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한 수대위 금자광록대부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호부사 상장군 상주국(守大尉 金紫光祿大夫 同中書門下平章事 判尙書戶部事 上將軍 上柱國)이고 추증된 시호 원평공(元平公)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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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성은 김씨(金氏)이고, 이름은 순(純)으로, 임진현(臨津縣)
2 사람이다. 아버지는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으로 추봉된 인단(仁旦)이고, 조부는 신호위중랑장(神虎衛中郞將)으로 추봉된 유정(惟正)이며, 증조는 신호위상장군으로 추봉된 유달(有達)이다. 어머니 송씨(宋氏)는 신호위 상장군으로 추봉된 송원(宋元)의 딸이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인정이 많았으며,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다. 금(大金) 정풍(正豊)
3 5년 경진년(의종 14, 1160) 3월에 판(判)하여 태자[儲闈]를 시종하게 하였는데, 강을 건너면서도 수레를 지키며 잠시도 벗어나지 않았으므로, 그 공으로 처음 등용되어 대정(隊正)이 되었다. 무자년(의종 22, 1168) 3월에 판하여 병진(兵陳)을 조련하는 직에 나아가고, 그 해에 섭교위(攝校尉)로 옮겼는데, 기축년(의종 23, 1169) 3월에 판하여 섭(攝)에서 진(眞)이 되었다. 경인년(명종 즉위, 1170) 10월에 판하여 임금을 수행하며 시위(侍衛)한 공으로 섭산원(攝散員)으로 옮기고, 그 해 12월에 섭을 없애고 진을 받았다. 신묘년(명종 1, 1171) 12월에 판하여 섭별장(攝別將)이 되었는데, 섭산원으로부터 섭별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특별한 명[制]에 따라 승진한 것이다.
갑오년(명종 4, 1174) 12월에 비(批)를 내려 섭중랑장(攝中郞將)에 임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게 하고, 을미년(명종 5, 1175) 12월에 비를 내려 섭에서 진이 되었다. 병신년(명종 6, 1176) 12월에 비를 내려 섭장군(攝將軍)이 되고, 무술년(명종 8, 1178) 12월에 비를 내려 섭에서 진이 되었다. 신축년(명종 11, 1181) 12월에 비를 내려 천우위섭대장군(千牛衛攝大將軍)에 임명하고, 임인년(명종 12, 1182) 12월에 비를 내려 금오위▨장군(金吾衛大將軍)에 임명하였다. 계묘년(명종 13, 1183) 12월에 비를 내려 예빈경(禮賓卿)을 겸하게 하고, 병오년(명종 16, 1186) 12월에 비를 내려 직문하성(直門下省)에 임명하였다. 정미년(명종 17, 1187) 12월에 비를 내려 천우위섭상장군 판위위사(千牛衛攝上將軍 判衛尉事)에 임명하였는데, 나머지는 모두 전과 같았다. 무신년(명종 18, 1188) 12월에 비를 내려 금오위상장군 전중감 겸 대자우▨도솔부솔(金吾衛上將軍 殿中監 兼 大子右淸道率副率)에 임명하였다. 기유년(명종 19, 1189) 12월에 비를 내려 호부상서 용호군상장군(戶部尙書 龍虎軍上將軍)에 임명하였다.
경술년(명종 20, 1190) 4월에 비를 내려 병부상서에 임명하고 군사의 일을 주관하게 하고, 그 해 12월에 비를 내리니 다시 호부상서(戶部尙書)로서 추밀원(樞密院)에 들어가 부사(副使)가 되었다. 신해년(명종 21, 1191) 12월에 비를 내려 공부상서 동지추밀원사(工部尙書 同知樞密院事)에 임명하고, 임자년(명종 22, 1192) 12월에 비를 내려 이부상서 지추밀원사(吏部尙書 知樞密院事)에 임명하였다. 갑인년(명종 24, 1194) 정월에 특별히 비를 내려 은청광록대부 참지정사 예부상서(銀靑光祿大夫 叅知政事 禮部尙書)에 임명하고, 갑인년 12월에 비를 내려 금자광록대부 수대위 상주국(金紫光祿大夫 守大尉 上柱國)에 임명되었는데, 나머지는 모두 전과 같았다. 을묘년(명종 25, 1195) 12월에 비를 내려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임명하고 나머지는 모두 전과 같이 하였다. 병진년(명종 26, 1196) 12월에 비를 내려 동중서문하평장사 판호부사(同中書門下平章事 判戶部事)에 임명하고, 나머지는 모두 전과 같이 하였다. 병부상서로부터 판호부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상장군을 겸대(兼帶)하였다.
무릇 공은 관직을 옮길 때마다 한 번도 뛰어오르는 적이 없이, 반드시 품계의 순서를 따라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청요직과 영예로운 직을 두루 거치고 장상(將相)을 겸하였으며, 그 반품(班品)은 수대위(守大尉)에 이르고 공계(功階)는 상주국(上柱國)에 이르렀으니, 어찌 성(盛)하다 하지 않겠는가.
승안(承安)
4 2년 정사년(명종 27, 1197)에 나이가 거의 예순에 가깝게 되자 글[章]을 올려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원하였으나, 갑자기 병이 들어 9월 17일에 단정하게 앉아 세상을 떠났다. 집에 빈소를 마련하였는데, 공의 빈소를 마련한 지 열흘도 되지 않아 지금의 임금[神宗]이 왕위에 올랐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추도하여 담당 관리에게 특별한 명을 내려 공적인 예[公禮]로써 장례지내게 하였으나, 여러 아들들이 나라가 새로이 시작되어 일이 많다고 하여 굳게 사양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조문하는 칙서와 뇌서(誄書)는 내리지 않고 다만 시호를 원평공(元平公)이라고 추증하고, 사흘 동안 조회를 보지 않았다. 그 해 11월 초사흘에 송림현
5 대령봉산(松林縣 大嶺烽山)의 서쪽 기슭에 사사로이 장례[私葬]지내니, 예(禮)에 따른 것이다.
명(銘)하여 이른다.
재능과 인품은 넓고 깊고 풍채는 날래고 씩씩하여서
장수(將師)를 따라서 벼슬하여 우뚝 솟아 보상(輔相)이 되었다.
한 몸의 지위와 명성과 부귀를 끝까지 온전하게 하고
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서 돌아가시니 마치 한밤중에 참선함 그대로였도다.
생사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을 다스려 곧 자연 그대로의 참됨[天眞]이 되게 하였으니
아, 뛰어난 그 덕망을 여기 단단한 돌에 새기노라.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