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국(高麗國) 금자광록대부 판위위사 어서검토관(金紫光祿大夫 判衛尉事 御書檢討官) 박공(朴公) 묘지명 및 서문
금오위녹사참군사(金吾衛錄事叅軍事) 신응룡(愼膺龍) 지음.
박씨의 선조는 계림(雞林)
1사람으로, 대개 신라(新羅)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후예이다. 신라 말에 그 후손인 찰산후(察山侯) 적고(積古)의 아들 직윤(直㣧) 대모달(大毛達)이 평주(平州)
2로 이주하여 관내 팔심호(八心戶)의 읍장(邑長)이 되었다. 그로부터 직윤 이하의 후손은 평주 사람이 되었다. 직윤의 아들은 삼한공신 삼중대광(三韓功臣 三重大匡) 지윤(遲㣧)이고, 지윤의 아들은 삼한공신 대위(大尉) 겸 시중(侍中)인 수경(守卿)인데, 수경의 아들은 삼한공신 사도(司徒) 승위(承位)이니, 공은 곧 승위의 4대손이다.
공의 이름은 경산(景山)이다. 증조는 대자대부(大子大傅) 종(琮)이고, 조부는 대자대사(大子大師) 충후(忠厚)이며, 아버지는 참지정사(叅知政事) 문열공(文烈公) 인량(寅亮)이다. 공은 어려서 문열공의 음(蔭)으로 선종(宣宗)
3 7년 경오년(1090)에 처음으로 장례령동정(掌醴令同正)이 되었다. 병술년(예종 1, 1106)에 경령전판관(景靈殿判官)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예부시(禮部試)에 나가 을제(乙第)로 급제하였다.
4 여러 관직을 거쳐 예빈주부 겸 직사관(禮賓主簿 兼 直史館)에 이르렀다. 예종(睿宗)이 학문을 발전시키고자 처음 보각(寶閣)을 설치하여 서연(書筵)이라 불렀는데, 엄한 기준을 세워 선비를 선발하니 공이 대악령(大樂令)으로서 교감(校勘)의 직책을 겸하였다.
인종(仁宗)이 왕위를 잇자 태평한 날이 오래 되었으나, 선왕의 업적을 이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아 대간(臺諫)의 직무를 맡을 사람을 가려 뽑았다. 공이 중서주서(中書注書)로부터 발탁되어 좌정언 지제고(左正言 知制誥)에 올랐다. 얼마 안되어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이 되고, 곧 이어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옮겼으며 ▨ 지제고(知制誥)[三字]를 겸하였다. 을묘년(인종 13, 1135)에는 국자사업 충사관수찬관(國子司業 充史舘修撰官)이 되고, 갑인년(인종 12, 1134)에는 재능이 사신의 임무를 감당할 만하다고 하여 북국(北國, 金)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5 여러 차례 승진하여 이부시랑 겸 대자우유덕(吏部侍郞 兼 大子右諭德)이 되었다가 곧 국자제주 지도성사(國子祭酒 知都省事)로 옮겼다.
계유년(의종 7, 1153 )에는 남성시(南省試, 國子試)를 주관하였다.
6 당시의 문인들이 문장의 자구(字句)에 얽매이는 것을 한탄하여 이에 유행하는 문체[近體]를 모두 물리치고, 그가 뽑은 글은 모두 거칠고 호방한 것이었으니 가히 커다란 형세를 이룰 만하였다. 몇 년 뒤 문생(門生) 중에 문장으로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이 줄지어 나와 끊이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다 탄복하여 공을 사람을 알아볼 줄 아는 이[知人]라고 불렀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관대하고 공평하며, 사람과 사귐에 거짓됨이 없었다. 조정에 있을 때에도 바르고 곧은 것을 스스로 지켜서, 공적인 일이 아니면 일찍이 권세 있고 지위 있는 가문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물과 재주가 당시에 으뜸이었으므로 화려한 관직을 역임하면서 금자광록대부 판위위사 어서검교관(金紫光祿大夫 判衛尉事 御書檢校官)에 이르렀다. 기사년(의종 3, 1149)에 은퇴를 청하고, 집안에 들어앉아 글씨와 그림을 감상하면서 스스로 열중하였다. 그 사이에 간혹 불경을 외우는 것을 일로 삼으며 기뻐하기도 하였다.
무인년(의종 12, 1158) 2월 18일에 병으로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78세이다. 겨울 11월 28일에 서울 서북 강음현(江陰縣)
7의 동쪽 기슭에 장례지냈다.
부인 왕씨(王氏)는 대자대보(大子大保) 왕준(王濬)의 딸이다. 장남은 경선점녹사(慶仙店錄事) 효지(孝至)이고, 2남은 전중내급사동정(殿中內給事同正) 효진(孝晉)으로 갑자년(인종 22, 1144 )에 과거[高第]에 합격하였다.
8 딸 한 명은 작고한 소경(少卿) 이진(李瑱)의 아들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 원보(元甫)에게 시집갔다. 부인이 공보다 먼저 죽었으므로, 원외랑(員外郞) 왕찬(王瓚)의 딸을 계실(繼室)로 맞이하였는데 자녀는 없다.
공의 조부와 증조부는 모두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문열공이 두 차례 중국에 사신으로 갔는데, 중국 사람들이 권할 때마다 (책을) 한 편(篇)씩 새겨서 널리 전하여졌다. 지금까지도 송(大宋)에서 만든 책 중에 문열공이 지은 것이 가끔 보이고 있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공의 성대한 덕이 드러난 이후로 좋은 명예와 명망이 널리 알려져 관각(館閣)의 임무를 맡게 되었고, 또 뛰어난 문장과 능숙한 솜씨로 문장을 가다듬고 부연하는 직책을 오랫동안 맡았다. 공의 후손 가운데 또 사씨(謝氏) 집안의 자제와 같은 자가 있으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박씨 가문을 문장의 집안이라고 부르는 것도 근거가 있는 것이다.
명(銘)하여 이른다.
뿌리 깊도다, 박씨여. 계림(雞林)에서 비롯하여
신라 말기에 직윤(直㣧)이 서쪽으로 옮기고
우리 나라를 세울 때에 풍운과 함께 일어났네.
훌륭하도다, 문열공(文烈公)이 나라를 빛내고
풍성한 덕(德)을 이룬 여러 아들들이 모두들 시문에 뛰어난 좋은 재목을 이루니
세상에 나가 소요하는데 그 중 공이 가장 으뜸이도다.
벼슬을 시작하여 높은 관직을 두루 역임하다가
조정에서 물러나니 고니[鴻]가 나는 것처럼 그윽하였으며
마음을 담백하고 소박하게 가지면서, 불경을 때때로 읽었네
쌓은 선행으로 남겨진 복이 오래오래 더욱 퍼져갈 것이니
어찌 그러함을 알겠는가, 집안에 뛰어난 자제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네.