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사
1주지(修理寺 住持) 자응요▨정혜통소원증신해증지 수좌(慈應了▨定慧通炤圓證神解證智 首座)의 묘지명 및 서문
스님의 이름은 관오(觀奧)이고, 자는 허중(虛中)이며, 속성은 최씨로, 그 선조는 수주(水州)
2 사람이다. 위주광국공신 수대사 내사령(衛主匡國功臣 守大師 內史令) 정숙공(貞肅公) 사위(士威)의 현손(玄孫)이고, 수사공 좌복야 참지정사(守司空 左僕射 叅知政事) 화순공(和順公) 계방(繼芳)의 둘째 아들이다.
12세에 숙부인 현화사(玄化寺) 승통(僧統) 상지(尙之)에게 투탁하여 머리를 깎고, 승통 영찬(靈粲)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았으며, 건통(乾統)
3 8년 무자년(예종 3, 1108)에 불일사(佛日寺)
4에서 계를 받았다. 천경(天慶)
5 3년 계사년(예종 8, 1113)에 숭교사(崇敎寺)
6 성복선(成福選)
7에 합격하고, 7년 정유년(예종 12, 1117)에는 봉은사(奉恩寺)
8 대선(大選)에 합격하여 대덕(大德)이 주어졌으며, 임인년(인종 즉위, 1122)과 계묘년(인종 1, 1123)에는 특별한 은사로 대사(大師)와 중대사(重大師)가 더해졌다.
을사년(인종 3, 1125)에 외제석원(外帝釋院)
9 에서 임금을 모시고 불경을 강론하니, 임금의 뜻과 맞았으므로 자첩가사(紫帖袈裟) ▨령(〔1領〕)을 하사하였다. 임인년(인종 즉위, 1122)에는 즉위를 축하하는 법회에 참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여름에도 불경을 강론하였다. 신해년(인종 9, 1131)에는 공의(共議)에 따라 처음으로 월악사(月岳寺)
10 주지가 되고, 정사년(인종 15, 1137)에는 임금이 글[批]을 내려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다. 이 해에 공의에 따라 두 번째로 천흥사(天興寺)
11 주지로 옮겼다. 무오년(인종 16, 1138)에는 특별히 만든 마납가사(摩衲袈裟) 1령을 임금이 내려주었으며, 황통(皇統)
12 2년 임술년(인종 20, 1142)에는 수첩가사(壽帖袈裟) 2령과 옷 한 벌과 아울러 왕실의 차(茶)와 향(香)을 내려주었다. 5년 을축년(인종 23, 1145)에는 글[批]를 내려 수좌(首座)를 더하고 마납엄척(摩衲掩脊) 1령을 하사하였다. 6년 병인년(인종 24, 1146)에 공의에 따라 세 번째로 법천사(法泉寺)
13주지로 옮기면서 채색된 비단 바탕에 쓰인 관고(官誥)를 하사받았으며, 정원(貞元)
14 2년 갑술년(의종 8, 1154)에는 공의에 따라 네 번째로 수리사(修理寺) 주지로 옮아갔다.
무릇 주지로 머물던 곳이 모두 유명한 가람이었는데, 그 승려와 대중들도 스님을 공경하고 어려워하였다. 배우려는 사람들이 흠모하며 귀의하니 일종(一宗)의 주춧돌이 되었고, ▨▨▨ 세 임금의 대우를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스님도 이미 나라의 은혜를 후하게 받았으므로 이에 보답하고자 하여 특별히 안성군(安城郡)
15에 바라밀사(波羅密寺)를 지었다. 절이 완공되어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서 십육나한상(十六羅漢像)을 보내 법당에 모셔두게 하였다. 스님은 이에 ▨▨사(▨▨寺)와 원당(願堂)인 충주(忠州) 덕주사(德周寺)의 산승(山僧)을 소집하여, 축성도량(祝聖道場)을 상설하였다. 주지로 있던 사찰 ▨▨, 현화사(玄化寺), 안성원(安性院), 머무르던 사찰의 법당에서 친히 제자들을 거느리고, 아침저녁으로 향을 사르며 정성껏 법회를 열어 종(鐘)과 경(磬) ▨▨▨으로 성대하게 불공을 올리는 것을 감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상적인 행사로 삼으니, 이것은 모두 임금을 축복하기 위한 소원이었다. 머무는 ▨▨▨.
이듬해 오산원(鼇山院)
16 지남대로(指南大路)에서 겨우내 시여장(施與場)을 크게 열었다. 여행하거나 왕래하는 승속(僧俗)의 남녀 ▨▨▨ 어린아이와 아래로는 타고 다니는 짐승에 이르기까지, 주린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는 물을 주면서 배부르고 따뜻하게 하기에 모자람이 없게 하니, 그 혜택과 ▨▨▨▨ 재물이 몇 천만 억인지 알기 어려웠다.
정풍(正豊)
17 3년 무인년(의종 12, 1158)에 5월 21일 병으로 ▨▨▨▨ 63세이고, 승랍은 52세이다. 임종할 때에도 정신과 얼굴빛은 변하지 않아 평상시와 같았다. 문하의 제자를 불러 일(一)▨▨▨ 새로 이루어진 ▨본(本) ꡔ화엄경 원기(華嚴經 願記)ꡕ를 말하고, 그 밖에 죽은 뒤의 나머지 일은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참으로 뛰어난 분이다. 이 해 8월 ▨일 병신일에 제자들이 유골을 받들어 무덤에 안장하였다.
스님은 천성이 겉으로는 엄숙하고 안으로는 온화하였으며 덕을 온전하게 갖춘 불제자로서, 바라보면 근엄하였다. 경(經)·율(律)·논(論) 이외에도 아울러 유가(儒家)의 서적을 널리 읽고, 날마다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을 읽었다. 불경을 강독하는 나머지 시간에는 손님을 기쁘게 접대하고 종족(宗族)들에게도 온후하게 대하였다. 공덕(功德)을 짓는다는 소문을 듣거나 경조사가 있으면 곧 재물을 희사하여 도왔고, 가난한 선비와 유생 중 생활이 궁핍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많이 베풀어주었다. 그러므로 돌아가신 후 거처하던 방장(方丈)을 살펴보니 아무 물건도 가진 것이 없고, 오직 손님을 접대하던 다과(茶果)와 그릇뿐이었다. 다른 산문(山門)에 흩어져 있던 문하 제자들로 장례에 달려와 참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佛〕)과 유(儒)를 ▨ 겸한 사람이 스님의 평생의 업적을 적고, 이에 명(銘)을 지어 이른다.
지광(智光)
18의 문하에 혜덕왕사(惠德王師)
19가 있고
법손(法孫)이 대를 이어 그 가지가 무성하게 뻗어났네.
스님이 또 그 뒤를 이어 당대에 빼어나니
여러 차례 높은 법계를 받고, 네 절의 주지를 역임하도다.
승도(僧徒)들은 삼가고 두려워하고, 배우는 자들은 기뻐 따르며
임금은 은총을 보여 법복(法服)을 하사하니, 위엄있는 모습으로 무리들을 복종시키네.
나라에 복을 받게 하였으니 수명이 마땅히 길 줄 알았으나
하늘은 어찌 도와주지 않아 명(命)이 여기에 그치고 마는가.
산이 무너지고 들보가 꺾어졌으니 온 나라 사람이 슬퍼하지만
남기신 말씀 아직 남아 있어서 피를 맑게 하고 마음을 가다듬게 하네.
훌륭한 이름 썩지 않으리니 천 년 만 년 갈 것이로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