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금자광록대부 검교사도 수대위 문하시랑평장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 판호부사(金紫光祿大夫 檢校司徒 守大尉 門下侍郞平章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判戶部事) 최공(崔公) 묘지
이른바 대신(大臣)은 마땅히 이려(伊呂)
1와 같이 자부하여 ▨▨ 그릇은 깊고 그 식견은 원대하며, 나가면 곧 천하가 그를 중히 여기고 들어오면 곧 천하가 그를 가볍게 여긴다. 바르게 임금을 ▨(〔보필하여〕) 재능 있는 자를 세우니, 당상(堂上)을 거치면서 한 번도 말씨를 ▨ 하거나 얼굴빛을 찌푸리는 일이 없으므로, 온 세상 사람들이 의지하지 않는 이가 없어 태산(泰山)을 얻은 것처럼 편안하다고 한다. 일찍이 사안(謝安)
2이 그의 시를 읊으니 그 풍류는 족히 만물을 진정시킬만 하였고, 두여회(杜如晦)
3가 일을 벌리니 날로 ▨ 하여서, 그 공명으로써 ▨▨하여 모두가 훌륭한 재상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그러한 즉 단지 은혜▨로써 인(仁)을 삼고, ▨인(▨人)으로 의(義)를 삼아 한 때의 명예로 본받게 하지만, 대의(大義)를 판단하고 대의(大疑)를 결정하는 경우에는 ▨침묵하여 그 지키는 바를 모조리 잃게 되니, 의심많은 쥐처럼 망설이며 능히 혼자서 설 수 없는 자들이 어찌 가히 더불어 천녀(天女, 織女星)의 편안함과 위태함을 살필 수 있겠는가.
공의 이름은 당(讜)이고, 동주 창원군(東州 昌原郡)
4 사람이다. 삼한공신 삼중대광(三韓功臣 三重大匡) 준옹(俊邕)의 6대손이고, 증조는 태자대부(太子大傅) 원립(爰立)이며, 조부는 수대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 판이예부사 창원군개국자 식읍 500호 예숙공(守大保 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判吏禮部事 昌原郡開國子 食邑五百戶 譽肅公) 석(奭)이다. 아버지는 수사공 중서령 시랑평장사 집현전대학사 문숙공(守司空 中書令 侍郞平章事 集賢殿大學士 文淑公) 유청(惟淸)이고, 어머니[大夫人] 동래군 정씨(東萊郡 鄭氏)는 동지추밀원사 예부상서 한림학사승지(同知樞密院事 禮部尙書 翰林學士承旨) 항(沆)의 딸이다.
공은 성품이 ▨ 크고 ▨너그러우며 ▨말이 ▨(〔없으니〕), 문숙공이 자기와 비슷하다고 하여 더욱 중하게 여겼다. 일찍이 『시경(詩經)』과 『예기(禮記)』를 가르치니 학업이 날로 증진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교서(校書)가 되어 자문하였으며, ▨▨로써 ▨▨전판관(▨▨殿判官)에 임명되고 천우위녹사(千牛衛錄事)로 옮겼다.
경인년(의종 24, 1170)에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 추밀원당후관(樞密院堂後官)으로부터 ▨정언 지제고(▨正言 知制誥)에 임명되었다. 이 때 ▨ 충당되니 나라의 형벌과 상이 ▨▨에게서 나왔다. 두려워 하고 ▨▨▨하는 이가 있어서 ▨ 공이 ▨ 시비를 ▨ 논하니, 위태롭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공은 말과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 비록 쓰이지는 못했지만 ▨정(▨情)으로써 뛰어나니 ▨▨▨▨ 이로 말미암아 ▨에 이르렀다. ▨월에 기용되어 상식봉어(尙食奉御)가 되고 ▨▨를 하사받았으며, 예부(禮部)▨가 되어 ▨척부(〔三陟府〕)의 수령으로 나갔다. ▨ 얼마 되지 않아 ▨ 이부원외랑 지제고(吏部員外郞 知制誥)가 되었다. 공은 인륜(人倫)을 살펴보는 식견을 가지고 있어서 경종을 울리고 저울질을 하니 ▨▨ 살얼음같이 되고, 부끄러운 ▨을 서늘하게 하였다. ▨▨에 나아가니 지금의 ▨▨▨▨가 모두 공이 진작시킨 것이다. 호부낭중(戶部郎中)이 ▨(〔되어〕) 침착하게 다스리면서 ▨을 물리쳤고, 전라도염안사 겸 탐라안무(全羅道廉按使 兼 耽羅按撫)가 되었으며, 얼마 뒤 위위소경 보문각대제(衛尉少卿 寶文閣待制)에 임명되었다.
정유년(명종 7, 1177)에 ▨ 금(大金)의 횡선사(橫宣使)가 왔을 때 서적(西賊)이 길을 막으니 공이 임진현(臨津縣)
5의 길로 ▨ 사신들을 보내게 하였다. 사명(使命)에서 돌아오자 일을 잘 처리하였다고 칭▨(〔칭찬〕)받고 병부시랑 지제고(兵部侍郞 知制誥)가 되었다.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 사마시(司馬試)를 주관하여 당시 ▨(〔인재를〕) 뽑았다고 일컬어졌다.
6 서북면 원수막(西北面 元帥幕)으로 나가 진(鎭)을 다스리고, 돌아오자 예빈경(禮賓卿)에 임명되었다. 여러 차례 옮겨서 국자감대사성 병부상서 수사공 상서▨복야 ▨▨ 참지정사(國子監大司成 兵部尙書 守司空 尙書▨僕射 ▨▨ 叅知政事)가 되고, 과거[禮部]의 공거(貢擧)가 되어서는 잘 알려진 이름난 선비들을 많이 뽑았다.
7
신종(神宗)이 왕위에 오르자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평장사 상주국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판호부사 권판병부사(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平章事 上柱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判戶部事 權判兵部事)에 임명되었다. 경신년(신종 3, 1200)에 ▨▨▨ 물러나 옛일을 ▨ 흠모하여 ▨학사(學士) 장자목(張自牧, 張允文) 등 여덟 명과 기로회(耆老會)를 만들고 그림을 ▨ 새겨서 ▨ 세상에 전하게 하였다.
8
지금의 임금<熙宗>이 즉위한 지 8년이 되는 신미년(희종 7, 1211) 9월 18일에 병으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니 ▨▨▨▨(〔임금이 소식을 듣고〕) 놀라 ▨ 조회를 ▨▨동안 멈추고, ▨(시호를) 정안공(靖安公)이라고 ▨(추증하였으며), ▨▨조문하고 부의를 내리는 것을 한결같이 옛▨에 따랐다. ▨ 10월 26일에 ▨운산(▨雲山) 동북쪽 기슭에 장례지냈다.
공은 천성이 온화하고 마음이 넓었으며 기쁘고 성내는 기색을 ▨ 나타나지 않았다. 후배를 밀어주는 ▨ 것을 좋아하였는데, 사람이 착하다는 소식을 들으면 마치 자신의 일처럼 여겼다. 의종(毅宗) 때에 문숙공이 충성스럽고 삼갔으나 그 때문에 견책을 당해 지방으로 귀양가게 되자,
9 조금도 편안함을 ▨▨▨(〔구하지 않고〕) 따라가 ▨ 하루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대부인이 종기를 앓게 되자 공이 항상 정성껏 돌보았으니, 부모를 섬긴 일이 이와 같이 많았다.
대개 수명은 하늘이 ▨(〔정해주는〕) 것이므로, 착한 이가 ▨▨귀하게 되면 덕이 순수하지 않고, 행실이 남과 다르지 않으면 죽음[幽明]에 이르고 요절하는 경우가 많다. 공은 일찍이 대간[早囊]이 되어 간▨(〔諫言〕)을 바치면서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원문은 여기서 끝나는데, 서술내용으로 보아 문장이 더 이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묘지명 원석의 소재를 확인할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묘지명의 뒷면이나 또는 별석(別石)으로 글이 더 이어지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