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정(大定)
1 21년(명종 11, 1181) 정월 병인일에 조산대부 형부상서 한림학사(朝散大夫 刑部尙書 翰林學士)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이공(李公)이 서울 자운리(慈雲里) 집에서 돌아가셨으므로, 남산(南山) 불음사(佛陰寺)에 빈소를 차렸다.
공의 이름은 문탁(文鐸)이고, 자는 인성(仁聲)이며, 상당 열성군(上黨 悅城郡)
2 사람이다. 아버지 순(純)은 급제하였으나[擧子] 일찍 작고하여 도염승(都染丞)으로 추증되었고, 조부 주좌(周佐)와 증조 한좌(漢佐)는 모두 현장(縣長) 벼슬을 하였다. 어머니 이씨(李氏)는 열성군부인(悅城郡夫人)으로 추증되었으나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였고, 계모 이씨(李氏)는 원래부터 서울의 관리의 자녀였다.
공은 일찍이 ▨모(〔父母〕)가 돌아가셨으나 떠돌이가 되지 않고, 17세에 서울로 들어가 학문을 시작하였다. 계모 이씨의 집에서 자라났는데 어머니가 다른 ▨(〔형제〕)인 허정선사 담요(虛靜禪師 曇曜)와 우애가 깊었다. 재상(宰相) 윤언이(尹彦頤)가 주관한 성균시(成均試)에 공이 또한 선발되었는데, 윤공은 ▨ 공의 재능과 도량이 크고 깊은 것을 알고 마치 자식과 같이 돌보아 주었다.
기미년(인종 17, 1139)에 대학(大學)의 육관(六館)
3에 들어갔는데 여러 생도들이 모두 공의 훌륭한 인품에 감복하였으며, 모든 ▨ 논의에서 감히 겨룰 자가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좌씨춘추(左氏春秋)』에 밝아서 여러 차례 많은 선비들 중에서 으뜸을 차지하였는데, 병인년(인종 24, 1146 )에 상사(上舍) 제2인으로 병제(丙第)에 합격하였다.
4 영주
5장서기(寧州掌書記)가 되어 나가서 은혜와 위엄을 고르게 베푸니, 서리와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존경하였으며 조야(朝野)가 크게 칭찬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주▨(州▨)에 전후하여 부임한 서기(書記)[管記]들이 모두 미치지 못한다.
재상 최윤의(崔允儀)가 나라를 다스리면서 ▨에 밝고 잘 처리할 수 있는 문사(文士)를 선발하여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로 삼으려고 하여 좌우에 물으니, 당시 조정[省閤]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공을 언급하였다. 최재상이 기뻐하며 공에게 말하기를 “나 역시 일찍부터 그대의 인품을 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추천하여 녹사(錄事)로 임명하니 무릇 변방의 중대한 논의를 모두 맡게 되었다. 당시 ▨ 일본국 대마도(日本國 對馬島)의 관인(官人)이 변방의 일로 문서[牒]를 동남해 도부서(東南海 都部署)
6에 보내왔다. 도부서가 감히 ▨ 결정하지 못하고 역마를 달리게 하여 조정에 보고하니, 양부(兩府, 中書門下省과 中樞院)에서 의논하여 즉시 상서도성(尙書都省)으로 하여금 그 문서에 대하여 회답하라고 하였다. 공이 그 일을 듣고 승제(承制) 이공승(李公升)에게 “저 대마도의 관인은 변방의 관리입니다. 지금 상서도성으로 하여금 문서를 회답하도록 하는 것은 매우 체통을 잃는 일이니, 마땅히 도부서로 하여금 공문을 ▨ 되돌려주게 하여야 합니다.”라고 말하니, 승제 이공이 놀라서 “그대의 말이 아니었으면, 거의 나라의 체통을 잃을 뻔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공의 뛰어난 식견이 환하게 드러났다.
정풍(正豊)
7 연간에 금(金)나라에서 초적(草賊)이 벌 떼 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변방을 지키는 장수들이 여러 차례 말하기를 금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나 연경(燕京)이 ▨폐허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말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나라에서 신사(信使)를 보내지 않은 것이 여러 해가 되었다. 임오년(의종 16, 1162)에 금나라가 문서[牒]를 보내와 까닭을 물으면서 ▨▨라고 하였으나, 명확하게 대책을 결정하지 못하였다. 최재상이 공을 불러 의논하자 공은 “대국의 사정은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사람을 보내어 그 허실을 ▨▨(살피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최재상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 계책을 써서 마침내 사람을 보내어 살피게 하니, 돌아와 보고하기를 “초적은 이미 평정되었고 새 황제<世宗>가 연경에서 즉위하였습니다. 만일 곧 신사를 보내지 않으면 그들은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려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 죽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즉시 사신을 보내어 입조(入朝)하게 하였으니, 지금까지 변경이 평안하고 조용하며 대국과 평화롭게 잘 지내고 있는 것은 공의 힘이다.
감찰▨▨(監察▨▨)로 옮겼다가 ▨▨주(州)의 ▨찰사(按察使)가 되니, 변방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였다. 이에 앞서 감영 건물이 낡았으나 주의 경내에는 재목이 없어서 힘들었다. ▨▨▨▨▨▨▨▨▨ 말하기를 “오랫동안 평화롭게 교류하면서 여러 차례 매[鷹鷂]도 보내주었으니, ▨ 목재를 경내에서 얻어 써도 좋습니다.”라고 하여
<뒷면>
▨▨▨▨▨▨▨▨▨▨▨▨▨▨ 더욱 칭송받았다. 돌아와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수판관(守判官)으로 옮겼다. 의종(毅宗)이 다시 서도(西都)에 거둥하자 동료들이 서로 어울려 음식을 바치면서 임금에게 아첨하였으나, 공만은 홀로 음식을 바치지 않았다. ▨▨의 난에 서도(西都)가 ▨ 가장 중요하였으나, 공의 청렴한 덕망으로 말미암아 감히 해를 가하지 못하였다.
임금<明宗>이 즉위하자 평소에 공의 이름을 알고 있었으므로 ▨ 우사간 지제고(右司諫 知制誥)로 임명하고, 거듭 승진하여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었다. 계사년(명종 3, 1173) 가을에 양광주도 안찰사(楊廣州道 按察使)로 나갔는데, 얼마 되지 않아 보당<金甫當>이 북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강남의 주군(州郡)이 모두 응하였다. 그 때문에 지방에 나가있던 진신(搢紳)들이 모두 해를 입었으나 공은 홀로 신중하였으므로 그 난에 관련되지 않았다. 호부시랑 우간의대부(戶部侍郞 右諫議大夫)로 발탁되었고 국자제주(國子祭酒)로 옮겼다.
공은 어려운 일을 많이 겪어서 성(省)에 있는 5년 동안 힘써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감싸주며 너그럽고 삼가며 신중하게 처신하였으므로 칭송받았다. 예부상서 한림학사(禮部尙書 翰林學士)로 옮기고, 병신년(명종 6, 1176)에 과거[禮部試]의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시험을 치르니 진사(進士) 진헌의(秦獻衣) 등 34명이 급제하였는데 모두 당대의 선비를 뽑았다고 ▨(〔칭찬하였다〕).
8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옮겼으나 나이가 들어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고 3년 뒤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3세이다.
부인 담양군군(潭陽郡君)은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추증된 세균<田世均>의 막내딸이다. 자녀로 아들은 두 명을 두었는데, 장남 항(沆)은 위위주부동정(衛尉注簿同正)인데 일찍이 울진현위(蔚珍縣尉)가 되어 잘 다스렸다고 알려졌고, 차남 비(秘)는 위위주부동정이다. 딸은 세 명으로, 장녀는 상의직장동정(尙衣直長同正) 박대원(朴大元)에게, 차녀는 상의직장동정 이덕린(李德鄰)에게, 막내는 군기주부동정(軍器注簿同正) 최홍례(崔弘禮)에게 시집갔는데 모두 훌륭한 사위들이다. ▨(〔그〕) 해 2월 경인일에 성남(城南) 천덕산(天德山)의 서남쪽 기슭 장례지내니, 예(禮)에 따른 것이다.
공은 포의(布衣)에서 일어나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높은 지위에 올라갔지만 재산을 모으지 않았다. 뛰어난 재상이 되어 명망이 있었으나, 평소 풍질[風痺]를 앓아서 만년에는 거의 업무를 보지 못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 재▨(宰相)의 지위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진신(搢紳)과 식자(識者)들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공이 어릴 때 점장이[相工] 박총(朴聰)은 나이가 100여 살로 ▨(〔사람의〕) 화복(禍福)에 대하여 잘 말하였는데, 공을 보고 “평생 지위가 팔좌(八座)
9에 오르겠지만 단지 나이가 73세를 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라고 하였는 바, 지금 ▨▨으로 나이가 꼭 들어맞는다. 훗날의 일을 밝게 알았으니, 작록과 수명은 대개 본래 정해진 것이다. 문인(門人)인 외종질(外從姪) 시합문지후(試閤門祗候) 이동▨(李東▨)가 머리 숙여 울면서 묘지명을 ▨(짓는다).
명(銘)하여 이른다.
공은 열성(悅城)에서 태어나 서울로 올라와 공부하였는데
대학(大學)에서의 8년 동안 여러 생도 가운데 여러 차례 으뜸을 차지하였다.
중▨(中外)의 관직을 거치면서 가는 곳마다 ▨▨하여
▨▨ 본보기가 되고,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알았다.
▨국(北國, 金)과 통▨(〔通好〕)하니 변방이 평안하였고
어렵고 ▨을 미리 대비하여 ▨ 임무가 ▨ 않았다.
천명(天命)이 나란히 하지 않아 태형(台衡)에 이르지 못하였으나
▨의 소식을 전하여 여기 ▨에 기록하노라.
이 ▨▨에 새겨서 무덤에 남기니
덕망과 영예가 오래도록 더욱 밝아지기를 바라노라.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