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증된 시호 장평공(莊平公)의 묘지명(廟誌銘)[題額]
추증된 시호 장평공(莊平公)의 묘지명(廟誌銘)
공의 이름은 효(侾)이고, 자는 경천(敬天)이며, 성은 왕씨(王氏)이다. 숙종(肅宗)의 다섯째 아들로 어머니는 명의태후(明懿太后) 유씨(柳氏)이며, 예종(睿宗)의 친동생이다. 성품이 정직하고 인자하며, 어려서부터 충성과 효도의 정성이 있었고, 삼교(三敎)에 마음을 두었다. 숙종이 특별히 총애하였기 때문에 어려서 이름을 지어주는 예식을 행하면서 임금이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연덕궁(延德宮)의 왕자인 그대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롭고 성품이 충성되고 효성스러우므로, 이제 밀명(密命)을 내려 효(侾)라는 이름을 지어주노라.”
섭공부상서 섭금오위상장군(攝工部尙書 攝金吾衛上將軍) 최정(崔廷)을 보내 은그릇, 비단, 포화(布貨), 곡식, 안장을 얹은 말을 하사하였다. 숙종이 항상 태후와 더불어 말하기를, “자녀가 비록 많지만 이 아이만이 효자라오. 자식은 효를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므로 사람 인(人)변에 효(孝)를 더한 글자로 이름을 지어준 것이오” 라고 하였다.
공의 나이 13세 되던 을유년(숙종 10, 1105)에 숙종이 승하하자 모후(母后)를 따라 궁궐에서 기거하였다. 건통(乾統)
1 6년 병술년(예종 1, 1106) 2월에 예종이 작위를 내려 봉의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대▨ 수사도 겸 상서령 상주국 대원후(奉義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大▨ 守司徒 兼 尙書令 上柱國 大原侯)에 봉하고 식읍(食邑) 2,000호 식실봉(食實封) 300호를 주었다. 정해년(예종 2, 1107) 11월에 임금이 서경(西京)으로 거둥하여 윤관(尹灌)과 오연총(吳延寵)을 원수로 삼아 여진(女眞)[東蕃]을 정벌하라고 명하고 공을 유수(留守)로 임명하니, (공은) 임금이 서울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그 명을 받았다. 건통 8년 무자년(예종 3, 1108) 4월에 검교대보(檢校大保)가 더해지고, 다음해 기축년(예종 4, 1109) 3월 병자가 초하루인 6일 신사일에 임금이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그대는 부왕 숙종이 사랑하던 왕자이고 짐이 총애하는 동생이오. 이에 작을 내리는 명을 반포하여 ▨ 총애하는 마음을 보이려고 하오.”
사신을 보내어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검교대사 수대위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호병부 감수사 상주국(三重大匡 開府儀同三司 檢校大師 守大尉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判尙書戶兵部 監修史 上柱國) 최홍사(崔弘嗣)를 책봉사(冊封使)로 삼고, 수사공 상서우복야(守司空 尙書右僕射) 최정(崔廷)을 부사(副使)로 삼아 임금의 부절(符節)을 가지고 예의를 갖추어 책봉하도록 하여, 봉의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보 수사도 겸 상서령 상주국 대원후 식읍 3,000호 식실봉 300호(奉義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保 守司徒 兼 尙書令 上柱國 大原侯 食邑 三千戶 食實封 三百戶)에 봉하고 아울러 인장 끈, 의복, 옷감, 포화(布貨), 은그릇, 안장을 얹은 말을 내려주었다. 건통(乾統) 11년 신묘년(예종 6, 1111) 정월에 광효공신 수태위(廣孝功臣 守太尉)로 삼고, 그 해 12월에는 문하성(門下省)에 명하여 관고(官誥)를 내려 말하였다.
“모후의 궁전에서는 안색을 살펴가며 효도를 다하고, 자신을 엄하게 다스리며 효도를 지극하게 하였습니다. 부왕의 궁전에서는 관직을 받들고 보좌를 다하니 공로가 더욱 많았고, 쌓인 공적이 소문이 나기에 이르렀으니, 포상을 내리지 않고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이에 중한 관직을 제수하여 그 덕을 표창하고, 아름다운 칭호를 하사하여 그 공이 드러나게 하는 바입니다.”
임진년(예종 7, 1112)에 모후가 승하하였다. 이듬해인 계사년(예종 8, 1113)에 임금이 모후가 생전에 소유하던 명복궁(明福宮)의 토지와 노비 및 열쇠를 함께 봉하여 하사하였다. 천경(天慶) 요(遼) 천조제(天祚帝)의 연호(1111~1120).
4년 갑오년(예종 9, 1114) 11월에 임금이 대묘(大廟)에 거동하여 대후(大后)를 신주(神主)에 모시면서, 공에게 명하여 어가(御駕)를 따르면서 아헌(亞獻)이 되게 하였다. 그 해 12월에 수인공신 대원공(守仁功臣 大原公) 식읍 3,500호 식실봉 350호를 주었다. 을미년(예종 10, 1115) 3월에 임금이 명하여 양간공(襄簡公)의 장녀 이씨(李氏)를 공의 비로 맞이하게 하면서, 조산대부 상서우승 직문하성 겸 태자소첨사(朝散大夫 尙書右丞 直門下省 兼 太子少詹事)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최홍재(崔弘宰)를 보내어 비단, 포화, 금은 그릇, 안장을 얹은 말을 내려주었다. 7월에 검교대부(檢校大傅)를 더하고, 문하성에 명하여 관고를 내려 말하였다.“입으로는 옳지 않은 일은 말하지 아니하고, 몸은 법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습니다. 임금과 어버이에게 충성과 효도를 다하고, 형제들에게 우애와 공손함을 독실하게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돌아가신 황제께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정치[鳲鳩之政]
2을 펼칠 때에도 홀로 선제(先帝)의 치우친 사랑을 받았고, 과인에게 대려지봉(帶礪之封)
3을 나누고 대방(大邦)의 길을 초월하게 하였습니다. 짐이 상복[亮陰]을 벗으면서 대묘(大廟)에 제사를 드릴 때 성비(聖妣)의 자손으로 이에 구주(九主)
4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을 도왔고, 또한 이릉(二陵)을 배알할 때에도 과인을 수행하였습니다. 이에 감히 작(爵)이 으뜸이 되므로 공에게 식읍으로 대읍(大邑)을 더하여 주는 바입니다.
”임인년(예종 17, 1122) 정월에 수대보(守大保)를 제수하고, 3월에는 문하성에 명하여 관고를 다음과 같이 내리게 하였다.
“돌아보니 이 어진 공(公)은 나의 사랑하는 동생인데, 부왕 숙종이 더욱 총애하였으니 짐의 마음에 어찌 감히 잊힐 리가 있겠습니까. 이에 국가의 법도에 의거하여 마땅히 후한 예우를 여러 차례 내려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교지를 내려 말하였다.
“경은 부왕 숙종이 사랑하던 아들이고, 짐이 총애하는 동생입니다. 부유하고 귀하게 태어났으나 능히 스스로를 낮추어 겸손하고, 출입하고 기거함에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으며, 보고 듣고 말하는 것과 몸가짐이 예의에 벗어난 일이 없으니, 실로 종친[宗籍]의 영걸이고 왕실의 방패가 되었습니다. 지위가 비록 5등보다는 높다고 하나 아직 3공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니 특별한 은전을 내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선행에 걸맞게 표창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높은 관직을 내리노니, 마땅히 총애와 광영의 칭송을 받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4월 여름에 예종이 승하하자, 5월에 새 임금<仁宗>이 숙부[大叔]의 예(禮)로 포상하여 찬화공신(贊化功臣)과 함께 식읍 4,000호 식실봉 500호를 하사하고, 9월에 다시 교서를 내려 검교대사(檢校大師)를 더하여 주었다. 새 임금이 아직 상중(喪中)[亮陰]에 있을 때 외가(外家, 李資謙)가 권력을 오로지 하여 나라의 형세가 자못 위험하게 되었으나, 오직 공만이 한결같은 절개로 사직을 지켜 안전하게 하려 하였으나 권신(權臣)이 거짓 왕명을 내려 강남으로 ▨(쫓아내었다). 기유년(인종 7, 1129)에 임금이 중사(中使)를 내려보내 서울로 맞아들이고, 이 해 12월 ▨9일 봉순동덕수절찬화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겸 상서령 대원공(奉順同德守節贊化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 守太保 兼 尙書令 大原公) 식읍 3,000호 식실봉 500호를 내려주었다. 다시 돌아오도록 명하는 교서[回降敎書]에서
“영남(嶺南)으로 쫓아낸 것은 본래 권신의 모략에서 나온 것이고, 궁궐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은 대개 ▨제(▨帝)의 우애에 따른 것입니다. 새로 지은 집을 하사하고 더하여 여러 가지 재물을 후하게 내립니다”
라고 하였다. 추밀원우승선 상서형부시랑 지제고(樞密院右承宣 尙書刑部侍郞 知制誥) 유충<韓惟忠>을 보내어 조서를 가지고 그 ▨▨으로 가서 주택 한 채와 아울러 금은 그릇, 비단, 안장을 얹은 말, 포화(布貨)를 내려주었다.
계축년(인종 11, 1133)에 공의 비
<뒷면>
이씨(李氏)가 사망하자 서울 동쪽의 송림산(松林山) 기슭에 장례지냈다. 갑인년(인종 12, 1134) 가을 7월에 다시 수의공신 ▨▨사(守義功臣 守太師)를 제수하고, 문하성에 명하여 관고를 내려
“돌아보니 이제 숙부는 우리 종실의 원로가 되었고, 세 임금을 섬기면서 한결같은 절개로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기미년(인종 17, 1139)에 다시 좌리공신(佐理功臣)을 더하고, 병인년(의종 즉위, 1147)에는 또 보정공신(輔靜功臣) 식읍 4,000호 식실봉 700호를 더하였으며, 정축년(의종 11, 1157)에는 여익공신(勵翼功臣)을 더하였다.
네 임금을 두루 섬기면서 시종일관 하나같이 절개를 지켰다. 공은 내교(內敎, 佛敎)를 열심히 믿었고, 노씨(老氏, 道敎)에 자못 심취하였으나, 인의설(仁義說, 儒敎)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불교와 도가와 유가의 글을 지었는데, 지금도 흥왕사(興王寺)의 교장보(敎藏寶), 복원궁(福源宮)의 천진(拪眞), ▨국부(▨國府)의 서적점(書籍店)에 걸려있다.
▨귀(富貴)하고 또 수를 누렸으니, 관직은 봉의동덕광효수인찬화봉순수절수의좌리보정여익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사 겸 상서령 상주국 대원공(奉義同德廣孝守仁贊化奉順守節守義 佐理輔靜勵翼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 守太師 兼 尙書令 上柱國 大原公) 식읍 4,000호 식실봉 700호에 이르렀다.
정풍(正豊)
5 6년(의종 15, 1161) 4월 10일 임자일에 공이 나이 69세로 노환으로 돌아가시니, 서울 광제사(廣濟寺)에 빈소를 차렸다. 임금이 신하를 보내 조문하고 뇌서(誄書)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관작(官爵)이요, 하나는 나이요, 하나는 덕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공은 이 세 가지를 모두 다 가지고 있는 ▨ 분입니다. ▨(공은?) 사람됨이 생김새가 범상하지 않고, 어려서부터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으며, 일찍이 임금의 총애를 입었습니다. 바르지 못한 것은 멀리하고 검소함을 따르며 ▨를 지키기를 오래하였습니다. 네 임금을 섬기면서 충성 이외에 다른 뜻을 품지 않았습니다. 내가 듣건대 어진 사람은 반드시 수를 누리고 편안하다고 하였으니, 마땅히 잘 섭생(攝生)하여 백세(百歲)가 되어도 바야흐로 강건함을 누려야 할 터인데, 겨우 일흔 살도 채 못되어 홀연히 떠나고 말았습니다.”
임금이 마음으로 탄식하며 애통해 하니 나라 사람들도 슬퍼하고, 신하들도 뇌문을 지으면서 눈물로 옷을 적셨다. 시호를 장평공(莊平公)이라고 추증하고, ▨8일에 서울 동산(東山) 기슭에서 화장[茶毗]하였다. 유골을 수습하여 잠시 인효불원(因孝佛院)에 두었다가, 이 해 11월 임인일에 무덤자리를 점쳐서 의룡산(義龍山) 동쪽 기슭에 장례지냈다.
명(銘)하여 이른다.
삼교(三敎)를 굳게 믿고, 정직하고 인자하였다.
허황된 것을 버리고 참된 것을 취하였으며, 검소함을 따르고 사치를 멀리 하였네.
네 임금을 두루 섬기면서 처음과 끝이 한결같도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