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백계산
1 옥룡사
2 증시 선각국사
3(贈諡 先覺國師) 비문과 아울러 서문
익성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
4 수 대위(守 大尉)
5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자사 집현전대학사 판상서 형부사 감수국사 상주국 신 최유청
6(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 集賢殿大學士 判尙書 刑部事 監修國史 上柱國 臣 崔惟淸)이 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조산대부
7 상서 예부시랑 한림시독 학사 지제고 사자금어대 신 정서
8(尙書 禮部侍郞 翰林侍讀 學士 知制誥 賜紫金魚袋 臣 鄭叙)는 조칙을 받들어 비문을 쓰다.
의종 임금
9께서 보위를 이은지 4년째
10되던 10월 신유에, 臣 惟淸에게 조칙으로 명하여 이르기를, 선각국사는 도덕이 고매할 뿐 아니라, 국가에 대한 공업도 가장 많아서 우리 조종
11께서 여러 차례에 걸쳐 법계(法階)를 봉증(封贈)하였다.
12 그러므로 국가에서 대사에게 존중함이 지극하였다. 그의 성덕과 대업을 아직 비문으로 전하지 못한 것을 짐이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
13 인고(仁考)
14께서이미 경에게 命하여 비문을 찬술케 함은 그것은 곧 국사에 대한 지극한 공경을 표한 것이다. 신이 왕명을 받고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물러나와 그 행장 자료를 살펴 사실의 자세한 내용을 얻고는 차례로 기술하였다.
스님의 휘는 도선(道詵)이요, 속성은 김씨이며, 신라국 영암
15 출신이다. 그의 세계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史事는 유실하였다. 혹자는 이르기를 태종대왕
16의 서얼손
17 이라고도 하였다. 어머니는 姜氏니, 어느 날 밤 꿈에 어떤 사람이 明珠 한 개를 건네 주면서 삼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임신하여 만삭이
18 되도록 오신채(五辛菜)와 누린내 나는 육류(肉類)
19는 일체 먹지 아니하고
20 오직 독경과 염불로써 佛事에 지극하였다. 태어난 후, 유아시기부터 일반 아이
21들보다 특이하였다. 비록 어려서 희희(嬉戱)
22하거나, 우는 때에도 그의 뜻은 부처님을 경외함이 두터웠다. 그리하여 부모가 그는 반드시 불법을 담을 만한 그릇임을
23 알고, 마음으로 출가를 허락하기로 하였다. 15살이 되었을 때, 이미 영오(穎悟)하고 숙성
24할 뿐 아니라, 기술과 예술
25에까지 겸비하였다. 드디어 머리를 깎고
26 월유산
27 화엄사에 나아가서 大經
28을 독습하여 1년도 채 되지 않아
29 이미 大義를 통달하였다.
문수의 妙智와 보현의 玄門에 모두 契入하여 남음이 없었다. 百千이나 되는 학도들이 모두 해안
30하여 神聰이라 하였다. 문성왕
31 8년
32 20살 때에 이르러 홀연히 스스로 생각한 나머지 말하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교법을 여의고 스스로 靜慮하여야 할 것이어늘
33 어찌 능히 움직이지 않고 올올(兀兀)하게 문자에만 고수하고 있겠는가." 이때 혜철대사
34가 密印을 서당지장(西堂智藏)
35 禪師로부터 전해받고, 귀국하여 전라남도 곡성군 동리산
36 대안사에서 開堂하여 연설하고 있었으므로 법을 구하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스님도 선문에 구의(摳衣)
37하여 제자가 되려고 청하였다. 혜철대사가 그의 총명함을 가상하게 여겨 알뜰히 지도하였다. 무릇 이른바 말이 없는 말과 法이 없는 法을
38 허중(虛中)
39에서 주고 받아 확연히 크게 깨달았다. 23살 때 혜철대사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이미 一乘了義를 통달하고, 參學하여 일정한 곳이 없었다. 노을을 밟고 천석(泉石)
40을 완상하면서 유수(幽邃)한 곳과 명승지를 찾아
41 선지식을 친견하고 問法하기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42 때로는 운봉산
43밑 동굴
44에서 참선하기도 하고, 혹은 태백
45과 같은 큰 바위 앞에 초막을 맺고 좌선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의 명칭이 널리 퍼져서 온 천하
46 사람들이 그의 도덕을 尊仰하였다. 신비한 기적이 많았으나, 그러나 별로 중요하지 아니한 것은 기록하지 않았다. 희양현 백계산에 옛 절이 있었으니, 그 이름이 옥룡사였다. 스님께서 遊歷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그 경치가 幽勝함을 좋아하여 堂宇를 개수하고, 시원하게 여겨 이곳에서 정진하다가 임종할 곳으로 뜻을 굳히고
47, 연좌(宴坐)
48하여 망언
49하기를 무려 35년 동안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의 도덕을 흠모하여 마치 양고기가 있는 곳에 개미가 모여들 듯
50, 학인들이 사방으로부터 구름처럼 운집하였다. 세수할 때에는 수건과 양치질할 물을 수발하며
51, 출입할 적에는 錫杖과 신발을 준비하는
52 등 정성껏 시봉하였다. 문하에 제자가 항상 수백명을 넘었다. 차별적인 모든 根機들에게 一雨로 널리 윤택하였으며
53, 목격(目擊)
54 현장에서 신비하게 密授하여 빈손으로 나아가서 가득히 채워서 돌아갔다.
55 헌강왕
56이 그의 높은 덕을 공경하여 사신을 보내 禁中
57으로 맞이하고 처음 보는 초면에 크게 기꺼워하여 禁中에 머물게 하고, 수시로 玄言과 妙道로써 임금의 마음을 開發토록 조언하였다. 얼마 후 시끄러운 경주가 싫어서 本寺
58로 돌아가도록 간청하였다. 어느 날 홀연히 제자들을 불러놓고 이르기를, "나는 곧 이 세상을 떠나갈 것이다. 대저 인연을 따라왔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따라가는 것은 진리의 상도이니, 어찌 오래도록 이 세상에 거할 수 있겠는가"하고 엄연히 입적하였으니, 때는 대당(大唐) 광화 원년(光化 元年)
59 3월 10일이었다. 향년은 72세이다. 사부대중
60들이 슬피 통곡하니 마치 사모하는 듯, 또는 넋이 빠진 바보와도 같았다. 드디어 神座를 옮겨 탑을 절 북쪽 언덕에 세웠으니, 유명을 준수한 것이다. 효공왕이 소식을 듣고 도탄(悼歎)하면서 특히 시호를 요공선사(了空禪師), 탑명(塔名)을 증성혜등(證聖慧燈)이라 추증하였다. 문인 홍적
61 등이 先師의 빛나는 행적
62이 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눈물을 머금고, 表狀을 올려 누구를 시켜 비문을 짓도록 하여달라고 간청하였다.
임금께서 이에 서서학사(瑞書學士)
63 박인범
64에 명하여 비문을 지었으나, 마침내 돌에 새기지 못하였다.
65 처음 스님께서 옥룡사에 자리잡지 아니하고
66, 지리산 구령
67에 암자를 짓고 주석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떤 이상한 사람이 찾아와 座下에서 스님께 여쭈어 이르기를, "弟子는 物外에서 깊이 숨어서 살아온 지가 벌써 수백년에 가깝습니다. 조그마한 기술이 있어 높은 스님에게 받들어 올리려 하오니, 만약 천술(賤術)이라 하여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시면
68 다른 날 남해의 바닷가에서 마땅히 알려 드리겠사오니, 이것 또한 대보살이 세상을 구제하며, 중생을 제도하는 법이옵니다"라 하고,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스님께서 기이하게 여겨 약속했던 곳으로 찾아가서 과연 그 사람을 만났다. 그는 곧 모래를 끌어모아 산천에 대한 順逆의 형세를 만들어 보여주었다. 돌아다 보니 그 사람은 이미 없었다. 그곳이 현재의 구례현 경계 지점이니, 그 지방 사람
69들이 사도촌
70이라고 일컫는다.
이로 말미암아 스님은 스스로 홀연히 깨닫고
71, 더욱 음양오행의 술을 연구하였다. 비록 금단
72과 옥급
73 등 유수한 비결
74들을 모두 흉중
75에 담았다. 그 후 신라의 政敎가 침쇠(寢衰)하여 국가 위망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스님은 장차 성인이 천명을 받아 特起할 사람이 있을 줄 알고, 그 길로 송악군
76으로 갔더니, 그 때 우리 세조
77께서 郡方에서 거택을 짓고 있었다. 스님께서는 그의 문전을 지나면서 이르기를, "아! 이곳은 마땅히 王者가 출생할 곳이언만 다만 經始하는(살고 있는 사람) 자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 했다. 그 때 마침 靑衣童子가 이 말을 듣고 집 안으로 들어가서 이 사실을 세조에게 전하였다. 세조는 급히 나와 스님을 집 안으로 迎入하여 그 謀策과 改營에 대해서 자문하였다. 스님께서 대답하되, "2년 후에
78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대답하고, 이어 책 1권을 지어 겹겹으로 封하여 세조에게 주면서, "이 책은 아직 출생하지 아니한 군왕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79 그러나 나이 장실(壯室)
80에 이른 후에 전해 주라"고 당부하였다.
바로 이 해에 신라 헌강왕이 즉위하였는데, 唐나라 건부 2년
81에 해당된다. 4년
82에 이르러 태조 왕건이 과연 前第
83에서 탄생하였다. 그 후 장년에 이르러 스님이 전해 준 책을 받아 보고서야 천명이 자신에게 내려진 줄 알고, 드디어 구포(寇暴)
84한 무리를 제거하고 비로소 區宇에 나아갔으나
85, 공손히 신성의 뜻을 받든 것이지, 어찌 천하를 소유할 욕심이 있었겠는가? 그 까닭은 반란의 무리를 무찌르고, 정의로 돌아가서 국민을 도탄으로부터 구제하여 壽域에 오르도록 하였다.
86 이와 같은 큰 위업
87과 아름다운 덕
88이 未來際가 다하도록 끝없이 傳할 것이며, 비록 다시 하늘이 有德한 이를 도우며
89, 백성들은 모두 인의를 지켰다. 그러나 그가 계성(啓聖)
90하여 화원(化元)
91을 기약한 것은 결정코 천명을 유수(幽數)
92에서 이룩하였으니, 그 원인은 모두 우리 스님으로부터 發起되었다. 대개 功烈이 우뚝하고 혁혁함이 이처럼 성대하므로 마땅히 포상하고 추모하며 존숭하였다. 그리하여 현종
93이 大禪師라는 법계를 追贈하였으며, 숙조(肅祖)
94는 王師로 추봉하고, 우리 聖考이신 효공대왕
95조에 이르러 열성
96조에 대한 위업을 크게 선양하였다.
따라서 스님에게 건국공로에 대한 은혜를 보답하는 뜻으로, 드디어 선각국사
97로 책봉하고 사신을 本寺의 影堂에 보내 국사 추대의 고례행사(告禮行事)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98 의종 임금께서는 또 그 사적을 비에 새기도록
99 명하여 오래도록 전하게 하였으니, 장하신지라, 왕조의 존경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이다. 臣이 생각나는대로 말하건대, 대저 제왕이 장차 일어남에 있어 그 威靈과 氣燄이 반드시 먼저 物心에서 動蕩함이 있게 되므로
100 높은 재주를 가진 이와 뛰어난 학식을 가진 자들이 전연히 일어나되, 혹은 앞서기도 하고, 혹은 뒤를 따르기도 하여 起用함이 되었다. 예컨대 국사께서 태조에 대하여 陰助한 사실은 심히 위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개 먼저 태조가 태어날 것을 미리 알았으며
101, 그가 말한 예언들이 그의 죽은 후에도 적중하였다.
102 그의 신비한 부작이 冥契한 것은 不可思議함이 있었다. 오호
103라! 스님의 도덕은 극치에 이르러 佛祖와 더불어 합일하였으며, 자취를 나타낸 것은 마치 장자방
104이 神으로부터 兵書를 받은 것과 같고, 釋寶誌公 스님이 징조가 나타나기 이전에
105 예언한 것은
106 一行禪師
107가 음양 術數에 정통한 것과 같은 것이다.
108 스님께서 전하신 陰陽說 數篇
109이 세상에 많이 유포되었는데, 후세의 지리가들이 모두 이것을 依宗하였다. 명하여 가로되,
지난 세상 나타나신 모든 부처님!
無上甚深 微妙法을 연설했으니
그 법문은 文字로써 다툴 수 없고
聞思修인 三慧로도 얻지 못할새 ①
直指
110人心그 자리는 초연한 境地
一念卽是 千劫
111이라 長短이 없네!
위대하신 고려조의 우리 國師여!
禪悅世界 우유하게 自在하시네.
112 ②
達磨宗旨 禪思想을 善學하시어
113
眞空이나 空아니고 有도 아닐새
투철하신 眞正法眼
114 터득하시고
四通
115으로 자재하신 六神通
116이여! ③
無碍自在 확철하온 그 여력으로
117
陰陽數術 兼硏하여 교화하시다.
시서(蓍筮)
118로써 점복함을 依支치 않고
사건전에 미리 알아 적중하도다.
119 ④
후삼국을 평정하지 못하였으며
120
天의 명령 아직까지 닫혀 있으나
오래전에 지나간 일 모두 알았고
미래일을 미리 알아 예언하였다. ⑤
책을 지어 王隆에게 전해 주면서
121
고려국이 개국됨을 예언하였다.
周文王이 周나라를 건국하듯이
122
후삼국을 통일함이 손 펴듯 하다. ⑥
지리산속 구령에서 異人을 만나
123
地理書인 金壇玉笈 전해 받았다.
124
그로부터 각종 음양 연구하여서
上通天文 下達地理 自在하였네! ⑦
장자방과 도선국사 때는 다르나
125
두 사람이 예언함은 다르지 않네!
위대하신 그 공적은 비길 데 없고
산하처럼 높고 깊어 다할 수 없다. ⑧
열반한 후 오늘까지 삼백년이나
126
바람 불고 물 흐름은
127 다르지 않네
128
높은 德을 瞻仰하는 四部衆이여!
그 도덕이 높고 높아
129 하늘 같도다.
130 ⑨
偉業行狀 돌에 새겨 舊祠
131에 세워
천년 만년 지나도록 보여주려고
산신령인 山君
132에게 부탁하노니
길이 길이 수호하여 게을리 마오. ⑩
天德 2년
133 歲次 庚午 7월 乙亥 9일 癸未에 비를 세우고,
영오(穎悟)
134 三重大師 臣 處實
135이 왕명을 받들어 글자를 새기다
(陰記)
선각국사비 음기(先覺國師碑 陰記)
비문을 이미 비석에 새간 다음 해에
136 臣과 鄭叙와 함께 참소를 당하여 혹은 유배를 가거나, 혹은 공직에서 쫓겨났다.
137 朝士들이 모두 규탄하였으며, 臣들도 百喙
138으로 공격하여 반드시 死地에 놓여 원수의 배를 채워 주고자 하였다. 비록 도선국사의 사적이 臣의 賢과 不肖에 얽매이지 아니 하였으므로
139 한 마디도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비석이 마땅히 세워져야 할 것이나, 그 돌이 드디어 국청사
140의 문무(門廡)
141의 밑에서 20여년간 방치되어
142 먼지에 덮혀 쌓이고 흙이 묻어 부식되어
143 거의 비상한 功烈로 하여금
144 민멸(泯滅)하여 후세에 傳聞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성상폐하
145께서 즉위함에 이르러
146 난적
147을 잔제(剗除)하고 百度
148를 정돈하여, 유신
149 선정을 베풀었다. 국사의 법손인 운암사
150 주지 중대사 지문
151이 그 事訴로써 대사씨
152에 접수하여 드디어 교지를 받았다. 光陽縣貢
153을 불러 그 비석의 원석을 배에 실어 옥룡사로 보냈다. 임금께서 내시 양온(良醞)
154 서승(署承)
155 박봉균
156 등을 보내 공사를 감독케 하고, 대사
157 설호정
158 이양정
159에게 터를 정하도록 하였다.
160 석공은 화엄사 대중을 불렀고, 역부는 광양과 구례 두 현에서 징발하였으며, 군인 감무원(軍人 監務員) 장사랑 위위주부( 將仕郞 衛尉主簿)
161 한언방
162과 장사랑 위위주부 강립서
163등이 그 역사를 감독하였다. 그러나 실지 총감독은 주지 지문스님이 맡아 얼마 되지 않아 낙성하니, 三間의 비각이었다. 대정 12년
164 임진년 10월 19일에 수비(竪碑) 공사가 끝났는데, 구부가 산정(峻整)하고 계기(階基)가 견고하여 실로 천년·만년이 지나가도 전혀 기울어지지 않을 것이다.
165 탑비를 보호할 塔殿인 堂直
166은 절 동북쪽 약 2백보 지점에 세웠으니, 참으로 상개(爽塏)
167한 위치이다. 지문이 또 임금께 고하여 이르기를 원하옵건대, 本朝 王의 국사 비문도 구식에 의하여 석배(石背)
168에 법손과 제자 중에 대덕 이상의 직명을 실어, 미래에 영원히 垂示할 수 있도록 간청하였다. 계사년
169 5월 29일 주청하여 臣에게 음기를 짓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종파의 문손을 찾아, 이른바 正孫 10인을 아래와 같이
170
송림사
171 주지 중대사 형균
172
현갑사
173 주지 중대사 민언
174
중대사 지효
175
중대사 지연
176
중대사 언선
177
중대사 종순
178
중대사 처령
179
대사 혜온
180
대사 혜자
181
대사 혜의
182
금자(金紫)
183 광록대부(光祿大夫)
184 수사공 중서시랑 평장사 집현전대학사 판상서예부(守司空 中書侍郞 平章事 集賢殿大學士 判尙書禮部事) 치사(致仕) 신(臣) 최유청이 왕명을 받들어 기록하다.
癸巳 6월 14일 판허(判許)
185와 아울러 法孫들이 傳持하고 있는 4個寺
186도 새겨둔다.
문인 옥룡사 주지 중대사 臣 지문이 왕명을 받들어 비를 세우고,
보현사
187 주지 대오 중대사 신 기준
188은 조칙을 받들어 비문을 쓰며,
문인 참학 신 정충
189이 어명을 받들어 글자를 새기다.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3】(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