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국(高麗國)의 돌아가신 금자광록대부 특진 검교대위 수사도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형부사(金紫光祿大夫 特進 檢校大尉 守司徒 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判尙書刑部事)이고 시호가 문간(文簡)으로 추증된 최공(崔公) 묘지명
공의 이름은 함(諴)이고, 자는 자화(子和)이며, 성은 최씨(崔氏)이다. 8대조 서천(書遷)은 한남(漢南) 사람이니, 한남은 지금의 수주(水州)
1 이다. 서천은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막내인 한용(韓用)이 조정에 들어와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면서 비로소 서울에 거주하게 되었으며, 그 뒤 대대로 서울 사람이 되었다.
시중에게는 아들 한 명이 있으니, 이름은 융예(融銳)로 관직이 복야(僕射)에 이르렀다. 복야는 한 아들이 있어 이름이 사위(士威)인데, 현종(顯宗) 대에 큰 공을 세워 관직이 대사 내사령(大師 內史令)에 이르고,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내사령은 다섯 아들이 있는데 모두 귀하게 되었으니, 이로부터 참으로 번성하여 큰 가문을 이루었다. 그의 맏아들 충공(忠恭)은 관직이 어사중승(御史中丞)에 이르렀고, 공의 증조가 된다, 중승(中丞)은 다섯 아들이 있으니, 장남 유서(惟恕)는 관직이 호부시랑(戶部侍郞)에 이르고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추증되었는데, 공의 조부가 된다. 시랑(侍郞)은 네 아들이 있는데, 장남 계방(繼芳)은 관직이 수사공 상서우복야 참지정사 판삼사사(守司空 尙書右僕射 叅知政事 判三司事)에 이르고 화순(和順)이라는 시호를 추증받았으니, 이 분이 실로 공을 낳았다. 어머니는 귀성군대부인(歸城郡大夫人) 민씨(閔氏)로 합문지후(閤門祗候) 민령(閔寧)의 딸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학문에 부지런하였다. 12세에 문공(門功)으로 양온승동정(良醞丞同正)이 되었으나, 다시 학문으로 뜻을 바꾸었다. 21세가 되자 예종(睿宗)이 유사(儒士)를 친시(親試)할 때 공이 문장(文章)으로 진을과(眞乙科)의 제5인으로 급제하여
2 사경원판관(寫經院判官)으로 등용되었다가 내시(內侍)로 불려 들어갔다. 8품과 7품의 관직을 거치면서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겸하니, 문사(文詞)가 바르고 뛰어나 당시 사람들이 우러르며 복종하였다.
인종(仁宗)이 동궁(東宮)으로 있을 때에 하루는 임금<睿宗>을 모시게 되었다. 임금 앞에서 당시의 재능 있는 사람에 관해 말이 나오게 되니, (인종이) 공의 글이 고명(誥命)의 임무를 맡길 만하다고 하였다. 인종이 즉위한 지 3년(인종 2, 1124)이 되자 발탁하여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로 삼았다.
즉위한 지 5년째 되는 해(인종 4, 1126)의 2월에 조선공(朝鮮公) 이자겸(李資謙)의 무리인 척준경(拓俊京) 등이 궁궐을 침범하여 안팎에서 서로 맞서고 있는데, 척준경 등이 나무를 쌓고 동화문(東華門)
3에 불을 놓아 태워버렸다. 임금이 이에 두렵고 당황하여 남궁(南宮)으로 나갔는데, 공은 이 때 중서성(中書省)에서 ⃞ 국새(國璽)를 받들고 임금이 계신 곳으로 가서 처음부터 끝까지 곁에서 모시면서 지켰다. 일이 평정된 다음 좌정언(左正言)으로 옮기고, 이듬해 상주목(尙州牧)
4의 수령으로 나가니, 치적이 특히 두드러졌다. 임기가 차자 들어와 우사간(右司諫)이 되었다.
인종이 즉위한 지 9년(인종 8, 1130)인 가을과 겨울에는 전라도 안찰사(全羅道 按察使)로 나가서 점군사(點軍使)를 겸하고, 돌아와서는 전중시어(殿中侍御)로 바뀌었다가 다시 시어사 기거사인(侍御史 起居舍人)으로 옮겼으며 대자문학(大子文學)을 겸하였다. 12년(인종 11, 1133) 봄과 여름에는 관서로 안찰사(關西路 按察使)가 되어 나갔으며, 돌아와 시예부낭중(試禮部郎中)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어머니 귀성군대부인의 상을 당하여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상복을 벗기 전에 시이부낭중(試吏部郎中) 직을 바꾸어 받았다.
14년(인종 13, 1135)에 기거주 이부낭중(起居注 吏部郎中)이 더해졌으며 동궁시독사(東宮侍讀事)에 충당되었다. 공이 중서성(中書省)에 재직할 때에 같은 반열에 정지상(鄭知常)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서경(西京) 사람이었다. 요승(妖僧) 묘정(妙精),
5 일자(日者) 백수한(白守翰), 밀인(密人) 김안(金安) 등과 서로 사귀면서 모반하려는 마음을 품고 음양불궤의 설[陰陽不軌之說]로서 임금의 생각을 현혹시키고 천 가지 만 가지 계책으로 그 간사함을 이루고자 애썼다. 당시 조정에 있는 자들도 대학자나 현인이 아니면 복종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혹은 두려워하며 맹종하는 자도 있었다. 공은 정지상과 평소에 마음이 맞지 않아서 끝까지 그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 해에 묘정이 서경 사람들과 함께 반역을 일으키고 지상 등은 죽임을 당하였으니, 그 때서야 공이 멀리 보는 식견과 안목이 있는 것을 알았다. 인종이 일찍이 대신들과 그 일을 의논하면서 공을 말하여 “최함이야말로 지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총애를 베푸는 것이 더욱 깊어졌다. 해마다 승진하고 발탁되어 마침내 국자사업(國子司業)이 더해졌다.
16년(인종 15, 1137) 가을과 겨울에는 양광충청로 안찰사(楊廣忠淸路 按察使)가 되어 나갔는데, 곧 시중서사인(試中書舍人)에 제수되고 자의금어(紫衣金魚)를 받았다. 팔관회(八關會)가 열리자 임금이 불러 연회에 참석하여 자리를 함께 하도록 하였으며, 동궁시독학사 시어사중승(東宮侍讀學士 試御史中丞)이 더해졌다.
19년(인종 18, 1140)에는 예부시랑 한림시독학사(禮部侍郞 翰林侍讀學士)로 사마시(司馬試)를 주관하였는데 임금의 뜻에 맞았다.
6 이 해에 하절일사(賀節日使)로 금(大金)의 조정에 들어갔다가,
7 이듬해에 돌아와 차예부상서(借禮部尙書)로 지서경유수사(知西京留守事)가 되었다. 3년 동안 근무한 뒤 들어와 예빈경 보문각학사(禮賓卿 寶文閣學士)가 되고, 좌간의대부 사재경 수문전학사(左諫議大夫 司宰卿 修文殿學士)로 옮겼다.
황통(皇統)
8 6년(1146) 지금 임금<毅宗>이 즉위하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제수받고 명에 따라 동지공거(同知貢擧)로 ▨ 시험을 주관하였는데
9그 때에 인재를 얻었다는 평판을 받았으며, 국자감대사성 한림학사(國子監大司成 翰林學士)로 옮겼다. (황통) 10년(의종 4, 1150)의 봄과 여름에는 ▨▨로병마(▨▨路兵馬)가 되어 나갔으나, 병영에 부임한지 몇 개월 되지 않아 불려와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제수되었다. 지원사 한림학사승지 판삼사사(知院事 翰林學士承旨 判三司事)로 옮기고, 다시 ▨▨▨사 이부상서 우복야(▨▨▨使 吏部尙書 右僕射)로 옮겼다. 관계(官階)도 여러 차례 올라 특진 검교사도(特進 檢校司徒)에 이르렀다. 공은 좌우정언(左右正言)으로부터 추밀사(樞密使)에 이르기까지 지제고(知制誥)를 담당하지 않은 적이 한 차례도 없었으므로, 수십 년 동안 고명(誥命)이나 훈사(訓辭)가 많이 그 손에서 작성되었다. 정원(貞元)
10 원년(의종 7, 1153) 인물을 등용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의 평판이 모아졌으므로, 드디어 정당문학 판상서예부사(政堂文學 判尙書禮部事)로 발탁되었다. 이 때 권신(權臣) 가운데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있어 비밀리에 성각(省閣)을 꾀어 잘못을 지적하는 장주(章奏)를 여러 차례 올리도록 하였다. 임금이 이에 관리에게 명하여 그 일을 가려내도록 하니, 몇 해 되지 않아 그 일이 명확히 가려졌다.
정풍(正豊)
11 3년(의종 12, 1158) 다시 수사공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호부사(守司空 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判尙書戶部事)로 등용되었다가 판형부사(判刑部事)로 바뀌었으며 금자광록대부 검교대위 수사도(金紫光祿大夫 檢校大尉 守司徒)를 더하였다.
공은 사람됨이 비단 문장으로 뛰어나 ▨ 으뜸이 되었을 뿐 아니라, 도량이 깊고 무거웠으며 지략이 있었다. 국가의 법전을 능숙하게 이해하고 전고(典故)를 많이 알아 여러 관청을 두루 거치면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재상의 자리에 머물게 되자 ▨▨(〔聖恩〕)에 감격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임금으로 하여금 백성을 편하게 하는 통치를 이루게 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근심하고 괴로워하며 게으르지 않았으므로, 병이 든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5년(의종 14, 1160) 6월 28일 병환을 알리니, 임금이 어의(御醫)를 보내어 탕제(湯劑)를 하사하면서 구완을 잘 하도록 위로의 말을 내렸다. 병이 급속히 진행되어 7월 13일 돌아가셨는데, 나이 67세이다. 임금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여 사흘 동안 조회를 멈추고,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포목과 곡식을 하사하고, 장례에 필요한 물품들을 관청에서 지급하게 하였으며, 근신(近臣)들에게 명하여 장례를 돌보도록 하였다. 이 해 8월 임신일에 서울 서쪽 황봉산(黃鳳山)▨에 장례지냈다. ▨▨
처음 평장사(平章事) 김고(金沽)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부인은) 강릉군군(江陵郡君)에 봉해졌다. 자녀로 아들은 한 명 있으니 광세(光世)인데 지금 지인주
12사부사(知仁州事副使)이고, 딸 하나는 계림(雞林) ⃞⃞⃞와 결혼하였다. 다시 평장(平章)의 형인 시중(侍中) 김인존(金仁存)의 딸과 결혼하여, (부인은) 강릉군부인(江陵郡夫人)에 봉해졌다. 자녀로 세 아들 중 광척(光陟)은 내시 전 흥위위녹사(內侍 前 興威衛錄事)이고, 광겸(光謙)은 ▨▨승동정(▨▨丞同正)이며, 광균(光鈞)은 내시 사경원판관(內侍 寫經院判官)이다. 딸 하나는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 이세의(李世儀)에게 시집갔다. 모두 4남 2녀인데 광세, 광척, 광겸은 모두 가업(家業)을 이어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막내아들 역시 학문에 뜻을 두었으니 장차 공을 세우는 바가 있을 것이다. 내외손(內外孫)은 남녀 거의 20명이나 된다.
명(銘)하여 이른다.
▨▨(〔崔氏는〕) 현성(顯姓)으로 신라에서 비롯하고
우리 조정에 이르러 대가(大家)로 이름 났다.
공의 가계는 ▨ 덕을 으뜸으로 삼고
한남(漢南)에서 처음 벼슬에 나갔다가 서울로 옮겨 와 살았다.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오니 대대로 명경(名卿)을 배출하고
우리 공에 이르러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총애를 받고 귀하게 되어 삼공(三公)의 작위를 받고
베풀 줄 알고 지킬 줄 알아, 능히 공을 세웠다.
남겨진 복이 바야흐로 일어나 자손들이 계승할 것이니
이에 아들과 손자들이 오래도록 더욱 창성할 것이다.
빛나는 공의 업적, 국사(國史)에도 실려있지만
또한 명(銘)을 지어 새기니 천 년 만 년 드리우리라.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