭함이 그와 같이 존귀할 수가 없도다.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 이제 돌아가시니
아들이 있어 가문을 잇지만 그 한이 길도다.
그 불후의 공을 새기고 무덤[壽堂]에 간직하노라.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