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묘지명(金元義墓誌銘)
- 시대
- 고려
- 연대
- 1217년(고종 4)
- 크기
- 세로 45.5cm, 가로 53.0cm, 글자크기 1.2cm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6가 168-6 국립중앙박물관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 /각자 /서자
- 미상 / 미상 / 미상
- 지정사항
- 비지정유산
- 연구정보
개관
김원의(金元義 : 1147∼1217)의 본관은 해양(海陽)으로, 아버지는 좌복야(左僕射) 위(位)이다. 1170년에 명종이 영립될 때 우중금(右中禁)으로 어가를 수종(隨從)하여 대정(隊正)·교위(校尉)가 되었다가, 1174년(명종 4) 조위총(趙位寵)의 난에 공을 세워 별장에 올랐다. 다시 우군병마녹사(右軍兵馬錄事)로 남도의 반란을 토벌하여 낭장이 된 뒤, 1181년에 운중도감세사(雲中道監稅使)가 되었으며, 1188년에는 전라도안찰사를 역임하였다. 1196년에 장군으로 급사중(給事中)을 겸하였고, 형부시랑(刑部侍郎)·지합문사(知閤門事)를 거쳐 대장군이 되어 동번(東蕃)을 진수(鎭守)하였다. 1207년(희종 3)에 상장군에 올라 형부상서(刑部尙書)·선군별감(選軍別監)이 되고, 이듬해에는 추밀원부사 좌산기상시(樞密院副使左散騎常侍)를 거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었으며, 뒤에 수사공 좌복야 판삼사사(守司空左僕射判三司事)에 올랐다. 1212년(강종 1)에 참지정사 판예부사(參知政事判禮部事), 이듬해에 문하시랑평장사 판병부사(門下侍郎平章事判兵部事)가 되었다가 1215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스스로 즐기다가, 1217년(고종 4)에 향년 71세로 별세하였다. 시호는 경간(景簡)이다.대장군(大將軍) 인영보(印英輔)의 딸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낳았다. 성품이 바르고 욕심이 없으며 청렴하다는 평이 있었다.
판독문/해석문
해석문 | 김용선 | ||
판독문 | 김용선 | ||
판독문 | 허흥식 |
참고문헌
논문 | 2002 | 池斗煥, 2002, 「高麗時代 士族勢力의 형성과 변천(Ⅱ)-光山金氏를 中心으로-」『韓國思想과 文化』15 |
단행본 | 2001 | 金龍善, 2001, 『高麗墓誌銘集成(第三版)』,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
단행본 | 2001 | 金龍善, 2001,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
단행본 | 1984 | 許興植, 1984, 『韓國金石全文』中世下, 亞細亞文化社 |
단행본 | 1976 | 朝鮮總督府 編, 1976, 『朝鮮金石總覽』上, 亞細亞文化社 |
단행본 | 1976 | 劉燕庭, 1976, 『海東金石苑』下, 亞細亞文化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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