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문학 참지정사 판상서예부사(政堂文學 叅知政事 判尙書禮部事) 유(柳) 묘지
공은 이름은 공권(公權)이고, 자는 정평(正平)이며, 성은 유씨(柳氏)로, 시령(始寧)
1공은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여 다른 기예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문장이 뛰어나 뜻이 분명하고 순(純)▨▨▨하였다. 정원(貞元)
2 3년(의종 9, 1155)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3 이듬해 대학(大學)에 들어가자 철마다 치르는 시험[季考]와 달마다 짓는 문장[月書]에서 매 번 우등을 차지하였다. 경진년(의종 14, 1160 )에 상국(相國) 김영부(金永夫)공의 문하(門下)에서 을과(乙科)로 등제하였다.
4 신사년(의종 15, 1161)에 관례에 따라 청주목장서기(淸州牧掌書記)가 되었는데, 청렴하게 ▨ 직책에 임하였으므로 서리와 백성들이 차마 속이지 못하였다. 3년이 지난 뒤 들어와 익양부녹사(翼陽府錄事)가 되었는데 행동이 한결 같으니, 임금이 이로써 공이 충성스럽고 정직하며 다른 마음이 없이 부지런하여 대신(大臣)의 절개가 있음을 알았다. 바람과 구름이 만나듯이 임금과 신하가 만난 것은 진실로 여기에 바탕을 둔 것이다.경인년(의종 24, 1170)에 지금의 임금<明宗>이 즉위하자 크게 등용하고자 하여 곧 공을 불러 내시[內宦]로 삼고, 이에 사문박사 겸 직사관(四門博士 兼 直史館)에 임명하였다. 드디어 ▨ 군기시(軍器寺)와 대부시(大府寺)의 주부(注簿)를 거쳐, 을미년(명종 5, 1175)에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다. 이 뒤로 해마다 관직에 임명되고 승진하여 전중내급사 상의봉어 호부원외랑(殿中內給事 尙衣奉御 戶部員外郞)과 공·병(工·兵) 양부의 낭중(郎中)을 거쳤다. 임인년(명종 12, 1182)에 국학직강(國學直講)을 겸하게 되자 여러 생도들이 모두 본보기로 삼았는데, 이른바 학행(學行)으로 가히 스승이 될 만한 이였기 때문이다. 이듬해에 장작소감 대자사경(將作少監 大子司經)으로 승진하고, 또 태자중윤 충사관수찬관(太子中允 充史館修撰官)으로 옮겼다. 또 그 다음해에는 군기감 동궁시강학사(軍器監 東宮侍講學士)에 올랐다. 공은 정담(鄭覃)
5과 같이 옛 것을 살펴 바른 것을 지키는 덕이 있었기 때문에 태자가 매번 볼 때마다 특별히 예우를 더하였다.
병오년(명종 16, 1186 )에 명을 받들어 북조(北朝, 金)에 사신으로 갔는데,
6 행동하는 것이 법도와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 없으므로 북인(北人)들이 이에 존경하였다. 임금이 그 사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음을 가상하게 여겨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고치고, 이어서 예빈경 추밀원우부승선(禮賓卿 樞密院右副承宣)에 임명하였다. 공은 경인년부터 임금의 총애를 받은 이래 궁궐[天院]을 떠나지 않고 높은 벼슬을 두루 거치면서 왕명을 출납하는 지위[喉舌之任]에 이르렀다. 임금이 마치 심복과 같이 대우하고 친애하는 것이 다른 신하들보다 매우 월등하였다. 기유년(명종 19, 1189 )에 남성시(南省試)를 주관하여 뽑은 이들이 모두 당대의 이름난 선비가 되었으므로,
7 배우는 이들이 미담으로 여겼다. 이듬해에 판대부사 우승선(判大府事 右承宣)에 오르고, 또 그 이듬해에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을 더하고 태자찬선대부(太子贊善大夫)를 겸하였다.
임자년(명종 22, 1192 )에 한림학사 동지공거(翰林學士 同知貢擧)가 되었다.
8 이에 앞서 시험장에서 여러 생도들이 의례히 모두 서로 훔쳐보고 몰래 베껴서 훌륭한 이와 어리석은 이가 뒤섞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공이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과거[禮闈]를 치르면서 하나같이 법규대로 시행하였으므로 시험장이 엄숙하게 바로 잡혔으며, 방(牓)이 발표되자 모두 빼어나서 당시 사람들이 복숭아꽃과 오얏꽃 같은 훌륭한 선비들이 그 문하에 있다고 하였다. 이듬해에 좌산기상시 지주사 지이부사(左散騎常侍 知奏事 知吏部事)로 옮겼다. 공이 납언(納言)이 되어 7년 동안 임금의 정치를 자문하면서 안으로 실상을 숨기지 않고, 임금의 행실을 보좌하면서 그 행동에 강직한 기상이 있었으므로 조정의 기강과 나라의 체통을 바로 잡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비록 중산보(仲山甫)
9가 왕명을 출납한다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가 없을 것이다. 갑인년(명종 24, 1194)에 동지추밀원사 겸 대자빈객(同知樞密院事 兼 大子賓客)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갑자기 풍질(風疾)이 들었다. 가료하였으나 쉽게 낫지 않으니, “‘만족함을 알면 욕되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10 라는 말은 오래된 도리입니다. 하물며 병이 점점 더하니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드디어 글[章]을 올려 직책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조(詔)를 내려 “고전(古典)에도 ‘원로[舊人]에게 직책을 맡겨 함께 다스려야 하니, 사람은 오직 옛 사람을 구하여야 한다’
11고 하였습니다. 과인이 어찌 황급하게 그대의 청을 따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굳게 여러 차례 고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물러나기를 간절하게 빌자 또 조서를 내려 “과인이 원로와 더불어 정치를 함께 하고자 생각했으나 이제 경이 이와 같이 하니, 마치 짝 잃은 새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은 다행하게도 아직 늙지 않았으니, 나이가 더 들면 다시 공경(公卿)의 반열에 두도록 하겠습니다. 과인이 바라는 바는 원컨대 (경이) 오래 사는 것이지만, 오직 요청이 이와 같으니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이에 오로지 약과 침으로 요양하였다. 갑자기 어느 날 탄식하며 말하기를, “사람이 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은 앞으로도 편안하려니 하기 때문이오. 지금 병이 이와 같으니 빨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라고 하였으니, 말없이 조용한 가운데에도 마음을 담백하게 비우며 다스리는 것은 비록 친척이라도 능히 알지 못하였다. 병이 다시 심해지자 임금이 이에 조서를 내려 정당문학 참지정사 판예부사(政堂文學 叅知政事 判禮部事)로 삼았다.
병진년(명종 26, 1196) 가을 7월 19일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65세이다. 아, 날랜 준마가 힘을 다해 달리다가 진흙에 빠져 발이 굽혀지고, 높이 나는 기러기가 솟구쳐 올랐다가 구름 속에서 날개가 부러졌으니, 모든 사대부들이 애통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임금 또한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시호를 내려 문간공(文簡公)이라 하였다. 곧 그 해 8월 13일 경신일에 송림군(松林郡)
12 서산(西山) 남쪽 기슭에 장례지냈다.
부인은 대부주부(大府注簿) 손각(孫珏)의 딸로 회도군군(懷道郡君)에 봉해졌으며, 자녀로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지금 내시 시호부낭중 겸 대자내직랑(內侍 試戶部郞中 兼 大子內直郞)이며,
13 차남은 지금 내시 정용섭별장(內侍 精勇攝別將)이다.
14 딸은 윤씨 집안의 아들[天水子]
15<尹威>에게 시집갔는데 지금 공부낭중 지제고(工部郞中 知制誥)이다.
명(銘)하여 이른다.
문장은 족히 도(道)를 꿰뚫고 공업(功業)은 족히 한 때를 다스리니,
지위는 재보(宰輔)에 오르고 덕망은 원로[元龜]가 되었도다.
천자가 옛일을 생각하여 뒤에 가상히 여기고 포상하였으니
공은 인신(人臣)의 도리에 있어서 또 무엇을 더하겠는가.
한 시대의 으뜸이 되고 만인에게 촉망받았으나
태산(泰山)이 무너져 버렸으니 사람들이 장차 어디를 우러러보겠는가.
백세(百世)가 지나도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푸르를 것은
오직 공의 묘일 터이니 혹시라도 손상됨이 없게 할지어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